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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즐 Jul 14. 2021

나의 시각장애인 할아버지 이야기

- 할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며

0. 들어가며

1. 할아버지와의 첫 만남

2. 할아버지와의 말벗활동

3. 갑작스러운 정부 정책의 변경

4.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5. 할아버지를 추모하며



0. 들어가며


  지난 2019년 3월, 독거노인 봉사활동을 하고 싶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성인이 되면 독거노인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나의 큰(?) 꿈이었다. 할머니 밑에서 자란 사람으로서, 대한민국이 일제강점기-한국전쟁-산업화 시대를 겪으며 여기까지 있게 해준 어르신들을 존경하는 사람으로서, 현대사의 산 증인인 어르신들 중 도움이 필요한 분들을 돕고 싶었다. 대학생이 된 이후에 대외활동 하느라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군대 전역 이후 19년 3월, 사회에 나오자마자 바로 봉사활동을 알아보았다.


  그렇게 19년 4월부터 00노인재가지원센터를 통해 한 시각장애인 할아버지 말벗 봉사활동을 안내받았다. 한 달에 한 번 어르신 댁에 방문하여 1~2시간 정도 말벗 활동을 하는 활동이었다. 활동도 그렇게 막중한 일이 아니다보니 별로 부담도 크게 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각장애인 어르신과의 인연을 시작하게 되었다.



1. 할아버지와의 첫 만남


  처음 안내 받은 날, 센터에서 보내준 주소를 따라 00구의 00아파트로 향했다. 가보니 사회복지사 선생님들께서 할아버지께 이발을 해드리고 돌아가시려고 정리 중이셨다. 사회복지사 선생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 나누고, 어르신과 처음 인사를 나누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첫날부터 나는 몇몇 부분에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일단 시각장애인을 만나게 된 게 태어나서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가 종종 산책하러 다니는 00구이었고, 종종 지나치다가 보는 00아파트에 이렇게 멀쩡히 한번도 마주쳐본 적 없는 시각장애인 할아버지께서 정말 평범하게 살아 숨쉬고 있었다. 우리의 일상 바로 옆에 계셨는데 왜 나는 한번도 마주하지 못한 것이었을까? 둘째로는 사회복지사 선생님들이 이런저런 안내사항을 말씀해주셨는데, 나로서는 한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안내사항들이었다. 예를 들어 ‘어르신 움직일 때 문턱 조심히 잘 넘어가는지 잘 보셔야 한다’, ‘봉사하러 올 때 천장에 거미줄 같은 것 있으면 제거해주세요’, ‘화장실 이용할 때 슬리퍼와 비누 같은 것은 항상 처음 있었던 모양 그대로 놓아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할아버지께 이용하실 때 사고 날 수 있다’ 등이었다. 비시각장애인들은 평소 신경쓰지 못하던 부분들이었다.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누어보니, 할아버지께서는 강원도 화천군 출신이셨다. 어릴 적에 놀다가 눈 한쪽을 잃었고, 서른 살에 사고로 남은 눈 한쪽도 잃게 되셨다고 한다. 이전까지는 어업에 종사하셨지만, 눈을 다친 이후에는 침술을 배우게 되셨다고 한다. 할아버지 말씀으로는, 시각장애인 분들께서 경제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점성술이나 침술을 배웠다고 한다. 할아버지께서는 침술을 배웠고, 서울에 와서 현재 거주하시는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 사람들에게 침을 놓으며 살으셨다고 한다. 옆 00구청 직원들도 오고, 친척들도 오고, 용한 침술사로 이름 좀 날렸다고 하셨다(본인피셜).


  하지만 해당 지역이 재개발에 들어가게 되었고, 할아버지는 입주권을 얻게 되어 잠깐 다른 지역에 사시다가 현재 아파트에 살고 계신 것이라 하셨다. 14층에 살고 계신 할아버지께서는, 이전과 다르게 사회복지사의 도움 없이는 밖에 못나가는 상황이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할아버지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2. 할아버지와의 말벗활동


