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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동아리에 가입했던 이야기

2015년 새내기 때의 추억

by 배즐

고등학생 시절, 나는 남성미 넘치는 친구들 사이에서 교우 관계에 적응하지 못했다. 남자애들과 어울리지 못하니 여자애들이랑 놀려고 했으나, 한국은 포스트 조선시대로서 남녀유별이 강한 국가여서 그런가 내가 여자애들에게 플러팅(추파던지기)하는 것으로 뒷소문이 났다. 나는 그저 친구가 필요했는데.. 너무 힘든 나머지 하루는 담임 선생님께 상담을 요청했다.


당시 담임 선생님은 잠시 임시로 오셨던 선생님이었다. 이전 담임 선생님은 육아휴직으로 자리를 비우셨고, 잠깐 오신 선생님이셨는데 성격이 되게 좋으신 분이었다. 상담을 요청하자 교무실에 따라 갔다. 당시 야자하던 시간이어서 다른 선생님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왈칵 울으며, 나는 동성애자인데 학교 생활이 정말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남자애들과는 어울리기 너무 힘들고, 여자애들이랑 친해지고 싶어도 내가 여자 꼬신다고 퍼지는 뒷말들이 상처가 되고 힘들다고 울면서 얘기했다. 선생님께서는 당황했다. 눈알을 360도 계속 굴리셨다. 어느 정도 생각하다가 선생님은 갑자기 "00아, 공부를 열심히 해라."라고 말하셨다.


오잉? ㅋㅋ 나는 눈물을 뚝 그쳤다. 선생님께서는 말을 이어나가셨다. "대학교에 가면 너와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서 활동하는 성소수자 동아리가 있단다. 서울권에 있는 높은 대학일수록 그런 동아리가 잘 되어있단다. 그러니까 열공하렴. 높은 대학일수록 그런게 잘되어있단다. 그리고 선생님이 보니까 XX이랑 XO이는 성격이 좋아보이던데 너가 다가가면 잘 어울려 지낼 수 있을 것 같던데? ~~~(후략)"


당시 태어나서 처음 알게 되었다. 대학교에 성소수자 동아리가 있다니. 대학교를 입학하자마자 가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방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선생님이 강조하셨던 열공을 하여 2015년, 운좋게 서울에 있는 한 대학교를 입학하게 되었다. 입학하자마자 구글링과 네이버 검색으로 성소수자 동아리부터 찾았다. 포스트가 적은 것 보니 활동이 활발한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 학교가 선비 이미지가 조금 있긴 한데 다소 동아리들도 그런 것 같았다.


그래도 쭉 검색하여 동아리 담당자와 SNS를 연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입학하자마자 동아리에 들어가고 싶어했던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었다. 나 말고 4~5명 더 있다고 한다. 동아리 담당자 분은 학교 근처 피자헛에서 모임을 주선했다. 신기했다. 그렇게 게이 친구, 레즈 친구, 바이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또한 종로 게이 술집에서 동아리 정모도 했다. 유입되는 사람이 적어서 동아리 활동이 많이 죽었었다고 한다. 10, 11학번 형들이 메인이었고, 그 외 학번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오잉 근데 다들 형이라 부담스럽고 (잘생긴 사람은 없었고) 크흠... 아무튼 동아리 활동 첫 출발은 이렇게 순조로웠다.


동아리 같이 가입했던 15학번 친구들은 되게 이런저런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레즈 친구들이 나를 퀴어문화축제에 끌고갔다. 이런게 있는지도 몰랐다. 신기했다. 해외대사관 직원들도 퀴어문화축제를 축하하기 위해 온 풍경도 신기했다(유럽국가 대사관 밖에 없긴 했다) 축제에서 여자들끼리 남자들끼리 팔짱끼고 다니는 것도 처음봤다. (보면서 나도 애인생기면 축제 때 같이 손잡고 다니고 싶다는 로망이 생겼다.) 무대 춤도 보고, 대사관 부스, 각 대학 성소수자 동아리 부스, 성소수자 NGO 부스 등을 돌며 배지, 굿즈, 에코백, 행사내용 등을 보며 인생 첫 퀴어축제를 즐겼다.


또한 레즈 친구들은 멋을 부리고 짧은 치마를 입고 왔었다. 애들이랑 같이 의경들 옆 지나가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의경들 보니까 우리가 걷는 내내 레즈 친구들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런웨이하는 줄 알았다. 나는 옆에 있었을 뿐이긴 했는데 살면서 남자 시선 이렇게 많이 받아본 건 처음이었다. 무언가 부러우면서도 애들 피곤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클럽도 갔었다. 특히 퀴어문화축제 주간 때 같이 술마시고 홍대에 있던 한 클럽을 갔다. 원래 그 클럽은 레즈비언 분들이 주로 가는 클럽이지만 퀴어문화축제 때는 어느 퀴어 클럽이든 모두 LGBTQ+로 운영한다고 한다(모든 성소수자에게 열려있다). 그래서 내가 처음으로 갔던 클럽은 레즈클럽이었다(핑ㅋX인데 지금은 문을 닫았다고 한다). 무대에 보니까 어떤 삭발한 분께서 멋있게 춤을 추고 계셨다. 테스토스테론(남성호르몬) 넘치는 무대를 보고 너무 멋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여성 분이셨다. 나는 당시 너무 충격을 받았다. 겉모습이 다가 아니구나, 역시 사람은 겉으로 판단하면 안된다는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


인생 첫 클럽이었고, 레즈 친구들이 같이 대동해주었으나 나는 긴장되고 어쩔 줄 몰랐다. 그래서 친구와 함께 데낄라를 연거푸 마셨다. 한 샷에 5천원이었고, 친구와 함께 2잔을 연거푸 마셨다. 바텐더 분에게 데낄리 이거 센 거냐 여쭤보며 대화를 나눌 때, 바텐더 분은 나에게 갑자기 "너 쏠로지!!!"라고 물어봤다. 센스없고 찌질한 내 성격이 느껴지셨던 것 같다. 나는 너무 놀라서 어안이벙벙하며 친구랑 같이 엄청 웃었다. (당시) 모태쏠로임을 지랑스럽게 얘기해드렸다.


퀴어문화축제 이후 친구들과 종종 대학 캠퍼스 안이나 술집에서 음주가무를 즐겼다. 나도 친구들도 그렇게 잘 노는 편은 아니지만 같이 연애사업, 학점사업 등 대학생활 이야기를 재미있게 나누었다. 특히 연애사업 이야기가 단연 인기있던 주재였다. 모태쏠로였던 나는 당시 인생살면서 한번도 느끼지 못했던 사랑이라는 감정을 너무나도 느껴보고 싶었다. 내가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조차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데이트 어플로 사람들을 자주 만나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게 한명, 두명, 세명, ••• 열명, 열한명, ••• 숫자는 늘어만 갔는데 나의 연애사업은 파산을 향해가고 있었다. 나의 소개팅 관련 이야기는 나중에 또 포스팅 해보도록 한다.



당시 인기있던 과일소주. 친구들과 학교 인근 잔디밭에서 돗자리 깔고 마셨던 행복했던 기억.


6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꿈과 같았던 경험들이었다. 성소수자로 살아가면서 해방감을 느끼게 해주는 첫 경험들이었다. 친구들은 지금까지도 연락을 이어나가고 있다. 현재 친구들 지금은 각자 취업, 진학 등으로 자기 인생사느라 바쁘지만, 우리 모두 새내기 때의 즐거운 기억은 모두 갖고 살아가고 있다. 꿈만 같다. 모두의 행복을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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