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는 포성과 총성이 울리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는 전쟁이었다. 건물들도 거리들도 부서진 잔해는 보이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엔 매캐한 화약 냄새가 빠지려면 몇 해가 더 지나야 될지 알 수 없었다.
이제는 매서운 겨울 같은 시절만 잔해 속에 남겨 있었다
장갑한 짝 방한복이 없이 겨울을 지나기 위해서 그저 계절이 지나갈 때까지 뛰어가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기에 그래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상이 어지럽고 난망한 시절이라 사람들은 무언가에 기대어 버텨 보려는 게 인지상정인 법인데 무속인들과 점집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더구나 대통령 당선이 무속의 힘으로 덜컥 된 걸 보았으니 물어 무엇할까
혜정이 차를 몰고 시간 반이나 걸려 도착한 곳은 광주의 신축빌라단지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사 층을 힘겹게 올라와 둘러봐도 별 특이한 문패나 상호도 없다
401호를 찾아 인터폰을 누르자 한참 만에 문이 열린다.
"어서 오세요 찾기 어렵지 않으셨지요? 이 쪽에 잠깐 앉아계세요."
눈빛이 부리부리한 걸 빼면 국악마당에 나와 판소리 한판 걸쭉하게 할 것 같은 날창 한 몸매의 여자가 소파를 가리키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나이가 어려 보여서 왠지 찜찜한 생각이 들다가 신빨이 좋으려면 어린 게 좋겠지 하고 소파에 앉아 숨을 고른다.
"들어오세요 이리"
"네"
" 저는 신령님을 모시는 사람입니다만 역학도 공부를 했으니 편안하게 알고 싶은 거 다 말씀해 보세요"
" 아, 네 제가 장사를 하는데 이걸 접어야 하는지 다른 거 뭐 좀 해야 하나 답답해서요"
"어디 보자, 음 음 결혼을 일찍 하셨네요 일찍 하심 안 되는 사주인데 지금은 혼자시져?"
혜정은 흠칫 놀랐지만 내색을 안 하고 " 네 그렇게 되었어요."
" 장사도 장사인데 올해는 인연을 만날 수가 있네요 아주 세게 들어왔어요."
" 아 그런가요 ㅎㅎ, 그럼 언제 즘?"
"뭐 얼마 기다리실 필요도 없고요 입춘 지나시면 장사도 그렇고 인연도 장사 따라서 붙어 오겠는데요."
"신령님이 붉은색이 인연이라고 하네요. 지금 하시는 장사가 본인하고 잘 맞아요 사주에 불도 많고 물도 많은데 혹시 술이나 커피 같은 거 파시져?"
더 흠칫 놀란 혜정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져 버렸다.
"네, 네 맞아요."
"결혼은 40 넘어서 만난 인연이 좋은데 올해 결혼운도 들어왔고 사업운도 좋네요"
"바람처럼 남자가 나타난다 하시니 갑자기 다가오는 사람이 인연이니 노치지 마시고요"
" 아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그럼 혹시 가게 이름도 바꿀까 하는데 혹시 작명 같은 것도 하시나요?"
" 아 당연하지요. 저한테 이름 지어간 사람들 애기들 다 잘되고 공부 잘하고 다 잘되었어요, 상호는 조금 비싸긴 한데 언니는 특별히 좀 생각해 드릴게요"
"네 그럼 바로 지어주시는 건가요?"
" 아니요 그냥 하는 게 아니예여 다 정성이지 신령님께 제도 올리고 기도를 드려야지 그냥 막 한다고 딱딱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 뭐든 치성을 드리셔야 해요"
" 오늘 성의 표시를 먼저 하고 가시면 제가 수일 내로 연락드릴게요."
" 아 네 그럼 얼마나 드려야 하지요?"
" 그걸 알아서 마음 가는 대로 성의껏 하시는 거죠 저는 얼마 달라 얼마다 말 안 해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다 정성이고 성의 거든요. 조상님께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있져? 아시잖아요?