  한 달에 한번, 할아버지 댁에 방문하였다. 1~2시간 동안 말벗활동을 하였다. 할아버지는 늘 고마워하셨다. 아파트 안에만 지내시고, 바깥 사람들과 교류할 기회는 나와 사회복지사 선생님 밖에 없었다. 할아버지는 시각장애인 분들을 위한 작은 라디오같이 생긴 기계를 통해 뉴스를 들으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아셨지만,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존재는 나와 사회복지사 선생님 뿐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나를 통해 다양한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셨다. 매달 1) 무슨 공부를 하고 있고, 2) 무슨 대외활동을 하러 갔었고, 3) 엄마 아빠랑 어디를 놀러 다녀왔고, 4) 해외여행 어디를 다녀왔다는 등등을 이야기해드리면 할아버지는 정말 즐거워하셨다. 나의 소재가 떨어지면 할아버지는 갑자기 쑥 ‘군대는 어디 다녀왔어요?’, ‘군대는 어땠어요?’를 매번 물어보셨다. 그냥 군생활 이랬다 저랬다 얘기해드리면, 할아버지께서는 고향 강원도에서 군인들을 본 이야기를 해주셨다. 집 근처 군부대에서 군인들이 포를 쐈는데 반대로 쏴서 모두 사망한 이야기(?), 군인들이 근처에서 훈련받던 이야기 등 군대 얘기가 할아버지에 인상깊으셨던 것 같다. 근데 정작 할아버지께서는 당시 눈 한쪽을 다치셨기에 다녀오지 않으셨다고 한다(?).


  할아버지께서는 종종 자신의 개인사 또한 말씀해주셨다. 거리를 오고지날 때 사람들이 종종 “맹인 지나간다. 재수없는 일 생기는 거 아닌가 몰라”라고 말하던 일, 침술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자 지하철에서 구걸하던 이야기, 지하철 플랫폼 틈 사이에 떨어져서 사고 났던 이야기, 침술을 받고 고질병이 호전된 손님이 찾아와서 고마워했던 일 등... 비장애인으로서는 상상 못해본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다.


  또한 할아버지와 만날 때마다 내가 무엇을 준비해가면 할아버지가 좋아하실지 고민해보았다. 생각해보니 할아버지께서는 집 안에만 계시고 사회복지사 선생님들이 센터에서 가져와주시는 반찬을 비롯해 만두, 과자 정도만을 드시고 계셨다. 비시각장애인들이 즐기는 다양한 음식을 드시고 계시지는 않아 보였다. 그래서 갈 때마다 다양한 음식을 사서 할아버지 댁에 방문했다. 하루는 어르신들이 좋아하시는 카스테라, 하루는 토마토, 하루는 자두, 어느 날은 꿀떡, 겨울에는 붕어빵 등. 할아버지께서 제일 맛있어 하신 것은 단연 만두였다. 그냥 역세권이면 어디나 있는 5천원에 6~8개 들어가는 만두. 만두를 사가니 할아버지께서는 정말 허겁지겁 드셨다. “여태까지 사 온 그 어느 것보다도 맛있다”라고 말씀하시며 정말 너무 맛있게 드셨다. 내가 “할아버지 만두 도망 어디 안가요. 체하실라 천천히 드세요”라고 말씀드리니 웃으시면서 속도를 낮추다가도 무척 빠르게 드셨다.


  이 모습을 보며 마음이 찢어질 듯 슬펐다. 장애인들도 기호를 갖고 있는 사람인데, 우리 사회가 알게 모르게 장애인 프렌들리하지 못하여 사람들이 나오지 못해 이런 기호식품도 못 사 드시는 것은 아닐까 생각들었다. 점차 일상을 살아가다가 점자 보도블럭이 곳곳에 닳고 교체되지 않은 모습, 아파트 복도에는 보도블록이 없는 모습, 횡단보도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시설이 다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 등이 보이기 시작했고, 사회 곳곳의 모습이 장애인을 격리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생각들었다. 게다가 코로나 이후로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해 모든 아파트가 앞다투어 엘리베이터 버튼에 붙인 구리 필름은 “엘리베이터 버튼의 점자를 읽는 사람은 없다!”라고 말하는 기분이었다. 이 구리 필름은 비장애인 사회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을 방증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래도 다행히 구리 필름을 더듬거리며 점자를 만져보니 점자를 읽을 수는 있었지만, 그래도 굳은살 박힌 채로 읽는 것 같은 기분이 아닐까 생각들었다.


  하루는, 할아버지께서 매일 집 안에만 계시니까 같이 아파트 옆 하천이나 걸으시는 건 어떤지 여쭈어보았다. 할아버지께서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회복지사 선생님과 하천 가는 것을 즐기셨다고 하는데, 나이 좀 더 먹고나서는 모든게 귀찮아지셨다고 했다. 나는 그래도 건강을 위해 나가는 게 좋으시지 않겠느냐 여쭤보았지만, 할아버지께서 의지가 워낙 강하셔서 그냥 집에서 매번 또 나의 재밌었던 일들을 풀어드렸다.


