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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사랑을 갈구할까?

사랑에 대한 철학적 사회학적 접근

by 배즐

가끔씩 뼈에 사무칠 정도로 외로울 때가 있다. 특히 날씨가 선선해지는 가을날, 길거리에 연인들은 즐비하지만 그 사이를 나 홀로 스쳐 지나가는 순간, 외로움이 나를 감싼다. ‘나만 솔로구나’. 선선한 가을바람이 나의 옆구리를 파고들며, 황량히 떨어지는 단풍잎은 내 머리에 떨어지고 외로움은 배가 된다.

그때마다 나는 궁금했다. ‘나는 왜 외로움을 느끼는가?’, ‘나는 왜 연애를 하고 싶나?’, ‘감정이 없는 로봇이었으면 나는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더 효율적인 존재이지 않았을까?’, ‘사랑이란 무엇일까?’, ‘연애란 무엇일까?’ ‘20년 넘게 솔로로 살아온 경험도 있는데, 감정아 좀 가라앉아라’ 등 머릿속에 수많은 질문들을 담은 채, 나는 소개팅을 알아보곤 했다.

하지만 번번이 이런저런 이유로 인연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외로움-썸/연애-스쳐지나감’의 반복이 지속되었다. 이쯤 되니 그냥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로봇이 되고 싶었다. 사람은 왜 감정이 존재하는지에 회의적이게 되었다. 화가 나서 TED에 ‘Emotion’, ‘Love’를 키워드를 검색해보고 강연들을 들어봤으나 ‘사람이 왜 사랑을 하는지’보다는 모두 사랑 찬양 이야기였다. 한 강연에서는 어떤 작가의 말을 빌려 “People kill for love, they die for love”라는 말을 하며 사랑은 다양한 방면에서 인류 역사를 풍성하게 만드는 소재였다는 등 찬양 이야기가 넘쳐났다.

미디어로는 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판단과 함께 학교 도서실로 향했다. 로맨스, 사랑 관련 서적들을 뒤져보았다. 한 페미니스트 교수님께서 신문 칼럼에서 추천해주신 책도 읽어보고, 철학책도 뒤져보았다. 읽으면서 정말 많은 생각들이 들었다. 이번에 쓰는 글은 내가 그동안 보고, 듣고, 읽었던 사랑 관련 이야기들을 총망라하고자 한다.



플라톤의 [향연] 편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눈이 4개, 팔이 4개, 다리가 4개, 입이 2개였다고 한다. 정말 강력한 존재였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들이 신에게 대드니까 신은 인간을 둘로 갈라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처럼 눈이 두 개, 팔이 두 개, 귀가 두 개, 다리가 두 개인 인간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인간은 자신의 반쪽을 찾아야 하는 운명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어쩌다 자신의 반쪽을 찾게 되면, 초인적인 힘이 난다고 한다. 우리가 종종 말하는 [사랑의 힘]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배우자를 위한 희생, 자신도 모르게 나는 초인적인 힘. 모두 자기가 찾던 반쪽을 만나면 나타난다.

이 플라톤 [향연] 이야기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반쪽을 찾아 나서야 하는 운명을 부여받았다. 자신의 반쪽을 찾는 인생의 하나의 여정을 부여받은 것이다. 우리는 모두 반쪽을 찾아나가야 하는 여정이라는 인생의 과업을 부여받은 것이다. 사람들이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 여정은 필연적으로 모순성을 지니고 있다. 둘이 만나 서로가 반쪽이었음을 인식하고 하나가 되고자 한다면, 하나가 된 둘은 상대방을 인식할 수 없다. 그렇다고 다시 둘이 되고자 하면, 하나가 되고 싶어 한다. 이렇게 사랑은 모순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나 또한 서로 좋아서 연애를 할 때 항상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하는가?’, ‘이 사람은 나를 좋아하는가?’라는 질문을 종종 던졌다. ‘상대방이 00하게 웃는 표정, 00하게 쳐다보는 눈빛, 00라고 하는 말. 이 언어적-비언어적 표현이 상대방이 나를 좋아한다고 볼 수 있는 걸까?’, ‘내가 상대방을 보면서 안정감을 느끼는 감정, 종종 감동받으면 가슴에 퍼지는 약기운(?), 행복 호르몬 및 성호르몬의 작용. 이 감정과 호르몬의 작용이 내가 상대방을 좋아한다고 볼 수 있는 걸까?’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반쪽과 반쪽이 만나 하나가 되었을 때 ‘과연 우리는 하나인가’라는 혼란의 생각을 가지며 인식적으로 나뉘어보고 싶었던 것 같았고, 실체적으로 나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싸우게 되는 순간이 바로 반쪽과의 결합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싸우고 나서 내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순간’이 바로 내가 반쪽으로서 반쪽의 상대방을 인식하고 상대방을 좋아함을 확신함과 동시에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하는가?’라는 질문을 종식시키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싸움을 봉합하는 과정은, 반쪽과 반쪽이 서로 안 맞는 부분이 있음을 존재함을 인식하는 순간이었고, 그 부분은 서로 인식하고 하나가 되지 못한 채 인식된 상태로 남아있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경우 그 부분의 금이 커지게 되면, 둘은 하나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둘이 되기로 결정했던 것 같다.


