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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생각해본다

by 김기만


한국의 정치인은 일본을 이용하고 일본의 정치인은 한국을 이용한다. 내 생각은 그렇다. 기본적으로 한국인은 일본을 싫어한다. 일본인도 한국인을 싫어한다. 그 이유는 일본이 한국을 식민 지배하였고 1592년 조선을 침략을 전 국토를 전장화한 적이 있다. 그래서 일본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은 전 국민의 우상이고 영웅이다. 그 이전에는 왜구들이 우리들의 국토에 침략하여 노략질하였다. 그래서 한국민은 일본을 싫어한다.
일본인이 한국인을 싫어하는 이유는 책이나 인터넷을 통하여 살펴보았다. 하지만, 특별한 이유는 없다. 단지 한국이 이웃에 있으면서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그들이 우리에게 좋게 좋게 하였는데 그들이 우리를 나쁘게 보고 우리는 그래서 싫다고 하는 것이다. 일본이 우리에게 한 행위를 제대로 모른다. 역사적으로 식민지배로 그들은 우리에게 이득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또, 우리가 자기들 영토인 독도를 강제 점령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이것은 일본 정부가 일본 국민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본다.
나는 일본인이 한국인을 싫어하는 이유를 지지리도 못 살면서 자존심만 강한 민족인 한민족이 중국에 귀속되어 있었으나 일본이 이를 해방시켜주고 도로, 철도, 공장도 건설하여 근대화를 이끌었으나 이에 대한 감사도 하지 않고 일본 보고 사과를 하라고 하고 스스로 내전을 치르면서 세계 최빈국이 되었다가, 일본이 도와준 결과(한일청구권 협정에 따른 배상금 또는 보상금)에 따라 경쟁력을 갖춘 국가가 된 후 G2에 접근하는 부를 이룬 일본을 인정하지도 못하면서 제 잘난 맛을 살면서 일본을 무시하고 극일 하겠다고 설치는 꼴이 싫다고 하는 것 같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 이유를 살펴보면 우리네 언론들이 유발하였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일본 언론이 이를 부추겼으며 정치인들이 이를 이용하였다고 본다. 과거 우리네 방송국은 일본의 방송 포맷을 허락도 없이 사용하였다. 이것은 도용이다. 오락프로그램 대부분이 이러한 형태였다. 일본을 싫어하면서 정서가 비슷한 일본의 오락프로그램 포맷을 사용한 것이다. 요즈음 중국이 한국 연예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사과와 반성도 없이 한국인의 독창력이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일본을 뛰어넘어 버렸고 일본인들이 그것을 좋아하게 되었고 한국 언론은 그것을 대서특필하면서 일본인의 기분을 망가뜨려서 일본인들에게 그러한 정서가 나타났다고 본다.
우리에게 있는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정서가 일본인에게 나타나서 일본은 한국을 싫어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이 북한을 싫어하는 이유는 명명백백하지만, 한국을 싫어하는 이유는 명명백백하지 않아서 지금도 논쟁이 발생하고 있다.
한국은 정부가 무엇을 하라고 하면 국민은 그것을 싫어한다. 정부의 행위에 대하여 국민은 반감을 갖고 있다. 권력자의 모든 행위가 정당하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다. 오랜 바쿠후 생활과 사무라이로 대표되는 일본의 무사 집단의 영향으로 일본의 국민은 권력자나 정부에 반기를 들지 않고 순응을 한다. 한국 국민들은 스스로 일어나서 국가를 지키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전국시대의 일본 전쟁은 무사 계급의 전쟁이었으며, 농민은 끌려가서 병사가 되었다. 그리고, 영주들도 농민들이 필요하지 않다면 전쟁에 끌어들이지 않았다. 무사 계급만이 전쟁하였다. 그래서, 농민은 영주 간의 전쟁에 관심이 없었다. A영주와 B영주가 싸워서 B영주가 이기면 B영주에게 세금을 바치면 그뿐이었다. 전쟁에는 그들은 관계가 없었다. 그래서, 일본군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략하고 성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그리고 한양까지 진격하였다. 그런데, 조선의 백성들이 그들을 공격하여 당황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전쟁의 양상이 바뀌었다고 한다. 한국 국민들은 스스로 일어나 영역을 지킨 것이다. 정부에서 일어나 적을 무찌르라고 지시하지도 않았다.
