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에 대하여
커피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기호음료이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나에게 있어서도 커피는 상당히 중요한 기호음료라고 할 수 있다.
커피는 우연히 발견되었고 그 우연이란 이런 것이다. 염소를 키우는 목동이 염소를 데리고 숲에 갔는데 염소가 빨간 열매를 먹고 빙글빙글 춤을 춰 목동도 먹어보니 에너지가 넘쳐서 그 열매를 따서 집으로 가져왔다. 목동의 아내도 먹어보고 그것에 대한 호기심과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수도원으로 그것을 가지고 갔다. 수도원에서도 그것에 대하여 알지 못하여 수도원 원장에게 가져갔고 수도원 원장은 그것이 빨간 열매에 거부반응을 보이면서 사탄의 물건이라고 하여 불 속에 던져 넣었는데 커피가 불 속에서 아로마 향을 피워 불에 탄 커피 열매를 꺼내어 가루를 만들고 물에 탄 결과 향이 새로워 마신 결과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어서 밤을 지새우며 기도를 할 때 이를 이용하였다고 한다. 예멘을 통해 메카로 전파된 커피는 예배를 드릴 때 졸음에서 벗어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커피는 이슬람 세력의 확장과 함께 전 세계로 퍼졌다. 본격적으로 유럽으로 전파된 시기는 오스만 제국 때다. 빈이 커피가 유명해진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오스만튀르크가 빈을 점령하기 위하여 빈을 포위하였으며, 이때 오스트리아군은 이를 방어하기 위하여 전력을 기울였다. 이것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전투였으며 빈이 함락될 경우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빈의 어려움을 이웃 국가들이 듣고 원정군을 보내주었고 오스트리아군은 결사항전을 하였다. 오스만 군이 오랫동안 원정에서 계속된 공격을 하였으나 실패하고 주변국들의 갑자기 지원하였으므로 오스만 군이 패퇴하고 많은 보급 물품을 그들의 야영장에 고스란히 남겨두고 떠났다고 한다. 그중에서는 오스트리아인들이 처음 보는 이상한 물건도 있었는데 갈색 콩이 가득 찬 포대 수백 개였으며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해 그들은 콩을 불태우기 시작했으나 콜슈이츠키가 이 냄새를 맡은 후 콩 포대를 빼앗아 자신의 집으로 옮겼으며, 이것이 바로 커피였다. 콜슈이츠기는 이 포대의 커피를 기초로 빈 시내에 빈 최초의 커피하우스를 열었다고 한다. 이렇게 커피는 이슬람으로부터 기독교 국가로 전파가 된 것이다.
1683년 오스트리아로 쳐들어간 오스만 제국이 그 이전에 사신을 보내 프랑스 루이 14세에게 전쟁에 끼어들지 않을 조건으로 선물해준 것도 바로 커피 원두였다.
커피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한국에서는 쓴 커피에 대하여 그렇게 좋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9세기 말, 조선에 서양인들이 들어오면서였다. 특히 고종이 매우 좋아하였다고 한다. 어느 정도로 좋아했냐면 1889년 실각한 권신 김홍륙이 암살을 위해 커피에 독약을 탔는데 평소 마시던 커피와 향이 다름을 눈치채서 독살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초기에는 양탕국, 가배(珈琲. 커피를 음차한 것) 등으로 불렀다. 또는 양반들이 외국인에게 커피를 선물 받으면 두고두고 아껴 마셨다고 한다.
일본이나 중국은 우리보다 커피를 먼저 맛본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들은 우리보다 서양문물이 먼저 들어왔고 중국의 경우 이슬람 국가와 지속적인 교류가 있었든 만큼 들어왔을 것으로 보인다.
