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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우리 집의 대를 이어야 해"

내가 커밍아웃하고 들었던 말

by 배즐

대략 13년 전, 내가 중학교 1학년 14살이었을 때이다. 당시 나보다 4살 더 많은 누나는 남자 친구와 헤어져서 울고 있었다. 누나의 모습이 안쓰러워서 이런저런 이야기 하다가, 나는 "누나, 나는 여자를 좋아하지 않아. 남자를 좋아해"라고 커밍아웃을 했다.


누나는 갑자기 눈이 커졌다. 울음을 그쳤다. 갑자기 노트북을 켰다. 네이버에 "내 동생이 게이~~"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내가 "누나 뭐해?"라고 묻자 누나는 "안돼 너는 우리 집의 대를 이어야 해"라고 말했다.


14살이고 게이로 정체화했던 나로서 적잖아 당황했다. '뭐지? 내가 남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 집의 대를 이어야 해...?'




14살의 경험이 지난 지 어느덧 13년이 흘렀다. 당시 소심했던 게이 중학생은 여전히 소심한 27살 게이 대학생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 나는 많이 변했다. 연애도 해보았고, 27살의 어엿이 성숙한 성인이 되었다. 국가는 나에게 투하라고 선거공보물도 주고 있고, 몇 년 전에는 국방부에서 나를 병역법에 의거해서 징집했고 그 결과 나는 예비역이 되었다.


나는 이렇게 많이 변했지만, 한국 사회가 성소수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그대로 같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 전에 한국갤럽에서 보도한 자료에 따르면, 동성결혼 찬성 응답률은 38%였다. 2014년 35%, 2017년 34%, 2019년 35% 임을 고려볼 때 해를 거듭할수록 나만 변하고 여론은 유의미하게 변화하는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문제일까? 한국 사회 내 어떤 가치관이 성소수자 수용도를 지지부진하게 만드는 것일까?


이 답을 찾고자 이번 학기에 한국 사회를 더 이해할 수 있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수업들을 수강하게 되었다. 철학과 수업 중 주자학과 한국철학 수업을 듣게 되었다. 철학과 수업들과 함께 고려 말, 조선시대 역사 문헌들을 찾아 읽어보았다. 그 결과, 다른 글에 썼듯이 조선시대에 철저하게 받아들였던 음양론 및 혈족 중심 가족관이 성소수자 배제적 가치관이고 이 가치관의 유산이 아직까지도 한국 사회에 짙게 남아있음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철학 문헌들과 역사학 문헌들을 읽다가, 문득 위에 작성한 누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누나는 당시 18살 고등학생이었다. 한국의 정규 교육과정에 몸담고 있었던 고등학생이었다. 그런데 누나가 도대체 학교에서 어떤 교육을 받고 부모님과 미디어로부터 어떤 내용을 학습-사회화했기에 18살이라는 미성년자의 지위에서 누나가 "너는 우리 집의 대를 이어야 해"라는 말이 반자동적으로 나오게 만들었던 것일까? 한국 사회에 남아있는 짙은 유교 가치관이 많은 이유 중 하나였음을 이번 학기 조사들을 통해 추론할 수 있었다.




지금은 2021년 한국이다. 누나와 이야기했던 13년 전과는 많이 달라진 세상이다. 결혼이 필수라는 가치관도 많이 사라졌고, 비혼주의도 많아졌다. 연예인 사유리 님은 정자은행에서 아이를 얻어 출산하여 기르고 있다. 어쩌면 누나는 더 이상 "너는 우리 집의 대를 이어야 해"라는 말을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2021년 현대 한국 사회는 성소수자에 열린 사회인 것일까? 아웃팅(성소수자임을 누군가 폭로하는 것)이 무서워서 말을 하지 않는 사람도 많고, 편견에 두려움이 많아서 커밍아웃하지 않고 입을 닫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특히나 얼마 전에 트랜스젠더였던 변희수 하사님, 김기홍 녹색당 활동가님께서 돌아가신 안타까운 사연조차 들려온다.


모르겠다. 무섭다. 성소수자도 평범한 사람인데 평범한 사람임을 인정받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더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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