일본 국민들이 왜 그렇게 정부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고 가미카제와 같은 불구덩에 참여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한국민에게 그러한 일이 절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다. 일본인은 전국시대에 무장 계급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즉시 칼로 목숨을 빼앗아갔다. 스스로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할복도 불사하였다. 그래서 순종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 향촌의 양반이나 중앙에서 파견된 관료들이 횡포를 부렸지만, 목숨을 함부로 빼앗을 수는 없었다. 조선에서 사형은 삼복제의에 의하여 3차례의 재판을 거쳐 신중히 처리하도록 하였고 사형의 확정은 반드시 임금의 재결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러한 배경에 따라 한국은 ‘어중간한 지도자 집단 + 개성 있는 국민’으로 구성되어 있고 일본은 ‘보통 능력의 지도자 집단 + 말 잘 듣는 국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누군가는 정의하기도 하였다.
일본이 한국보다 서구화되는 과정이 앞섰고, 지금은 20년 정도 앞선 한국의 거울로 보여 한국의 정책당국은 일본의 현 상황을 수시로 모니터링한다. 동경의 아파트 가격 급등에 따른 위성도시 건설, 가격 급등에 따른 거품화, 노령화, 저출산 등등이다. 그런데, 최근 저출산을 비롯하여 일본보다 심각한 경우도 발생한다. 잃어버린 20년이라는 일본의 경제가 한국에도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심각한 디플레이션으로 일본 경제가 나락으로 빠져서 소득 5만 불 이하로 추락하였다. 일본 자본이 미국의 빌딩을 구매할 때에는 미국에서 호들갑을 떨었다. 한국이 자본을 축적한 예는 없다. 한국은 IMF를 겪었고 외화의 국외반출을 엄격히 규제한다. 한국에서는 일본과 같은 경우는 없다.
한국과 일본의 동조화가 일어나면 우리는 심각한 현상이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의 정치 구도는 현재 비슷하다. 여당이 정치를 그렇게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야당은 지리멸렬하기 때문에 정권을 잡을 수 없는 구조이다. 일본 자민당은 50년 장기집권 후 사회당과 민주당에게 정권을 내주었으나, 최근 다시 찾은 후 장기 집권 중이다. 다만, 일본은 보수 정권이고 한국인 진보정권이다.
전자산업에서 한국과 일본은 경쟁 구도이면서 서로 보완관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체적인 산업구조에서 동일하다 경쟁 구도이면서 보완관계이다. 기본적으로 일본의 부품을 한국에서 구매하여 수출하는 구조로 경제발전을 이룬 결과이다. 최근 한국도 부품을 많이 국산화하여 이러한 구조가 많이 극복되었지만, 아직 핵심부품의 국산화에 어려움을 겪는 부분이 많다고 본다. 한국과 일본의 산업구조가 한국과 중국으로 전이되고 있다고 보면 된다. 한국에서 부품을 중국으로 수출하고 중국이 완제품을 생산하는 구조이다. 결과는 세계의 공장인 중국의 생산량이 감소하면 한국의 경제도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일본도 한국의 생산량이 감소하면 일본의 경제도 축소된다.
