지켜야 할 세계
카톡, 카톡.
잠이 들락 말락 하는 늦은 밤, 전화기에서 울리는 알림 소리가 고요한 방안의 공기를 스친다.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 보면, 나도 모르게 앱이 깔려 있거나 엉뚱한 이에게 의미 없는 전화가 걸려 있곤 한다. 내가 한 일이 아니라 허벅지의 짓이었다고 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겠지. 어쩌면 카카오톡 알림이 실수로 다시 켜졌을 수도 있다.
곁에 누운 예민한 옆지기의 잠을 깨울까 봐 조심스레 핸드폰을 들었다.
혹시… 옛 여인의 메시지일까? 아니면 몰래 주문한 물건의 배송 알림?
걱정 반, 기대 반으로 화면을 켠다.
동생의 메시지가 줄지어 와 있다.
급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
장문의 글, 조카의 군입대를 알아보다가 알게 되었다는 병무 비리에 대한 확신, 직접 만든 블로그 링크, 캡처한 기사, 그리고 정치에 대한 글들.
정의로움은 보이지만, 그 확신을 지지할 근거는 부족했다.
병무청을 상대로 진정서를 내고, 행정심판을 청구하고, 검찰 고발까지 이어진 그의 행적을 보며 나는 안타까움보다 짜증에 가까운 감정을 느낀다.
그의 집요함이, 그의 외로운 집착이 나를 향한 듯 불편하다.
그는 한때 아파트의 입주자대표회의와 부녀회 비리를 파헤치겠다며 몇 해를 그 일에 매달린 적이 있었다.
입주자대표회의라는 작은 정치판은 이미 노련한 은퇴자들이 서로의 이해관계를 엮어 조용히 장악하고 있었다.
세입자였던 그가 끼어들 틈은 처음부터 없었다.
입주자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누구도 복잡하고 피곤한 일에 깊이 개입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자신과 직접 관련된 손해가 없다면, 돈을 벌고 아이를 키우고 자신의 꿈을 향하여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도 이미 벅찬 것이 삶이니까.
그럼에도 그는 아파트 약관을 검토하고, 법조문을 뒤지고, 진정을 쓰고, 행정 서류를 도맡아 작성했다.
직업도 아니고, 보상도 없었으며, 얻는 것이라곤 몇 끼의 식사와 예전에 잘나갔고 한자리했다는 늙은이들의 칭찬을 흉내낸 빈말뿐이었다.
그것이 그에게는 자신에 대한 인정이었고 정의였지만, 나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서글픈 착취처럼 느껴졌다.
지나고 나서 자신이 했던 일들이 조금은 후회도 있었을 듯한데 이사를 하고 나서 잠잠해졌던 그가, 이번엔 병무청과 공무원, 국가를 상대로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가 사업이 망하고 경제적으로 바닥까지 내려가서 한창 힘들었을 때, 나는 자주 그의 마음이 생에 대한 포기로 무너지지 않을까 불안했다.
그의 친했던 친구 둘은 이미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한 명은 식당을 운영하다 망하고, 이혼한 뒤 속초의 작은 원룸에서 생을 닫았다. 절친이라도 그 친구의 삶을 위해 대신 해줄 누구 하나 없었다.
다른 하나는 강남 건물주의 부모를 둔 큰 키에 모델처럼 멋지고 부유한 친구였지만 우울에 잠겨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그즈음 또 내 절친의 동생도, 갑작스레 자신을 스스로 거두었다. 결혼을 하지 않고 친구와 같이 살다가 독립을 시키자 말자, 목숨을 버렸다. 40이 다된 동생을 좀 장가라도 가라고 친구들은 독립을 부추겼지만, 친구만이 동생이 불안한 상태였던 것을 알았기에 같이 살았던 것을 우리는 몰랐다. 그의 죽음에 친구들은 마음의 부담을 가졌지만, 누구도 책임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연예인들이 또 주변 지인들의 죽음이 유행처럼 번지는 시절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동생이 무엇이 되었든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했다.
삶의 형태가 어떤 것이든, 죽음보다는 나은 쪽이라 믿었다.
나는 형제라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해가 갈수록 이해의 간격은 점점 더 멀어졌다. 사람들을 만나면 자기 생각과 주장만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가 정치적으로 나와는 반대편에 있어도 양비론에 빠져 세상을 조소하기만 해도 나는 참아야 했다. 거기까지였음 좋았지만 그는 또 다른 몰입을 했다 생각이 아닌 행동이 동반된 일은 직간접적으로 그에게 파급을 가져올 수도 있었다.
또 공무원들과 언쟁을 벌이고 행정적인 불법이라 믿고 그 사안에 집착하고, 거대한 음모를 파헤치려는 태도는 뜻밖이었다. 또 동생은 위험해보이고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사실 나도 젊은 시절엔 그런 것들을 좋아했다. 젊은 시절은 누구나 주류보다는 마이너한 것들이 더 끌린다. 세상에 대한 반발심이 가득한 시기였고 비밀스러운 그런 이야기들이 마음에 다가왔다.
