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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시험을 그만둔 이유

대신 짱돌을 들기로 마음먹었다

by 배즐

2020년 4월, 나는 코로나 사태로 인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교환학생을 비자발적으로 마치고 조기귀국하여 한국으로 돌아왔다. 시설격리 2주를 보내고 진로에 대해 깊은 생각에 빠졌다. 4학년 1학기를 교환학생으로 마쳤으므로 이제는 정말 인생의 방향을 정해야 했다. 계속 고민해왔던 대학원을 가고 싶긴 하지만, 정치학, 경제학, 철학 모두 재밌었기에 어느 하나 선택할 수 없었다. 또 모든 것이 재밌다는 말은 곧 모든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기도 했다. 또한 어느 한 분야를 선택해서 깊게 판다고 해도, 내가 잘할 자신이 없었다. 전공 공부를 너무나도 좋아하지만 문헌들을 읽을 때면 항상 양이 많아서 언제까지 읽어야 하는지 스트레스받았다. 스트레스받았던 나 자신을 떠올리며 '문헌 읽는 데 스트레스받는다는 것은 내가 대학원이 맞지 않는다는 말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또한 n 년 동안 부모님께 손을 더 벌려야 하기도 하고, 인문사회 분야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석박사를 거친 후에 직장을 잡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엄마와 아빠에게 공무원 국가직 7급 시험을 보겠다고 선언했다. 엄마는 9급을 보는 건 어떻냐 했지만, 나는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7급 공무원이 되고 싶었다. 5급만큼 많이 공부하고 싶지는 않았다.


때마침 2021년 국가직 7급 시험은 PSAT과 행정학+행정법+헌법+경제학으로 개편되었다. PSAT은 노력보다는 머리가 중요한 시험이고, 행정학, 행정법, 헌법, 경제학은 내가 좋아하는 사회과학 분야였다. 정보를 찾아보니 수험생들은 경제학을 정말 어려워하고 실제로 당락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했다. 복수전공으로 경제학을 하고 있고 미시경제학, 거시경제학 모두 막힘없이 재밌게 공부하고 A를 받았던 나로서는 좋은 선택으로 보였다.


그렇게 2020년 7월부터 ㄱㄷㄱ 사이트에서 공무원 프리패스 인강을 구매하고, 헌법, 경제학부터 쭉 보기 시작했다. 수험 공부지만 너무 재밌었다. 1타 강사라고 일컬어지는 변호사 출신 강사님, 박사 학위 출신 강사님 등 돈 잘 버는 강사님들은 돈 값을 했다. 미시경제학 거시경제학은 다 배운 내용이지만 무척 논리정연하게 다시 배우고 정리했고, 헌법-행정법의 경우 변호사 강사님의 옛 썰들과 함께 국가와 사인(私人) 간의 관계, 공공기관 간의 관계, 헌법기구들 등을 정말 재미있게 공부했다.




하지만 항상 가슴 한 켠 속에 '내가 이 길이 맞나?'라는 고민이 아른거렸다. 그런 고민이 떠오를 때마다, < 부모님 정년 + 미래가 불투명한 학자의 길 + 안정적인 공무원 직업 + 행정 업무도 창의적인 일을 할 수 있고, 국가의 녹봉을 먹으며 편하게 살자는 마음 > 을 되새기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마음 한 켠 속에 용솟음치는 호기심과 학문에 대한 열정과, 이를 가라앉히려는 나의 의식적인 사고과정은 정신적-육체적으로 무기력과 우울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특히 뉴스에서 성소수자 운동권 소식이 들려오는 날에는 하루 종일 멍해 있기도 했다. 2020년에 건강보험공단에서 성소수자 연인 분들께서 사실혼으로 인정받았다가 건강보험공단이 취소한 사실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뉴스 속 사진에 성소수자 활동가 분의 눈빛은 나에게 '너는 너가 가야 할 길을 가고 있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7월에 공무원 시험을 시작하고 8월, 9월 시간이 흐를수록 무기력은 더해가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주말마다 종종 밤새 술 먹는 날도 있었다. 9월이 지나고 10월이 지나자 일상 속에서 사람들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도서실에서도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10월에 어느 날은 무기력에 침대를 일어나지 못하기도 했다.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아 산책을 했지만, 걸음걸이는 무기력한 기운에 무거웠다.


그러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듣게 되었다. 대학원 진로를 고민하는 여성 분 이야기, 자녀에 대해 고민하는 아버님 이야기 등 법륜스님은 사람들의 인생을 조언해주고 있었다. 세상만사 이야기가 다 나왔다.


법륜스님은 유튜브 영상들을 통해 - 20살 넘은 성인이라면 독립해야 하고, 자기 자신을 옭아매는 욕심이 자기 자신의 스트레스를 만들고 있으며, 독립적인 '나'란 존재하지 않고 우리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나는 한 포기의 풀이다', '나는 한 마리의 다람쥐이다'라고 생각하며 남이 뭐라 하든 듣고 흘려버리며 자존감을 지키라는 이야기들 - 을 하고 있었다.