일본 극복을 위하여 기업체는 노력하고 그 결과는 대기업을 중심으로 극복되고 TV, 반도체 등에서 이루었다. 하지만, 중소기업 부문에서는 아직도 미진하다. 그만큼 일본의 강소기업이 많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강소기업으로 등장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졸업하면 이것에 대한 부담이 너무 많아서 싫어한다. 아울러, 가업 승계도 어려움이 있기에 한계가 있다. 우리의 젊은이들은 독창성이 뛰어나고 가업 승계에 대한 긍지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본은 가업 승계에 대한 높은 자긍심이 있다. 우리는 그만큼 탄력이 넘치는 사회이다. 그래서 기업의 연속성을 확보하기에 한계가 있는 것이고 우리에게 현대적인 기업이 등장한 것은 일제강점기 직전이 1900년대 초반이므로 100년 기업을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대장간 이외에는 경상이니 만상이니 하는 상인이었으나 푸대접을 받는 현실에서 이들이 사업을 연장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을 비교하면서 우리는 기본정신으로 선비정신과 무사도를 비교하기도 한다. 선비정신을 비교하면서 고리타분한 박지원의 양반전으로 대표되는 양반 이야기는 집어치워야 할 것이며, 무사도를 이야기하면서 일본의 양아치 같은 떠돌이 무사는 집어치우고 이야기하여야 할 것이다. 선비정신이란 위키피디아에서는 ‘선비는 조선 사회에서 학문을 닦는 사람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이다. 특히 유교적 이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사회에 적절히 구현함으로써 선행을 베푸는 인격체를 가리키는 한편, 오늘날에는, 선비는 재물을 탐내지 않고 의리와 원칙을 소중히 여기는 학식 있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기도 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의 대표적인 인물들로 임진왜란 시 의병장이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양반으로서 나라가 어려울 때 자기의 사제와 노복뿐만 아니라 자기 목숨까지도 국가에 헌납한 것이다. 조선 후기의 일제 강제 침략에 맞선 의병장과 만주 등에서 우리의 혼을 일깨우고 독립운동을 이끈 이들도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선비정신으로 예를 들면서 우리는 기다림(끈기)과 모든 만물을 아끼는 마음(학문을 통해 지식의 양을 쌓는 것이 아니라 도리를 확인하고 실천하는 인격적 성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황희의 이야기를 보면서 구슬을 먹은 거위를 즉시 죽여서 그 진위를 확인하면 되었지만, 하루만 지나면 알 수 있음에 기다리는 미덕과 거위의 생명도 아끼는 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선비는 벼슬길이나 임금에 나아가기 어려워하고 임금이나 고위 관료의 부도덕하거나 부정직을 알림에 있어 비판 정신을 확보해야 하고 벼슬에서도 물러서기를 생각하는 태도를 보여야 했다.
나무위키에서 설명된 사무라이에 대한 설명을 보면 원래 사무라이들은 스스로 무장한 토착세력으로, 후에 중앙의 통제가 약해지자 각지의 귀족들이 장려하여 만든 사병이다. 역사적인 배경을 지닌 만큼 사무라이들이 사농공상과 지역의 권력자로 부상하였고 무력을 쥔 사무라이들은 권력을 장악하여 점차 귀족화 되었다. 특히 사무라이 중에서도 지방 귀족화한 것을 다이묘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자신의 권세를 뽐내기 위하여 교양을 쌓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일본의 무사도란 사무라이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센고쿠 시대(일본의 전국시대)까지의 사무라이들은 무의 상징이자 권위를 내세우는 하나의 기관으로서 예양과 품격을 체득하고자 문무 정진하고자 하는 자세를 지도자의 본분이라 생각하였고 그러한 사무라이들의 지론이 구체적으로 체헌화 된 것이라고 나무위키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부분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이 가난한 무사와 떡장수 이야기이다. 가난한 무사의 아들이 이웃집 떡집에 놀러 갔는데 떡이 없어진 것을 보고 떡장수는 가난한 집 아들이 먹었다고 이야기하였고 무사는 무사의 집의 명예가 있으며 떡을 훔치지 않았다고 해명하였지만, 떡장수가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기에 그 현장에서 아들의 배를 갈라 이를 증명하였으며 떡장수도 죽이고 무사도 할복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명예를 소중하게 생각하였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들은 기다림이 없었다.
최근 일본과 한국의 입장을 보면서 느낀 감정은 이와 반대다. 한국은 즉시 바로 확인하는 것이고 일본은 끈질기게 기다린다는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일본은 뭉치고, 한국은 흩어진다고 하였다. 일본이 뭉치게 된 이유를 보면 동일한 집단은 전국시대에 살아남기 위하여 ‘소’라는 것을 운영하였으며 ‘소’의 규율을 어길 경우 ‘추방’당하였다고 한다. 집단의 규율을 어겨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말조차 걸지 않았기에 구성원들은 동료들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일본에서 아직도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학교에서 행하여지고 이는 ‘이지메’다. ‘소’에서 영주 등에게 소작료 등을 협상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소’가 중요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은 집단적인 체계는 ‘향약’이 있었으나 동일한 집단이 아니었기에 결속력이 낮았다고 볼 수 있다.