대륙고려, 민족사관, 프리메이슨과 같은 주류 바깥의 이야기들. 수많은 미스터리와 감춰진 진실 불교 신자였던 예수 등등 밝혀지지 않은 진실의 이면을 파고드는 일이 어쩐지 더 지적이고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시절.
하지만 어느 순간, 답을 알 수 없다는 것, 또 세상이 그렇게 허술하지도 않았고 자신이 특별하다는 착각은 깨진다. 나보다 못난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보다 그걸 내가 ‘밝힐 수 있는 일인가’의 여부가 더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객관의 바깥에 있는 일들은 그냥, 거기 있도록 두는 것이 삶에 필요할 때가 있다.
아마 동생은, 자신의 실패와 경제적으로 곤궁한 시절을 맞으며 자신이 베풀거나 주었던 애정에 비해 형제나 친구들로부터 돌아온 무심한 시선에 실망했을 것이다.
도움을 기대했지만, 세상은 늘 그렇듯 자신을 스스로 구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과 열패감 절망, 그 외로움 속에서, 그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었고 그 안으로 점점 들어가고 있다.
형으로서 내가 그를 이끌 수 있을까. 내가 사는 방식이 최선은 아니지만 너도 참을 건 참고 못 본척하고 남들처럼 살아라, 너만 뭐가 잘났냐? 수도 없이 이야기했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아니었다. 나는 그럴 자격도, 능력도 없었다.
나 또한 삶 앞에 서툴고, 모르는 것이 많으며, 미혹에 가득한 사람이었고 동생이 생각하는 세상이나 마음보다는 내가 보는 내가 바라는 이기심으로 그를 몰아붙였던 것 같았다.
내가 그에게 하는 말은 하나 마나 한 말들, 어쩌면 그저 잔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그럼에도 마음은 걱정된다.
혹시 그가 쥐고 있는 그 ‘진실’이라고 믿는 그 속에 동생이 사실은 삶을 버텨내는 마지막 지지대는 아닐까.
그게 무너지면, 삶을 지탱할 의욕마저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큰 역경에 빠진 후 종교를 얻고 그곳에서 위로와 힘을 얻기도 하는 이치는 아닐까? 그런 상황이라면 시시비비를 가르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모두 비슷하게 먹고 자고 살아가는 것 같지만 얼굴마저도 닮아있는 사람이라는 몸뚱이로 살고 있는 종이지만 정신이 깃드는 곳, 영혼이 향하는 방향은 다 제각각이다.
성별이 다르고 민족이, 나라가, 세대가 다르고, 지역이 다르고, 종교와 직업과 인간관계가 다르다.
그 모든 것들이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의 ‘좌표’를 조금씩 달라지게 만든다.
삶이란, 지워지지 않는 CPU를 가지고 태어나서 하드웨어 위에 각자의 선택으로 프로그램을 하나씩 깔아가는 일 같다. 어른이 되고 나면 누군가 추천해 주지도 강제로라도 깔아주지 않는다. 오직 본인이 살아내며 찾고 취사선택해야 한다.
누군가는 뉴스 앱을, 누군가는 게임을, 누군가는 종교를, 누군가는 고요한 침묵을 선택한다.
어떤 프로그램은 이미 깊이 설치되어 되돌릴 수도 없다.
사람 고쳐 쓰지 못한다는 말은, 단순한 사람에 대한 포기와 체념이 아니라 어쩌면 그 사람의 세계를 ‘인정’하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자유네 이념이니 성공이니 그런 것들이 생존보다 앞서는 것들이 아닐 것이다.
기독교인에 신이, 제사를 지내는 일, 자식을 낳는 일, 낳지 않는 일, 세상의 많은 규범이나 신념들을 가지고 그것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에게는 중요하지만, 남들에게는 관심이 없는 때로는 불편한 느낌을 받는 일들이 있다.
우리가 서로에게 기대하는 세계관이나 가치관을 굳이 바꾸려 하는 것은 내 세계의 확장이고 타인의 세계를 침범하게 된다.
기아로 죽는 이보다 더 많이 이념과 신념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살아가는 것은 밥 보다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기대어있는 자신의 세계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
다수가 생각하는 기준에서 사람들은 조금씩 엇나가고 모자라기도 한다.
성소수자들, 장애인이나 지능이 떨어진다고 그들이 사람이 아닌게 아니듯 그냥 그래도 받아주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서로가 연결되고 공감되는 것은 다른 세계를 넘어야 하는 일이라 어려울 것이다.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고 영원히 해결하지 못할 인간이 가진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불가능 속에서도, 다름을 인정하고 하나가 되기를 강요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세상을 전쟁과 불화로부터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도 나의 세계조차 다 알지 못하고 또 당신을 다 이해하지도 못하지만 그럼에도 당신의 세계를 존중한다.
우리는 같은 세상에 있지만, 각자의 다른 세계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살아간다. 하나라는 환상 속에는 수많은 갈등과 혐오가 숨어있다.
각자가 지켜야 할 자신의 세계를 굳건히 하는 일이 서로가 이해와 연결의 길이 되는 이상한 아이러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