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사회학을 공부하다 보면 종종 내 27년 인생 전반을 고찰해보게 된다. 철학은 애초에 '지혜에 대한 사랑', 사회학은 '개인을 둘러싼 사회 구조'를 탐구하는 편이기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내 인생 전반을 고찰해보고는 한다.
최근에 또 문헌들을 읽다가 나는 10대 때 '나', '자아'를 지우고 살았던 것이 아닌가, 대학교 와서 '자아'를 찾게 된 것이 아닐까 문득 생각들었다.
이 생각은 2015년 경험을 추억하며 떠올랐다. 당시 나는 대학교에 입학하고 새내기가 되었고, 꿈꾸던 성소수자 동아리에 가입하여 다양한 성정체성을 가진 친구들을 만나고 친해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다같이 밤새 술먹기도 하고, 같이 스터디를 하기도 하고, 같이 레즈 클럽에 놀러가기도(LGBTQ+ 행사 때 나도 레즈 클럽을 가보았다) 하는 등 정말 2015년 알차게 보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성소수자 친구들과 놀면서, 내가 친구들에게 다른 점들을 느낄 때가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성소수자 혐오발언을 들었을 때이다. 2015년 당시는 박근혜 정권 시절이었고, 보수정당 정치인들이 가끔씩 이상한 발언들을 했었다. 프레시안이 2015년 6월에 보도한 기사를 일부 발췌해보면, < (새누리당) 노철래 의원은 이날 인사 청문 과정에서 지난 6월 28일 서울 광장에서 열린 퀴어 축제에 대해 "서울 심장부가 대한민국의 심장부인데, 여기서 반나체로 거리를 활보하고 속옷을 입고 성행위를 묘사하는 선정적인 축제가 대규모로 이뤄졌다"며 "대한민국 법이 어디까지 이렇게 (됐느냐)"고 말했다. > 라는 내용도 찾을 수 있다.
당시 나는 이런 발언에 전혀 상처받지 않았다. 화가 나지도 않았다. 오히려 '원래 다들 이렇게 생각하잖아 뭐.'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이런 생각이 표준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내 주변 성소수자 친구들은 대부분 상처를 입고, 분노했다. 나는 친구들이 다르게 느껴졌다. '사회 구성원 대부분 저렇게 생각하고 퀴어를 이상하게 생각하는게 표준인데, 왜 상처를 입는 것이지? 왜 분노하는 것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적으로 성소수자를 존재지움 하는 현상, TV에 나오는 공인들이 성소수자를 선정적인 존재로 묘사하는 발언 등 성소수자 혐오를 볼 때면 나는 상처받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들의 반응이 너무 생소했다. '왜 친구들은 상처를 받고 나는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뇌 속에 맴돌았었다.
이런 생각은 군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훈련소나 자대에 배치받았던 동료들은 대부분 무기력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오고싶지 않았던 군대', '강제로 끌려왔다는 마음'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군대에서 병사회의를 하거나 보다 보면 '오고 싶지 않지만 오게 된 군대이니까, 필수적인 것은 하되 모두 최대한 편하게 있다 가자'라는 반응들을 마주치고는 했다.
반면 나는 군대에서도 동료들이 이런 마음을 가진 것이 의아했다. 나는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휴전국가에 처한 국가의 국민이라면, 당연히 와서 국방의 의무를 실천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왜 다들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이지?'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 동료들과 나의 차이가 무엇일까? 애국심의 차이인 것일까?'라는 생각이 뇌 속에 맴돌았었다.