일본과 한국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보다는 근대국가로 발전하면서 상인들의 역할이 있었느냐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시대에 한국은 육의전으로 대표되는 상인들이 있었지만, 일본이나 중국보다 천대받는 직업으로 권력자의 눈총을 벗어나면 지속적인 유지가 어려웠다고 볼 수 있다. 육의전만 있었지 기타의 상인들은 생성되거나 번영을 할 수 없도록 ‘금난전권’으로 억압하였다. 조선에서 난전이 상인으로 등장한 것은 정조 때 ‘금난전권’을 폐지한 이후부터인 것이다. 대동법에 따라 조선에서의 상업이 발달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지만, 한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교역과 교류를 철저히 차단한 사회였다고 할 수 있다. 상업의 발달은 교역과 교류가 원활한 사회에서 가능하였지 차단한 사회는 침체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 시대에는 상업을 장려하였으나 조선은 철저히 억압하였다. 아울러 조선은 이동의 편리성은 적의 침입을 쉽게 한다고 하여 길을 만들지 않았다. 지방과 한양의 교류는 주로 선박을 통하여 이동하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조선 백성의 경우 오가작통법, 호패법 등에 따라 이주의 자유가 완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은 수레 사용을 억제하고 상업의 발전을 의도적으로 억압하고 농업 위주로 경제를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길을 잘 닦아 놓으면 오랑캐나 내부의 적들이 침략했을 경우 불리하다는 주장이 득세하여 좁은 도로가 주였다. 교류라고 하여야 포구에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포구를 벗어난 지역에서는 상업활동이 거의 무시되었고 보부상만이 상인이었고 전달자로서의 역할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산이 많은 지형의 영향으로 옛길을 걷다 보면 고개를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산자락을 이용하면 많은 시간이 소요되므로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고개를 넘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막부시대에는 영주들이 에도막부로 1년에 1번씩 이동하면서 교류가 활성화되었고, 중동 등에서는 성지순례가 있었지만, 조선은 그러한 부분이 거의 없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일본은 상인계급에 대하여 천대를 하지 않았고 전국시대 전쟁 중에도 상인들은 그 역할을 하였으며 막부시대에 영주들이 에도막부로 1년에 1번씩 왕래하면서 이동 경로가 만들어지면서 상업의 기반을 만들 수밖에 없었기에 상업이 발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전시체제에서는 전쟁물자를 공급하는 상인이 중요한 역할을 하며 활발하게 활동을 한다.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을 겪으면서 일본의 급격한 발전을 이룬 것이 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적의 침입으로 인한 전쟁으로 내부는 극심한 피해를 보았지만, 일본과 청은 조선을 공격하기 위한 다양한 물자를 지속해서 공급하기 위한 상업이 있었다고 보면 된다. 반면 조선은 공격보다 수비에 치중하였고 전시물자를 조달하기보다는 약탈당하지 않기 위하여 물품을 보관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조선과 일본은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펼치다가 개방을 한 것이 동일하다. 일본과 한국이 개방 이후 일본은 근대화로 나아갔지만, 한국은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그 차이는 이렇게 본다. 일본은 바쿠후 체제에서 신격화된 천황(덴노)체제로 복귀하면서 하급 무사 계급이라는 신진세력이 있었고 천황 체제로 변화를 겪으면서 단결된 힘을 과시할 수 있었으나, 한국은 성리학의 굴레에서 벗어났으면서도 근대 학문을 이끌어갈 신진세력이 없이 여전히 사농공상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지도체계도 500년간 이어온 왕조에 대한 반감이 가득하였고 이를 단일체제로 이끌지 못한 것이 근대화의 길로 갔고 혼란의 길로 갔다고 본다. 우리가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새로운 체제로 변경되면서 극심한 혼란을 해결하였던 것이나 2008년 새 정부가 들어서고 난 다음 금융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강력한 지도체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또한, 개항 직전 조선은 천주교 탄압에 따라 조선과 서구와의 반목이 극심하였고 일본은 임진왜란 직전에 그러한 혼란을 겪었다. 개항 후 일본은 혼란기에 이를 침탈하는 외부세력이 중국을 침탈하기에 바빴으나 조선은 개항 후 혼란기에 적극적으로 침탈하였기에 우리는 국권을 상실하였다고 본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은 조선통신사를 통하여 지속적인 교류 하였으며, 문화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바쿠후 몰락 이후 일본은 통신사를 통한 교류보다 직접교역을 함으로써 이득을 얻는 것보다 임진왜란 당시와 마찬가지로 정한론이 또다시 등장하여 조선을 침입한 것이다. 일본의 끊임없는 정한론은 식민지 지배를 하였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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