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림을 처음 접하게 되는 것은 미술관에 있는 유명작가의 명화가 아니다.
동화책 속의 한컷 조잡한 인쇄물의 삽화를 보았고 문방구 앞에 팔던 수많은 학용품 속에 그림들, 만화들을 접하면서 였다.
한 면에 그려진 추상과 밋밋한 배경 인물의 얼굴 하나로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감정을 느끼고 울림을 들을 수 있었다.
가나다라마바사 외워가는 한글을 배우기도 전에 그림들은 이야기를 건넨다.
말풍선의 글자를 한글자도 읽지 못하면서 만화책속으로 빠져든다.
색감과 빛이 음영들, 그림이 펼쳐진 작은 종이 한면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도 한 편의 소설과 이야기는 내 머리속에서 퍼져나가는 경험을 한다.
우리 모두 만화책과 그림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선망은 어린시절부터 각인이 시작된다.
애니메이터, 삽화가, 그래픽노블 작가. 그녀의 여러가지 이름으로 수식되어지만 익숙한 것은 하나도 없다. 실상 이런 작가나 책이 있었는지 하물며 외국에서 더 인지도가 있고 여러 상을 수상을 하고 단순한 그림이나 일러스트를 넘어서 애니메이션영화가 만들어진 것 까지도 몰랐다.
더구나 그녀는 아직은 너무 젊고 어리고 페미니스트라니, 중년남성으로 색안경을 벗어내기 조금 두렵고 어려운 일이었다.
딱 한페이지 책을 열어 첫장을 보는 순간 글이 보이지 않는다.
몽환적이고 쓸쓸한 삽화들과 그림들은 무엇인가 할 말이 많은듯 보이고 한 컷 한 컷을 보는 일, 아니 읽어내는 일은 더디고 오랜시간을 잡아 먹는다.
최규석작가의 초기작들이나 송곳같은 사회문제를 공론화하는 작품을 좋아하는데 박인주작가는 또다른 방식으로 비슷한 결을 가진 것 같다.
거대담론이나 사회에 모순을 디테일하게 담아내기보다는 좀더 본질적이고 존재론적인 이야기, 여성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노골적인 묘사나 개연성이 떨어지는 상황의 일반화를 하기보단 좀 더 세련되고 똑똑하게 비유와 상징을 가져왔다.
억압과 피해자들의 구속에대한 반증으로 날개를 가져온 작품들이 많이 있지만 여성에게만 있는 날개의 상징은 매우 강렬하고 직설적이면서 반어의 묘를 살렸다.
감춰야하는 퇴화한 기관으로 날개는 자유와 해방이라는 상징이 구속의 상징으로 표현된다.
여성 삼대 조모녀의 이야기속에 시대적인 상황과 부조리를 언급하지만 급진적이거나 노골적인 남성에 대한 적개심이나 배척해야할 대상으로 이끌지 않는다.
이야기의 참신함이나 새로움보다는 그래픽소설로서 삽화와 그림들이 더하여져서 좀 더 강렬한 설득과 동조를 이끌어내게 만든다.
자신이 하고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고 또 그것을 표현하는데 고민과 성찰이 엿보인다.
시대가 너무 각박하다 보니 여성을 포함한 소수자들의 이야기는 조금씩 목소리가 작아지고 있는 시대이긴 하지만 아직도 정확하고 합의된 정의는 내려지지 않았다.
어차피 여성 남성을 떠나 인간의 존재라는게 정의내려질 수 영원히 없는 문제이긴 하지만 실상 문제는 관계의 문제이고 변하는 시대에 따른 부조화가 클 것이다.
핵가족을 넘어서 가족의 붕괴를 맞는 지금 이시대에서 여성의 의미와 사회적 역할 또는 관계의 정립을 이야기 할 시기인것 도 같다.
종의 번식을 넘어선 출산과 육아에 대한 새로운 인식, 이를테면 낳지 않고 키운정은 낳은 정만 못한 것이 아닐 것이고 인간을 넘어서 이종의 생명들 , 반려동물들에 대한 인간의 집착과 애정은 육아를 하는 모정과 부정을 넘어서기도한다.
어머니라는 존재, 역할의 가여운 의미는 자신보다 우선하는 존재를 받아들이고 인정한다는 것에 있다. 물론 부정도 있겠지만 대표적인 여성성 사회가 바라는 모습과 강요하는 것은 모정이고 육아였다. 바뀐 세상이라고 하여도 여자에게는 선대부터 짐지워진 그 역할, 혹시 모정과 어머니를 칭송하는 수많은 세속의 말들은 교묘하고 잔인한 꼬드김과 학습으로 만들어 졌을 지도 모른다.
우리세대의 누이들은 사랑보다 희생을 배웠고 강요당했다.
개미나 벌들의 군집처럼 각자의 개성과 개인의 행복보다는 집단 군집의 가정 집안의 일원으로서 떄로는 일개미나 일벌처럼 살도록 강요받기도 했다.
대를 잇는 것, 남자중심의 부계사회의 관습과 질서에 여성들 딸들은 그저 친정집안에서는 자신을 위한 아무 역할이 없었고 오로지 보조하는 존재였다.
어머니들은 딸은 언젠가 다른 군집의 일원으로 합류하게 될 타인으로 딸을 보았기에 아들과 차등을 두었고 차별하기도 했다. 지금도 일부 노인세대에서는 스스로 어쩌지 못하고 인에 박힌 생각으로 아들과 딸을 차별하는 사람도 있다.
바뀌어 가고 있는 세상에서 젊은 여성들은 세상을 바라보면 어떤 불만이나 부조리를 느끼는지는 내가 알기에는 힘든일이다.
실상 여성문제나 운동이 지지부진해진 것은 남자고 여자고를 떠나 총체적으로 힘든 인생살이를 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에 둘을 나누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무의미해졌는지 모르겠다.
먼 훗날 임신의 과정은 인큐베이터가 일반화되고 남녀 각각의 정자와 난자는 충분히 냉동보관이 되는 세상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의학의 발전은 조금 삐딱하게 윤리의 벽을 넘어 자가생식이나 장기를 목적으로 변형된 반인반수같은 생명체가 키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보다 더 나가면 원형생물처럼 분열하여 자가 생식을 하는 인류가 될 수도 있고 남녀의 성은 의미가 없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어머니라는 존재 여성이라는 존재에게 짐지워진 그 무거운 삶을 볼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어제의 북콘서트를 참석해 듣고 있으면서 똘망하고 빛나던 박인주 작가의 눈동자가 떠오른다. 쓰여진 이야기 보다 더 쓰고 하여야 할 말들이 많이 남은 듯 자신의 책과 글과 그림에 대하여 막힘이 없이 이야기를 하였다.
다음 작품, 또 연륜이 더해가며 삶을 지나면 쌓여가는 이야기들은 어떨지 궁금해지고 기대가 된다.
글을 쓰면서 어설픈 나의 글들이 차라리 그림이나 사진으로 번역이되어진다면, 머릿속의 상상들과 밤마다 꾸었던 꿈들이 그려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어찌보면 박인주작가는 시각적인 모든 것을 통달해나아가는 종합적인 예술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올해 연말 즘 단편영화로 박인주 작가의 수상소식이 뉴스에 나올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