'자아' 관련 철학-사회학 책들을 읽다가 문득 옛날에 생각했던 이 두 생각, '왜 친구들은 상처를 받고 나는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일까?', '이 동료들과 나의 차이가 무엇일까? 애국심의 차이인 것일까?'가 떠올랐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이래저래 고민을 하다가 문득, 나는 10대 때 '나', '자아'를 지우며 살아왔음을 깨달았다. 10대 때 '나'는 누구인지,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심도있게 고찰해본적이 단 한번도 없었음을 깨달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10대 때 '나'라는 존재는 항상 '공부'라는 존재 앞에서 유보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피아노가 배우고 싶다고 말하자 가족 구성원 중 한명은 나에게 성질을 내며 "공부해야 하는 애가 무슨 피아노야!!"라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취미유보 장려).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 지리 선생님이 "로마사 이야기 책 재밌으니까 꼭 읽어보세요. 근데 여러분들은 지금 공부하느라 바쁘겠죠? 홓홓 대학가서 한번 읽어보세요 홓홓"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떠올랐다(독서유보 장려). 중학생 때 종합학원을 다녔는데, 양이 너무 많아서 학원 선생님과 1:1 상담을 했다. 당시 선생님은 "쉬는 시간을 쪼개어 써보는 것은 어때? 10분 중 5분은 수업시간 배운 내용 복습, 5분은 다음 수업시간 내용 예습. 시간을 쪼개어 써보면 학교 수업도, 학원 수업도 모두 따라갈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씀해주셨다(공부라는 존재 앞에 쉬는 시간도 휴식도 유보되게끔 제안받은 것이다). 또한 나는 시골 중학교를 다녔는데, 중학교 선생님들은 나를 모범생이라고 다른 학생들과 비교하며 나처럼 공부 좀 하라고 입이 닳도록 칭찬해주셨다(계속 공부하는 존재로 상정). 또, 고등학생 때는 선생님들이 '4시간 자면 붙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라는 유명한 말을 언급하며 '공부'라는 존재 앞에 '수면'을 유보하고, 졸리면 허벅지를 찌르든지 세수를 하든지 '자학'하라는 방법을 강권했다(신체의 고통마저 유보).
문제는 내가 이런 '공부' 프레임에 꽤나 잘 맞았던 모범생이었던 것이다. 중학생 때는 1~3학년 때 한번 빼고 모두 전교 1등 이었고, 고등학생 때도 특목고에 진학해서 전교 20등 안에 들었었다. 이렇다보니 가족들 또한 나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었고, 10대 때 모든 일들은 '공부'라는 존재 앞에서 유보되었다. 심지어 내가 독서실 가서 숙제해야하는 것이 있으면 가족행사도 유보되거나 취소되었다. 학업성취도가 높은 아들을 보며 엄마와 아빠도 '공부'라는 존재 앞에 많은 것을 희생하고, 유보해주었다.
또다른 문제로, 이성이 부담스러운 이성애자들이 있는 것처럼 나또한 동성이 부담스러운 동성애자로서, 남성성이 넘치는 남자 사람은 부담스러워서 학교에서 원활한 교우관계를 맺지 못했고, 학교에 적응을 하지 못했다. 감정과 성욕을 느끼는 남성들에게 내가 다가가거나 그들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은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항상 애들과 어울리지 않았고, 교과서에서 항상 청소년기 내용에 강조되던 '또래 집단과의 집단 정체성 형성'이라는 표현은 나와는 거리가 정말 먼 표현이었다.
이렇게 '공부'라는 존재 앞에서 모든 것을 유보하는 일, 주변 친구들과 교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 '자아'를 탐색하는 일은 항상 유보되었다. 교과서나 문제집이 아닌 다른 문학 책을 보는 일은 죄책감을 들게 하는 일이었고, 주말에 집에서 쉬는 것은 죄를 짓는 기분이 드는 일이었다. 시간이 날 때면 항상 도서실에 가서 앉아서 책을 보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내가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었으면 어땠을까? 나는 내가 잘하는 부분을 찾으려 노력했을 것이다. '나'를 탐구하며 내가 소질이 있는 부분을 탐구하려 했을 것이다.
내가 교우관계가 좋았던 사람이었으면 어땠을까? 나는 친구들과 경험을 나누며 '공부로 모든 것을 유보하는' 잘못된 믿음을 유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찌되었든, 나의 뇌는 10대 때의 성공 수단, 사회적 지위와 너무 잘 맞았다. 그 결과 항상 나는 사회적 성공을 추구하는 일을 하려고 했고, 내가 밑으로 내려가는 일은 단한번도 상상해본적이 없었다. 사회적 성공을 추구하다보니 사회가 권하는 가치 - '공부', '노력', '국가에의 희생', '결혼' - 들을 철저히 내면화했다. 그리고, 성적이 낮은 친구들을 무시했다. 비웃었다.