동서식품의 한국의 커피 역사에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다방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러시아 공사 워베르의 미인계 전략으로 한국 사교계에 침투한 손탁이란 여자가 러시아공사관 앞에 경영하였던 정동 구락부이다. 이곳은 당구장과 다방을 겸한 곳으로 각종 다류와 양식을 선보였다고 한다. 한편 일본인 나까무라가 서울에 문을 연 다방 나까무라가 최초의 근대식 다방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일본식 다방(깃사태이라고도함)은 한일합방 직후 명동에 다수 문을 열었으나 모두 일부 고위층만 드나들던 곳으로 일반인들은 감히 출입할 엄두도 낼 수 없었다’고 한다.
옛날 농촌에 다방이 있었다. 농촌의 다방이 왜 필요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면 소재지였든 나의 고향에도 다방이 있었다. 3~4개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방에서 커피는 중요하였다. 사실 라디오스타라는 영화에서도 다방이 나오며 그곳에서 여러 명의 자영업자가 커피를 마시고 커피값을 외상으론 처리한 후 월말에 결제한다. 그곳에는 아가씨도 있다. 그래서 그들은 찾았다. 한국의 다방은 차만 판 것이 아니고 아가씨도 팔았다. 이것이 현실이다. 한국의 농촌에서 다방이 장사가 된 것은 여인이 아닐까 커피보다는 하지만, 다방으로 인하여 한국의 커피는 설탕, 크림, 커피로 대별되는 커피가 탄생된 것이며 이것의 시장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커미믹스란 가장 적합한 맛의 배합으로 미리 설탕과 커피크림을 섞어 놓은 것으로 특별한 조리가 필요하지 않다. 맥심이라는 동서식품의 커피가 우리 시장에 있었고 그것이 원래 이름인 스페셜티 커피보다 유명하게 되면서 커피믹스라는 제품이 세계시장의 표준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최근에 커피믹스는 시장이 줄어들었으나 커피전문점이 스타벅스 등이 한국에서 각광을 받고 여인네들이 이곳에 들려야 모든 것이 되는 것처럼 하니 남정네들도 따라서 가다 보니 이제는 대세가 되었다. 커피가 좋은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한국의 1인당 커피 소모량은 가히 세계적 수준이라고 하니 커피는 우리네 기호식품으로 자리를 완전히 잡은 것 같다.
커피를 마시면서 여유를 찾고자 한다. 커피는 하나의 기호식품이지만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다. 기본적으로 커피를 이용하여 소통을 위한 수단이 된다. 커피를 매개로 소통을 할 수 있다. 커피를 한잔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커피 한 잔을 하면서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카페인 때문에 커피보다는 녹차, 홍차 등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지만, 한국에서는 차 문화가 그렇게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차보다는 커피가 우선시 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을 방문하였을 경우 차를 대접하기보다는 커피를 대접하는 것이 일상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럽에서 커피 문화가 발달된 것은 음주로 인한 가정불화가 심화하였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커피하우스가 생겨나기 전 사람들은 선술집에서 만나 이야기를 했으며, 과도한 음주로 인한 질병과 다툼이 일상이었다. 그런데, 커피하우스는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음료로 기독교 교리(술 취하지 말라)와 어긋나지 않았고 싼 가격이 매력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초기에 여성들은 커피하우스를 좋아하였다. 선술집에서 고주망태가 되어버린 남편들을 싫어해서 그랬는데 조금 지난 후 커피하우스에서 커피와 토론에 빠져서 집에 들어오지 않자 반발하기 시작하였으며, 1674년 발표된 ‘커피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청원’에서 여성들은 ‘커피는 남자들을 빈둥거리게 만들고 돈을 허투루 쓰게 할 뿐 아니라 정력까지 감퇴시킨다’라고 주장하였다.
미국 독립혁명의 근거지 역시 커피하우스란 이야기다. 미국에서는 보스턴 차 사건 이후 영국에 대항하기 위하여 차 대신 커피를 마셔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면서 커피 문화가 발전하였다. 이것이 현대 커피 문화의 표준이라고 할 수 있는 스타벅스까지 연결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은 현재도 세계 최대 커피 소비국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