  또한 내가 러시아로 한 학기 교환학생으로 갔을 때, Skype로 할아버지께 연락을 드려 할아버지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드렸다. 러시아 출국 이전에 할아버지 댁에 갔을 때, 할아버지의 손을 오므려 주먹을 지구로 가정한 뒤 “(주먹의 손등을 만지며) 한국이 여기있다면 (주먹의 앞을 만지며) 저는 여기로 가요. (주먹의 앞과 손등 사이를 어루어만지며) 러시아는 이렇게 있고요.”라고 말씀드렸다. 할아버지께서는 재미있어 하셨다. 나중에 출국하고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할아버지께 전화를 드리자, “아휴 신기하네! 근데 그렇게 먼 곳인데 전화가 정말 깨끗하네!”라고 말하며 신기하며 좋아하셨다. 기술이 그렇게 발전했다는 사실에 감복해 하셨다.



3. 갑작스러운 정부 정책의 변경


  나는 한 달에 한번씩 할아버지를 뵈러 가지만, 사회복지사 선생님께서는 일주일에 세 번, 3시간씩 뵈러 가고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할아버지를 뵌 지 10년도 더 넘은 분이셨고, 가족과 다름없는 관계였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매달 나오는 연금 또한 오랜 인연이자 믿을 수 있는 존재인 사회복지사 선생님께 맡기고 계셨다.


  그러던 2019년 12월, 갑작스럽게 노인 복지 정책이 변했다. 당시 보건복지부는 더 나은 서비스를 위해 노인돌봄종합서비스, 노인돌봄기본서비스 등 당시 파편화되어있고 유사적-분절적으로 제공되고 있는 노인 정책을 노인맞춤돌봄서비스로 통일하였다고 한다. 더 좋은 서비스를 위해 정책을 추진했다고 했다. 중앙정부의 이런 움직임에 따라 00재가노인지원센터 또한 기존 노인 정책을 노인맞춤돌봄서비스로 전환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할아버지께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다고 한다. 정책 변환으로 할아버지와 10년 이상 인연을 맺어온 사회복지사 선생님께서는 더 이상 할아버지를 맡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신에 다른 사회복지사 선생님이 오셨고, 심지어 바뀐 정책은 이전보다 가정 방문시간이 더 적어져서 할아버지께서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다.

2~3개월이 지나고, 할아버지께서 어떤 유료서비스를 신청한 이후 바뀐 사회복지사 선생님이 일주일 중 평일 내내 오는 방식으로 바뀌었다고 말씀하셨다. 덕분에 할아버지께서는 매일매일 사람을 만날 수 있었고, 내가 할아버지 댁에 갈 때마다 할아버지께서는 얼굴이 밝아지셨다. 할아버지께서는 그래도 돈은 이전 사회복지사 선생님께서 가끔 방문하시며 관리하신다고 하셨다.


  이 정책의 전환으로 나는 마음 속에서 좀 많은 생각이 들었다. ‘20대 대학생으로서 평소에 정부 정책서비스를 몸소 머리부터 발끝까지 체감하는게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국가장학금? 청년기본소득? 근로장려금?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체로 정부 정책이 어떻게 변화하느냐에 따라 오랜 인연을 떠나보내게 되고, 매일매일 스트레스 받고 일상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경험까지는 겪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번 노인 정책 변환 또한 일개 비장애인 비노년층 시민이 보았을 때는 ‘아 그냥 노인 정책이 변화했구나’라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할아버지께는 심각한 일이었다. 정책의 변환이 10년 이상 함께했던 사회복지사 선생님과 연결고리를 끊게 만들었다. 정책이 변화하고 정착되는 2~3개월 동안 할아버지께서는 정말 스트레스 받아하시고 얼굴이 어두우셨다. 그래도 끝내 정책이 잘 정착되고 기존보다 얼굴이 더 밝아지셔서 보기는 좋았다.


  이번 경험을 통해 정부 정책의 위중함, 정책 변환이 사회적 취약 계층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고민해보게 되었다. 종종 ‘정책은 섬세해야한다’라는 어구를 뉴스들을 통해 보곤 하는데, 이런 맥락에서 적용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책결정자 분들께서 정책 변화 이후에도 기존 사회복지사 분들이 쭉 복지수요자들과 함께 계속 있을 수 있도록 섬세하게 고려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행정가들이 이런 이야기까지 다 아실 수는 없거나 알았더라도 내부 구조 때문에 힘들 수 있었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옆에서 복지수요자가 고통받는 모습을 본 사람으로서 아쉬움이 남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4.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러다 지난 3월, 할아버지 댁에 가려고 전화를 드렸으나 계속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입니다’라는 자동음성이 나왔다. 이에 의아해서 센터에 전화로 문의드렸다. 센터도 이상해하시면서 알아보고 연락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몇 분 뒤, 센터에서 전화를 주셨다. 센터 담당 선생님 왈, 할아버지께서 지난 주에 돌아가셨다고 말씀해주셨다. 그래서 이미 장례도 끝난 상황이라며, 장례까지 다 담당하셨던 사회복지사 선생님 연락처를 남겨주셨다.

