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하천 대피소는 명선봉을 지나면 나타나는 종주 중 첫번째 나타나는 휴식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식수가 그렇게 많이 나오니 너도나도 이곳에서 식수를 보충하고 휴식을 취한다.
연하천(1,440m)이라는 이름이 오래전부터 불리어지지는 않았지만 산업화 이후 전남 구례의 연하반 산악회에서 명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구름 속에 물줄기가 흐른다’는 의미로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을 뿐 아니라 습지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나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해보면 이렇다. 나는 산악회버스를 타고 지리산을 종주하는 중에 연하천 대피소에 도착하여 아침을 해결하고 있는데 어디서 본 사람이 있다. 내 친구다. 나는 서울에서 왔고 그 친구는 부산에서 산악회 버스를 타고 왔는데 지리산 그 넓은 곳 연하천 대피소에서 만난 것이다. 산행중 친구를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그것도 지리산 연하천 대피소에 친구를 만났다. 같이 기념사진도 찍고 모임이 있을때 만나면 서로 그 이야기를 하면서 추억을 회상한다. 이러한 이유로 연하천 대피소가 더 애틋하다. 연하천 대피소에 가면 한번 더 추억에 잠긴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종주를 하였고 친구는 1박2일을 하여서 여유를 가진다고 하여 헤어졌지만 그 때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제 백소령 대피소로 이동을 한다. 연하천 대피소에서 연하천 대피소사이는 그렇게 힘들이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시간 정도 소요되는 데 너덜지대가 있다. 벽소령 바로 직전 30여분간은 이지대를 지나야 한다.이곳이 형제봉이다. 형제봉에 대한 전설이 있다.
"옛날 삼정리 하정마을에 나이가 들도록 결혼하지 못한 효성이 지극한 ‘인걸’이라는 나무꾼이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이 마을을 끼고 흐르는 부자바위골에 일곱 선녀가 내려와 목욕하는 사이 인걸은 ‘아미’라는 한 선녀의 옷을 숨기게 된다. 이에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 아미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는다. 어느 날 인걸은 숨겨뒀던 아미의 옷을 장난삼아 입혀주는데, 아미는 그 옷을 입고 인걸과 아들들을 남겨둔 채 승천한다. 이에 인걸과 두 아들은 날마다 지리산에 올라가 돌아오지 않는 아미를 기다리다가 망부석, 망모석이 되었다.
그래서 이 마을 사람들은 부자(父子)바위라 불렀으며 지금도 함양 삼정마을 주민들은 그렇게 부른다.
이 바위가 형제바위로 바뀌게 된 것은 1960년대 이후 등산객들이 형제가 등을 돌리게 되었다는 이야기 또는 두 형제가 이곳에서 신선이 되기 위하여 도를 닦았다는 이야기와 함께 형제바위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벽소령은 해발 1,350m로 옛날에는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과 하동군 화개면을 이어주던 교통로였다고 한다. 그곳에 가면 넓은 도로가 보인다. 그리고 도로와 같은 형태를 만날 수 있다.
벽소령의 달 풍경은 지리산 10경 중 하나로 벽소명월이라고 한다.
시인 이원규는 벽소령을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이라는 시를 통해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이 원 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꽃 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유장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 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려거든
불일폭포의 물방망이를 맞으러
벌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 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백소령령대피소를 지날 때 쯤 여기에 이러한 표시가 있다. 14시이후에는 다음을 못갑니다. 그러니까 세석방향으로 갈 수 없다고 안내를 한다. 밤이 늦으면 위험하니까 입산시간을 제한하는 것이다.
선비샘까지 1시간은 비교적 완만하다. 선비샘에서 세석까지 2-3시간은 능선코스중 지루하고 힘든 코스이다.
선비샘에 도착하면 이곳의 전설을 들어보기로 한다.
