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너무 고상하게 컸어"
백수가 된 뒤로 이런저런 알바를 하고 있다.
종종 창고로 가서 물류알바도 하고 있다.
상하차는 너무 무서워서 하지 못하고 대신에 짐을 옮기거나 포장하는 등의 물류알바를 하고 있다.
물류 창고에 간 것 자체가 내 인생에 처음이었다.
어느 날은 안전화 사이즈가 잘 맞지 않았다.
며칠 뒤에 보니 양발 엄지발가락에 피멍이 들었다.
안전화 사이즈가 맞지 않은데 하도 걸어다녔기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샤워를 하다가 연푸른색이었던 멍이 보라색이 된 것을 확인했다.
유심히 살펴보다가 엄지발가락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동안 전문직 부모님 밑에서 고상하게 크며 육체노동은 처음이었지? 부모님께 돈달라 하면 늘 돈이 나왔잖아"
"물류 창고에서도 봤지만 매일 이렇게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도 많단다"
"직업이 늘 하고 싶은 일만하거나 자아실현적 요소는 아니란다. 생존을 위해 하는 경우도 많단다. 너도 백수라서 일 안하면 아사할 수 있잖아?"
"원래 돈 버는 것은 힘든 일이야. 너가 엘리트 교육 코스 밟고 사무직으로만 일하면서 몰랐을 뿐"
"사람들은 3D 노동을 멸시하고 거부하는 편이고 너도 다소 그런 사람이었지만, 누군가는 해야할 일이야"
경험상 이렇게 멍이 들면 3~6개월은 간다.
아마 이 멍을 가지고 또 물류알바/다른알바들을 하러 갈 것 같다.
조직에 속해있지 않은 개인의 경우 자유롭지만 모든 게 내 책임이 된다.
그리고 같이 알바 온 20~50대 남성들과 대화하며 다사다난한 세상, 코로나 여파로 어려워진 경기 등 다양한 삶의 궤적들을 배우고 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