듣고 생각해보니 나도 나 자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국가직 7급이 인생의 전부인 것 마냥 생각하고 있었다. 26살 나 자신은 영어학원 알바로도 돈을 벌 수 있었고, 어느 규모의 기업이든 취직하여 돈을 벌 수 있는 지위였다. 그리고 돈을 모아 대학원도 갈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부모님 정년은 핑계였다. 나는 만일 대학원을 선택하게 된다면, 내 선택에 책임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11월 중, 이렇게 무기력에 시간낭비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퍼뜩 일어났다. 나에게 계속 무기력함을 자아냈던 성소수자 이슈를 공부하기 위해 퀴어논문을 쓰신 교수님께 이메일로 연락드렸고, 줌으로 화상회의를 하게 되었다. 이야기를 나누니 교수님께선 긍정적으로 보아주셨다. 러시아를 다녀왔다고 하니 '밖에 도전해 본 경험이 있네요?'라고 긍정적으로 말씀하셨고, 교수님께 그동안 궁금했던 점 - '일본은 개항 짬이 남다르던데, 일본 퀴어 연구도 있나요?', '언어는 사고를 형성하고, 역사는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하는데, 한국 역사 속 퀴어를 연구한 것도 있나요?' - 등 평소 가지고 있던 궁금점들을 쏟아냈다.


교수님께서는 다양한 말씀을 해주셨다. "퀴어 연구도 적다.", "통계학 공부하고 오세요.", "한국의 퀴어이론을 발전시키는 세계적인 학자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오세요."라고 말씀하셨다. 마지막 발언은 다소 무서웠다. 우울증 문턱까지 왔던 사람으로서.. "자신은 없지만 노력해보겠다"라고 했다. 여기서 끝날 줄 알았는데 "00님은 성실하신가요?", "영어는 잘하시나요?" 등 면접질문을 하셨다. 기겁했다. 당황스러워서 뜸 들이다가... 영어는 매일 블룸버그 이메일링 받아보고 있다고 했고, 성실성은... 19년에 18학점+교내활동+대외활동+주말야간알바 하다가 열이 40도까지 올라가서 응급실 간 사실을 이야기했다. 교수님은 놀라셨다.


그렇게 교수님과 1시간 30분 정도 대화를 나누었다. 교수님께서는 학생과 이렇게 오래 대화를 나눈 적은 처음이라 하셨다. 대학원생들도 질문이 별로 없다고 하셨다. 내가 그냥 눈치없이 너무 여쭤본 것 같기도 했다. 교수님께서는 박사과정에 있는 어떤 박사님의 연락처를 주시며 이 분과 만나보라고 하셨다. (나중에 만나보니 박사님 曰, 교수님께서 너무 바쁘셔서 평소에 3~4시간밖에 못 주무신다고 한다. 그런 분의 시간을 내가 뺏었다;;)




그렇게 4개월 간의 공무원 시험은 마무리되었다. 짧은 시간이었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에겐 고통스러운 긴 시간이었다. 이번 시험준비를 통해 확실히 깨달았다. 나는 대학원을 가지 않으면 인생에 땅을 치고 후회한다는 사실과, 나는 성소수자 이슈를 말하는 사람을 하고 싶다는 것, 최저시급 받으며 단칸방에 살아도 좋으니 사회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았다.


12월에는 읽고 싶었으나 미루어두었던 책들을 매일 읽었고, 1월엔 겨울방학 시민단체 활동하였다. 2월엔 사회조사분석사 필기를 땄고 컴활 1급 필기를 땄다. 3월에는 너무나 듣고 싶었던 학교 수업들을 담았다. 그래서 이번 학기 21학점 + 청강 3학점, 총 24학점을 듣고 있다. 계량경제, 정치경제, 거시경제, 동양철학, 다문화사회 등 각 분야의 전문가 분들의 수업을 듣고, 매일매일 도서실에 가서 복습하며 지적 흥미를 느끼고 있다. 사회학 시간에는 마음속에 있던 질문을 풀어나가 구체화시켜 '유교적 가족관과 성소수자 수용도'를 발표를 하니 교수님까지 감동 드셔서 놀랐다.


아직까지도 나는 이 분야의 확신이 없긴 하다. 일단 대학원을 가봐야 알 것 같다. 석사가 돌 맞아 죽어서 석사라던데 나의 호기심을 풀다가 교수님께 돌 맞아 죽는다면 그조차 행복할 것 같다. 그래도 올해 배우는 과정을 거쳐보니, 나는 '호기심>>>배우는 과정의 힘듦'을 깨달았다. 독립을 빨리 하지 못해 엄마 아빠에게 미안하지만, 정년퇴직 전까지 독립하려고 노력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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