믿을 수 없어서 사회복지사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다. 사회복지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어르신께서 급하게 점심 밥을 먹고 침대 위에서 토를 했는데 기도가 막혀서 돌아가셨다고 하셨다. 돈 관리 때문에 사회복지사 선생님께서 2시쯤 집에 방문했는데, 할아버지께서는 침대에 엎드려 숨막혀 계신 상황이었다고 한다. 심폐소생술도 하고, 119도 불렀으나 끝내 숨을 거두셨다는 이야기였다.


  충격이었다. 마지막으로 2월에 할아버지 댁에 방문했을 때 할아버지께서는 정말 팔팔하신 상황이었다. 정책 변경에 적응하셔서 늘 밝은 얼굴이셨고, 만두 사가면 정말 맛있게 드시고 건강하신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렇게 질식으로 돌아가시다니... 믿을 수 없었다.


  또한 내가 장례식을 가지 못했다는게 너무 슬펐다. 2년 동안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나날을 할아버지와 함께 했고, 할아버지께서 성품이 좋으신 분이어서 즐겁게 말벗 활동을 했었다.


  사회복지사 선생님께서는 내가 아쉬워하고 슬퍼하는 이야기를 하자, 어르신께서는 평소에 학생에게 정말 고마워하셨다고 말씀해주셨다. 이전에 봉사오던 학생이나 사람들께서는 종종 어르신과 약속을 잡아놓고 약속을 깨서 어르신께서 상처받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나 같은 경우에는 대학생이 무슨 돈을 번다고 매번 올 때마다 먹을 것 챙겨오고, 이전 사람들과 다르게 약속을 깨지는 않아서 늘 고마워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하셨다. 하늘에서 고마워하고 계실 테니 할아버지는 마음 속으로만 간직하고 살아계신 부모님께나 잘하라고 말씀해주셨다.


  사회복지사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놀랬다. 봉사활동 오겠다고 해놓고서는 상처를 주고 떠나다니... 다들 참 나빴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성인 이후 주변에 친한 사람 중 돌아가신 분이 처음이어서 놀란 마음은 이틀 넘게 지속되었다. 장례식을 못가서 죄송한 마음도 들고, 좋은 분 이렇게 고통스럽게 돌아가시게 만든 세상이 밉기도 했다. 또한 할아버지와 만나고 이야기 나눈 기억은 마음 속 뿐만 아니라 사진으로도 저장되어있고, 지금도 00아파트 가면 할아버지께서 반겨주실 것 같은데, 할아버지께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다가왔다. 할아버지 돌아가신 이후 세상이 너무나 평범히 잘 돌아가는 것도 이상하게 다가왔다. 게다가 이런 슬픔들을 천천히 느끼고 싶지만 쉴새없이 몰아치는 과제도 미웠다.



5. 할아버지를 추모하며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몇 달이 지난 지금, 나는 사실 아직도 할아버지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 지금도 00구 00아파트 14층에 가서 문을 두드리면, 할아버지께서 “예!!”하며 열어주실 것 같다. 나의 휴대폰 앨범만 보아도 봉사활동 보고서에 제출하기 위해 할아버지와 함께 찍었던 사진들 속에 할아버지는 생생히 살아계신다. 사진 속 할아버지께서는 꿀떡, 만두, 붕어빵을 맛있게 드시고 있다.


  할아버지께서는 나에게 새로운 시각으로 생각할 소중한 관점을 주셨다. 봉사활동을 다니다가 엘리베이터 구리 필름이 어느 날 너무나 다르게 보였던 순간, 정부 정책의 변화가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순간, 할아버지께서 만두를 허겁지겁 드시는 순간 등 비장애인으로서 생각도 못했던 순간들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장애인들이 배제되는 사회 모습들을 마주치는 순간이 너무나도 많았다.


  나는 2년 간의 봉사활동 동안 장애인과 비장애인 이슈를 생각하면서, 이런 놀람의 순간들이 할아버지께서 두 눈을 모두 잃었다는 ‘불행’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누구나 어떤 형식으로든 장애인이 될 수 있는 세상에서, 사회가 ‘효율성’과 ‘예산’의 관점으로 장애인을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존재지움’하는 ‘불평등’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경험과 생각이 모이다보니 자연스레 ‘사회문제 개선’을 목표로 하는 ‘사회학’ 대학원을 진학하고자 준비하는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지만,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하루하루 평범히 지나가는 세상이 참 야속하다. 동시에 할아버지께서는 일상이 불편한 현세보다 내세가 오히려 더 편하시지 않을까라는 생각까지도 든다. 할아버지께 그동안 고생하셨다는 말씀,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올리고 싶다. 또한 현재 및 미래의 장애인 분들께서 더 개선된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말씀 올리고 싶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할아버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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