또한 에바 일루즈의 <사랑은 왜 아픈가>에 따르면, 현대사회에서 개인은 자유를 부여받았고, 존재의 확실성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사랑은 자존감을 높여주는 관계가 되었다고 한다. 이 점이 사랑은 왜 아픈 것인지 설명을 해준다고 한다. 자세히 알아보면,

2021년, 21세기가 되기 오래전에 한국은 유교 사회였고, 서구는 기독교 사회였다. 개인과 개인 위에 개인들을 묶어주는 하나의 맹목적인 가치관이 존재했다. 사회마다 다르지만, 보통 유교,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등 종교 및 도덕 가치관들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 이 가치관들 속에서 연애, 사랑의 개념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그려졌다. 유교 사회였던 한국은 부모가 정해준 배필을 만나 지고지순하게 정절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사랑의 한 단면이었고, 로맨스적 사랑의 개념은 현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언어적-사회적인 측면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 시대엔 로맨스를 떠나 함께 산다는 것 자체가 사랑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기독교 사회에서도 각 개인이 행동해야 할 행동규범이 존재했고, 결혼 규범, 연애 규범이 존재했다. (물론 유교든 기독교든 이 규범들에 벗어나 romance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처벌받기도 했다. 그래도 낭만이라는 개념은 사회 가치관과 먼 이야기였다.)

하지만 21세기는 유교든 기독교든 기존의 가치관으로부터 해방된 현대사회이다. 가치관으로부터의 해방은 곧 개인에게 자유가 부여됨을 의미했다. 동시에 의지할 가치관의 부재도 의미했다. 현대사회는 이전보다 장남의 의무, 며느리의 의무 등 의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의무로부터 해방되었다. 사랑은 로맨스적 사랑이 되었고, 연애 및 결혼은 개인의 선택이 되었다. 연애 관계 및 결혼 생활의 지속 및 끊음 또한 개인의 선택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 가치관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에게 채워지던 족쇄를 끊어낸 것이지만, 해방된 개인은 모든 관계를 자아를 중심으로 손쉽게 맺고 손쉽게 끊을 수 있게 되었다. 그 가운데 개인이 불안정해진다면, 개인이 의지할 가치관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개인의 맺고 끊음이 선택이 된 현대사회. 이 가운데 사랑과 연애는 상대로부터 인정을 받고 개인의 자존감을 높이는 관계로 변형되었다. 이상향으로 그려지는 행동규범이 제거된 사회, 자신의 인적 가치를 끊임없이 인정받고 자존감을 높여야 하는 현대사회에서 로맨스적 사랑이라는 무비판적인 사랑 주기-받기는 자신이 자기 자신을 오롯이 인정받는 하나의 관계가 되었다. 상대방에게 무조건적으로, 무비판적으로 사랑받고 싶은 것이 연애하고자 하는 하나의 마음이 되기도 한다.

정리하면,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에바 일루즈는 <사랑은 왜 아픈가>를 통해 “현대사회에서 개인은 보수적인 가치관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를 부여받아 관계에 있어 맺고 끊음이 쉬워졌다. 또한 사랑은 자신이 사랑받고, 인정받고, 자존감을 높이는 관계가 되었고, 따라서 존재의 확실성을 잃어버린 시대에 사랑은 아프다“라고 이해했다. (이해한 바가 틀릴 수도 있다.)


앞서 이야기했던 이야기들을 정리하자면, 플라톤의 [향연] 이야기는 인간이 자신의 배우자를 찾는 여정을 선고받았음을 보여준다. 에바 일루즈의 <사랑은 왜 아픈가>는 현대사회에서 사랑은 자존감을 높이는 관계이지만, 개인이 관계에 있어 맺고 끊음이 쉬운 세상이 도래했음을 보여준다.

연애-사랑 이야기를 자주 하는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친구는 “됐고, 인간은 호르몬의 노예야. 사랑은 마약 같은 것 같아. 한번 맛보면 끊을 수 없어”라고 말해주었다. 인간은 호르몬의 노예. 돌직구였다. 기존 가치관으로부터 해방된 현대사회에서 개인은 자신의 호르몬에 따라 삶을 만끽할 자유가 주어졌다. 내 몸을 결정할 권한은 더 이상 가치관에 존재하지 않고 나에게 존재한다. 이전에 연애해보며 맛봤던 호르몬을 계속 느끼고 싶어 관계를 갈구하게 된다. 이 사람을 만나고 후일에 헤어지고 호르몬이 그리워 저 사람을 만나보고 후일에 또 안 맞는 부분을 알게 되어 헤어진다. 걸리지 않는 선에서 양다리를 걸쳐보기도 한다. 결혼을 하신 사람들 중 일부는 배우자에 실증이 나 몰래 클럽을 가기도 한다.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믿음으로 간다고 한다.




나 또한 ‘반쪽을 찾아 사랑하고 싶구나’, ‘사랑받으며 인정받고 자존감 높이고 싶구나’ '호르몬을 느끼고 싶구나' 등 생각들이 들며 외로움의 원인들을 찾아내었다.

하지만 맺고 끊음이 너무나 쉬워져 버린 시대가 된 것 같다. 자신과 좀 맞지 않다 싶으면 잠수 이별, 카톡 이별, 전화 이별로 바로 끊어버리기도 한다. 개인이 의무로부터는 해방되었으나 매정해지고 상처 받기 쉬워져 버린 시대.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절에 가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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