이렇게 성공만 추구하던 '괴물(?)'이었기에 한번은 내가 성소수자인 것이 너무나 싫었다. '왜 하필 소수로 존재하는가. 나는 성공할 수 없는 본연적 걸림돌을 지니고 있는 것인가?' 한탄했다. 성소수자 혐오 발언하는 공직자들을 볼 때도, 오히려 그들처럼 발언할 수 있어야하고 기득권에 녹아들어 사회적 지위를 얻으며 성공해야한다는 생각을 모름지기 하고 있었다.
이렇게 20대가 되었다. 대학생이 되고 '맹목적인 학교공부'라는 정언명령과도 같은 부름에서 해방되었다. 교과서 공부 중 가장 흥미로웠던 법과 정치를 공부하고 싶어 정치학(국제관계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대학교에 와서 정치학, 경제학 수업들을 듣고, 철학, 역사학, 사회학 문헌들 읽기 시작했다.
지난 7년간 공부를 하며 나는 개인, 사회, 국가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달았다. 흔히들 말하는 '동굴에서 쇠사슬을 끊고 나와 동굴 밖을 바라보는' 경험들을 여러번 하게 되었다. 나의 신념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남을 비웃는게 잘못되었다는 것이 깨달았다(그전엔 몰랐다. 비웃는게 당연한 것인줄 알았다). 내가 동성을 좋아하는 성소수자라는 사실이 숨길 것도 아닌 것이고, 틀린 것도 아님을 깨달았다.
나는 사회의 가치관을 너무나 내면화한 나머지 '나'가 없었다. '나'는 곧 '사회'였다. 반면 '성소수자'의 자아를 형성했던 친구들은 '나'가 있었다.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맥락에 친구들은 상처받고, 나는 상처받지 않았다. 또한 군대에 있던 동료들은, 국가의 강제성에 의해 자유와 시간을 침해받고 싶지 않던 '나'가 있었다. 군대의 강제성이라는 일종의 폭력 속에 동료들은 힘들어했고, 반대로 나는 힘듦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렇다. 나는 10대 때 '나', '자아'를 지웠다. 20대가 되어서야 '나', '자아'를 찾기 시작했다. 10대 때는 내가 좋아하는 취미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20대가 되어 대학생이 되고 나서야 인문학, 사회과학 공부를 좋아한다는 점, 피아노를 좋아한다는 점, 맑은 구름과 선선한 바람이 부는 날 산책할 때 행복감을 느낀다는 점, 따스한 햇살이 비추는 날에 따릉이를 탈 때 행복감을 느낀다는 점, 성격이 FM이어서 불의에 저항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점 등을 깨닫기 시작했다.
타인들에 비해 나는 아직 자아를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아직도 성소수자 혐오발언을 들으면 상처받지 않는다. 대신에 '이것은 잘못되었다' 정도는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분노도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를 찾게 되면서 감수성을 서서히 갖게 된 것 같았다.
나는 정말 '나'를 '사회'로 오롯이 정체화 한 아주 예외적인 사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모습들 - 성공으로의 레이스 질주, 상대적 박탈감의 심화, 남을 비웃고 무시하는 모습들, 개인을 무시하는 모습들, 학벌이 지위적 재화가 되어버린 사회 - 등을 보면 다들 어느 정도 '나'를 지워가며 살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나는 '나'를 어느 정도 찾고 나에 붙어있는 '사회'를 어느 정도 떼어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어느 정도 건강하게 설 수 있게끔 만들어주신 교수님들, 친구들이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다. 이 글을 쓰는 내내 교육제도에 대해 고찰해보게 되는데, 나같이 '나'를 지우고 '나'를 '사회'에 맞추어버리는 것에 대해 좀 더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를 개선하는 데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