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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 신청을 받았다

by 배즐

지인과 놀고 있을 때였다. 놀고 다음 약속이 있어서 자리를 뜨는 찰나였다. 지인은 나에게 갑자기 "나중에 같이 데이트 하실래요?"라고 물어보았다.


순간 눈이 커지고 당황했다. 상대는 여성이었다. 지인은 놀러가자는 것을 장난스럽게 "나랑 데이트나 하실래요~~~/?" 하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좀 당황했다.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냥 놀러가자는 의미로 해석했다. 그래서 시험기간 이후에 놀러가자는 말을 하며 자리를 마무리하고 다음 약속으로 향했다.


다음 약속에서도 놀란 가슴은 다소 진정되지 않았다. 또다른 지인과 밥을 먹으며 평소처럼 재밌게 대화를 나누었으나, 놀란 가슴의 여운은 남아있었다. 밥 약속을 마치고 나서야 그나마 좀 진정되고, 나는 도서실에 가서 공부를 했다.


공부를 하던 중, 그녀에게 카톡이 왔다.

"놀러 가지 말고 데이트해요."


정말... 직진에 당황했다. 이 지인이 예전부터 만날 때 나를 종종 귀엽게 느껴하긴 했는데, 그렇다고 나 혹은 상대가 호감을 표현해본 적은 없었다. 또한 이 지인은 좋은 사람이고, 나와 성향이 비슷해서 좀 더 가까운 사이가 되기 위해 오래 전부터 커밍아웃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타이밍을 잡지 못해 항상 커밍아웃을 하지 못하고 있던 지인이었다.


내가 지금 처한 이 상황이 너무 힘겹게 느껴졌다. 사람들 대부분 서로 이성애자라고 간주하는 세상부터 시작해서, 나 또한 데이트 신청하는 사람의 용기와 마음의 무게가 어떨지 짐작이 가는 것도 그렇고, 지금 나에게 호감이 있어서 데이트 하자는 친구를 내가 어떻게 말해야 덜 힘들고, 덜 충격적이고, 덜 민망할지 고민했다. 몇 십분 고민한 다음, 더 이상 질질끌지 말고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동성을 좋아하는 성소수자이며, 나에게 이성과의 데이트는 그냥 놀러가는 의미라는 것을. 그렇게 몇 번 대화를 더 나누었다.


다행히 이후 지인과 바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고 지인과 관계가 틀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사귀자는 것도 아니고 데이트 하자는 신청이었기에 다행히 그렇게 관계에 큰 타격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나는 기운이 다 빠졌다. 너무 힘들었다. 나 또한 누군가가 데이트 신청하는 용기와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고, 이를 거부당했을 때 힘든 마음이 어떤지 알기 때문일까. 몇 시간의 그 과정이 정말 너무 힘들었다. 이전에 만났을 때 빨리 커밍아웃 할 걸 후회하기도 했다.



또, 옛날 10대 시절도 생각났다. 나는 10대 중고등학생 때 항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주변인이라는 느낌을 받곤 했다. 이성애자들 중에 이성이 부담스러워서 다가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나 또한 동성이 부담스러워서 다가가지 못하는 스타일이었다. 나는 또래 남정네들이 부담스러워서 친해지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여자 애들과 친구가 되고 싶어 다가가면, "쟤 관심있나봐", "쟤 들이댄다" 등 구설수에 항상 오르내렸다. 하도 구설수에 올라 나는 상처를 받았고 그냥 사람들에게 거리를 두었다. 그렇게 나는 남자와도 여자와도 깊은 관계를 가지지 못한 채 10대 시절을 보냈다.


대학 입학 후에는 구설수에 오를 일도 없고, 구설수에 오르더라도 내 귀에 들어올 일은 없었다. 나는 자유를 맛보며 기뻤다. 좋고 편한 친구들 및 지인들을 사귀었고, 좋은 사람들이다 싶으면 커밍아웃하고 나는 나 자신으로 오롯이 살아오고 있었다.


그 가운데 오랜만에 나는 이렇게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이성애자로 간주되는 경험을 했다. 결과적으로는 관계를 잘 유지하게 되었지만, 에너지 소모가 너무 컸다. 멘탈이 탈탈 털렸다.


누군가가 나에게 데이트를 신청한다는 일은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부족하고 별거없는 나에게 데이트 신청이라니 너무나 감사하다. 하지만 나는 남자에게 데이트 신청 받고 싶다. 남자에게 호감받고 싶다. 남자와 데이트하고 싶다...


이성애 중심주의 사회 속 험난한 하루였다. 이성애 중심주의 사회 속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는 지인이 속으로 '사실 나 싫어서 게이라고 핑계대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것인데, 부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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