" 아네 그렇지요. 그럼 십만 원 십오만 원 정도 드리면 될까요?"
" 제가 말씀 여러번 안 드릴게요 성의예여 성의! 저 대신 매일 기도하시고 직접 비실 수 없잖아요. 그런 거 좀 생각하시고요 솔직히 작명 같은 거 다른 데는 최하가 100만 원입니다. 그 정도 정성 없이 그냥 잘되려고 하면 그건 욕심이에요 신령님이 노하시거든요 차라리 안 하는 만 못한 거예요."
"진짜 친언니 같아서 그냥 제가 삼십만 받을게요"
" 안 하셔도 되고 억지로 권하지 않으니 편하신 대로 하세요"
" 아 아닙니다. 드려야지요"
"손 좀 줘보시겠어요?"
" 네 손은 왜?"
" 이거는 뭐 서비스라고 생각하세요 우리 대통령 님도 왕자 써서 되신 거 아시져? 혜정 씨 진짜 친언니 같고 정이 가서 그래여 여기다 딱 한자 적어드릴게요 "애"자예여 사랑 꼭 인연 오니까 잘 잡으세요"
" 이거 계속 놔두셔야 효험이 좋은데 적어도 하룻밤은 씻지 마세요"
"아 네 그래야져 감사합니다 이거도 서비스인 거죠?"
혜정은 생각지도 않았던 지출이 당황스럽지만 인생이 걸린 일인데 큰돈도 아니다 싶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좀 막혀도 대순가 싶다. 대운이 들어 대박이 난다 이런 걸 기대한 것도 사실이지만 나쁘지 않았다.
돈도 벌고 사랑도 찾는다는데 그 이상 바랄게 또 뭐가 있을까 싶었다.
코로나가 끝나고 나서도 신촌을 비스듬히 끼고 앉은 골목은 입구부터 서늘한 게 을씨년스러웠다. 그래도 비웠던 상가들이 하나둘씩 새 단장으로 곱게 치장을 시작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납품하는 차들과 물건들이 들고 내가고 부산스러워졌다.
신궁선녀님이 내려주신 상호는 홍홍살롱이었다
간판을 바꾸는 것부터 안에 인테리어도 붉은색이 포인트로 여기저기 최대한 넣을 만큼 집어넣었다.
고맙게도 골목라인의 끝줄에 인테리어 집이 있어 생각보다 싸게 잘한 듯했다
사장은 직원도 없는 듯 혼자 이리저리 수선거리더니 이틀도 안 걸려 일을 다 끝냈다.
사람은 좋아 보이는데 오 대화마다 끔찍했다
그 넘의 끙소리를 안내면 안되는지 입으로 내는지 코로 내는지 모를 킁 소리가 말할 때마다 속을 울렁거리게 했다.
어쨌든 앞으로 볼일이 없을 사람인지라 다행인 듯싶었다
메뉴판부터 명함까지 무엇하나 놓칠세라 꼼꼼히 살피고 재오픈한 게 일주일이 지났다.
오픈을 하자마자 제법 손님들이 몰렸다 혹시 몰라 돌싱 모임에서 만나 친해진 지연이 불러 도움을 청하길 천만다행이었다.
이제 경기가 좋아진 건지 오픈 빨 인지 며칠은 손님이 미어터져 대박의 조짐이 보였다.
물들어 온 김에 노 저으라는 주옥같은 명언을 되새기며 주말 장사가 기대되었다.