이 샘은 현재는 서서 물을 받을 수 있지만, 예전에는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만 물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옛날 덕평마을에 이씨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노인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화전민의 자식으로 가난에 쪼들리며 평생을 살았다. 배우지 못한데다 못생겨 주위 사람들로부터 천대를 받으며 살아왔던 노인은, 단 한번이라도 사람다운 대접, 선비대접을 받으며 살고 싶었다. 살아생전에는 소원을 이루지 못한 그는 마지막 유언으로 상덕평 샘터 위에 묻어 달라고 부탁했고, 효성이 지극한 두 아들은 아버지의 유해를 샘터 위에 매장 했다. 그로부터 매년 지리산을 찾는 등산객들은 샘에서 물을 마실 때면 반드시 노인의 무덤 앞에 인사를 하게 되니, 생전에 받고 싶었던 선비대접을 죽어서나마 이루었던 것이다.
덕평봉까지 40여분을 돌과 바위 길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고도를 높여가며 오르는데 조망이 없는 숲속이다. 덕평봉에 올라서면 조망이 시원하나 칠선봉, 영신봉을 지나 세석에 이르기까지 등산로가 만만치 않다고 할 수 있다. 세석평전에 있는 세석대피소를 보면 이제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덕평봉 이후가 힘들다고 할 수 있는 구간이라고 할 것이다.
이구간을 지나면서 멀리 천왕봉을 담는다.
세석대피소는 종전에 있던 대피소를 1995년에 새로 지었는데, 최근에는190명이나 수용할 수 있어 지리산 국립공원내 대피소 중에 가장 크다(면적 653.0m²) 넓은 세석평전에 위치하고 있는데 주릉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물을 구하기가 쉬워 찾는 사람이 많다. 세석평전에서 북쪽으로 넘어가면 한신계곡이 시작되어 백무동이 있는 마천지구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남부능선이 시작된다.
세석평전은 촛대봉 올라가기전에 만나는 넓고 완만한 평지이다. 둘레가 약 12㎞, 넓이는 줄잡아 30만여 평으로 고원지대에서는 보기 어려운 습지도 있다. 세석평전은 신라시대 때 화랑의 수련도장으로 이용되었으며, 이른바 청학동으로 추정하는 곳이다. 세석평전의 수려함은 사계에 걸쳐 나타난다. 특히 봄철에 만개한 철쭉군락은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인다. 이곳에 있는 음양수에 대한 전설이 있다. 그 전설을 옮겨본다.
"아득한 옛날 지리산에 제일 먼저 들어온 호야와 연진은 대성 계곡에서 한 쌍의 원앙으로 행복한 나날을 보냈으나 자녀를 갖지 못했다. 어느날 남편이 산열매를 따러 간 사이 검은 곰이 연진 여인에게 세석고원 음양수 샘물을 마시면 아들, 딸을 낳을 수 있다고 일러 주었다.
이 말을 들은 연진 여인은 곧장 음양수로 달려가 샘물을 실컷 마셨다. 그 사이, 곰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호랑이가 이를 지리산 산신령께 고해 바쳤다. 지리산 산신령은 크게 노하여 음양수의 신비를 인간에게 발설한 곰을 토굴 속에 가두고, 호랑이는 그 공으로 백수의 왕이 되게 했다. 또 음양수 샘물을 훔쳐 먹은 연진 여인에게도 무거운 벌을 내려평생토록 잔돌 평전의 돌밭에서 외로이 철쭉을 가꾸게 하였다.
연진 여인은 슬픔에 젖어 흘러내리는 눈물과 닳아 터진 다섯 손가락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꽃밭에 뿌리며 애처롭게 언제까지나 꽃밭을 가꾸었다.
그녀는 또 밤마다 촛대봉 정상에서 촛불을 켜 놓고 천왕봉 산신령을 향하여 죄를 빌다가 그대로 돌이 되었으며, 촛대봉의 앉은 바위는 바로 가련한 연진 여인의 굳어진 모습이라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전설이 있는 세석평전을 지나면, 높이 1,703.7m 촛대봉이다. 봉우리 모양이 마치 촛농이 흘러내린 듯하여 촛대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여기에서부터 장터목대피소까지 연하평전이라고 한다.
무박 종주를 할 경우 여기를 12시경 지나야 어두워지기전 중산리나 백무동으로 갈수 있다. 여기를 12시를 넘겨서 도착하면 거림이나 백무동을 하산하여야 한다. 대피소는 사전예약제라 예약이 되지 않으면 사용에 어려움이 있다.
세석평전에서 결정을 하여야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