그래서인지 혜정은 재오픈 전 문을 열었다 닫았다 마음 내키는 대로 이년을 허비한 것이 억울해 벌충할 요량으로 주말에도 일찍이 문을 열고 가게에 나왔다
혼술인지 뭔지가 유행한다고 젊은 손님들이 발걸음이 잦아들어 예전만 못한 데다 돈들이 없었다 젊은이들은 젊은 대로 나이 꽤나 있던 중년들도 돈이 씨가 마르긴 마찬가지인지 영 탐탁지 않은 시절이다 게다가 물가는 왜 이리 오른 건지 주종인 위스키와 술값도 자잘한 안주거리라도 장만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택시비가 오른탓인지 손님도 일찍 끊기고 하다 하다 낮시간에 커피손님이라도 받자 하였던 것인데 의외로 낮술을 찾는 손님이 심심치 않아 다행이다 싶다.
오픈 즘에도 왔던 중년아재들인지 노총각 무리인지 점심도 얼마 안 지난 이른 시각부터 들어와 앉아있다.
멀쑥하게 입은 맥코트 속으로 자주색 니트를 입은 H에게 눈길이 간다.
시답잔은 남자들의 엉너리와 수다 속에서도 가끔씩 싱긋 웃는 고운 치아가 드러날 때마다 가슴이 쿵 내려앉는 기분을 느낀다.
지금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길이 없는 K를 꼭 닮은 미소였다.
어차피 이렇게 될 인생일 줄 알았더라면 그때 K를 붙잡았어야 했는데 나름 조숙하게 안전한 미래를 위해서라며 선을 본 전남편과 결혼한 것이 두고두고 후회스러웠다.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인데 돈은 그렇지 않았다. 없는 이는 정말 뭐가 찢어지게 없고 있는 이들은 주체를 못 하도록 남아도는 게 돈이란 생각을 했다.
그렇게 돈은 좋았다 심순애 소리를 들어도 다이아 반지가 있는 삶이 썩 나쁘진 않았다.
적어도 전 남편이 보기 드문 개자식이라는 걸 알기 전까지 말이다.
바람기가 있어도 참을만했다 두 집 살림을 하든 셋집살림을 하든 내가 누리는 것으로 참아보려 했지만 이혼을 요구하고 내게 손찌검을 하기 시작했다 생활비는 끊어지고...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었다.
암캐 같은 더러운 년에게 내 삶이 몽조리 무너졌다는 열패감과 수치감을 견디기 너무 어려웠다.
그런 일은 치유되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그런 기분을 씻어내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래도 시간이란 게 묘한 게 먹고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이 나는 그 늪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옛일이야 스스로 자책하며 내 눈이 개눈이지 그런 인간을 좋다고 본 걸 후회한들 뭔 소용이 있으랴 싶었다 내 눈이 사람눈으로 돌아온 걸로 위안을 삼을 뿐이다.
오늘이 생일이기도 한데 그냥 기분을 내고 싶었을까 혜정은 먹태를 버터에 발라 구워내고 접시에 땅콩과 마요네즈소스를 만들어 쟁반에 담았다.
H 앞으로 접시를 살포시 내려놓으며 미소를 띠운다
" 저번에도 오셨었지요. 말없이 조용히 오셨다 조용히 말없이 가셔서 기억이 남네요"
"이건 오늘 제 생일이기도 하고 또 오셔서 반갑기도 하고 서비스 좀 내왔어요"
혜정은 최대한 조신한 척 나름 만들어낸 고혹적인 포즈를 취해본다.
H는 아 네 하며 쑥스럽다는 듯 수줍어한다.
뭔가 이어질 듯 대화를 연이어하려는 찰나
건너편의 살집이 두둑한 K가 말을 잘라먹는다
" 아이 젠장 사장님은 정한이만 기억나시나 보네 우린 뭐 말 타고 왔다 말 타고 돌아갔나? 말이 없긴 제 그런 애 아니에요"
생긴 게 꼭 전남편같이 생긴 놈이 분위기를 깬다.
저런 인상은 대놓고 걸러야지 다짐을 하면서 대꾸를 한다
"아이 다 기억하지요 워낙 다 미남들이시라 까먹으래도 제가 아까워서 못 까먹지요 호호"
혜정은 어차피 여기 하나 딸랑 손님 있는 테이블에 비비고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