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길 8코스

by 김기만

조비산을 내려오면 갈등이 생긴다.

여기에서 멈출 것인지 아니면 죽주산성을 지나 죽산까지 갈 것인지 고민을 하게 된다. 4시간에서 5시간 정도 걷고 난 다음 아무 생각 없이 걸을 수도 있고 이제는 지쳤으니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용인의 석천리에서 출발하여 아기자기한 마을길을 지나면 봉황이 비상하는 형세의 아름다운 비봉산 숲길로 진입하게 되며, 비봉산 정상에서 과거 궁예의 배후지였던 죽산의 멋진 풍광을 지나면 죽주산성을 마주하게 된다고 안내서에 기록되어 있다.


죽주산성은 신라 때 내성을 쌓고, 고려 때 외성을 쌓았다고 하는데 세 겹의 석성이 지금도 남아있고 보전 상태가 매우 좋다. 죽주산성을 내려오면 매산리로 접어드는데 매산리는 과거 죽산 지역으로 다양한 고려문화재 자원이 남아있어 고려문화의 향기를 진하게 느껴 볼 수 있다.


마을길을 지날 때는 그렇게 힘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비봉산을 오를 때 괜히 더 걸었다고 생각했다. 평지길로 마을길을 지날 때는 그저 그런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는데 비봉산에 접어들면서 쉽지 않다. 사찰이 있는데 가파름이 말할 수 없는데 그곳까지 사찰의 스님의 자동차가 오르내리고 있다. 우리는 사찰의 샘터에서 목마름을 해소하고 휴식을 취하였다. 사찰 뒷산의 비봉산이 어떤 산인지도 모르고 오른다. 사찰의 오른쪽으로 어렵지 않게 능선에 접근하였으나 능선은 370m 남짓이지만 쉽지 않다.


비봉산(飛鳳山)이라고 있다. 전국적으로 분포하며 주로 지방도시의 진산이었다. 조선시대 250여 개 지방 진산 중에서 가장 많은 산 이름이 비봉산이다. 충청도 제천, 경상도 선산·진주·봉화·의성, 강원도 양구·정선, 경기도 안성·화성·안양, 전라도 완주·고흥·화순에도 있다. 전국에 봉황과 관련한 산과 마을 지명은 134개에 이른다는 한 연구결과도 있다. 봉황이 나타나면 태평성대를 이루고 비봉산 아래에는 인물이 난다는 믿음 때문에 생긴 현상이었다. 정말 비봉산 아래의 고을은 번영을 보장받고 귀한 인물이 나는 것일까? 그것은 모르겠다.

비봉산을 오르면 정상이 평탄하다. 내려다보면 죽주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네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산성보다 더 높은 곳에 비봉산이 있고 그곳에서 보면 산성이 훤히 보이는데 저곳에 산성을 쌓았을까 궁금할 뿐이다. 다만, 물이 없다는 단점이 비봉산에 있다.


비봉산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면 바로 죽주산성이다. 죽주산성은 고려시대의 죽산지역의 지명으로 안성에서 영남으로 내려가는 길목이었다고 한다. 그 지점에 성을 쌓았고 그 성에서 고려군은 몽골군을 제압하였다고 한다. 6차에 걸친 몽골 침입에서 고려가 승리한 대표적인 곳이다. 조선시대에도 한양으로 통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인식되어 지속적으로 산성을 보수하여 활용하으며 2001년부터 발굴조사도 연차적으로 실시한 결과 죽주산성은 내성, 중성, 외성 등 3중 성벽으로 구조로 밝혀졌다고 한다. 내성은 조선시대, 중성은 신라시대, 외성은 고려시대 등 축조시기도 규명되었다고 한다.

송문주장군이 이 산성에서 몽골하고 싸웠고 이겼으며, 이를 죽산에서는 많은 부분을 기념하고 있었다. 죽산 입구에 장군의 동상을 세워서 기념하고 있다. 산성에 사당을 세워서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송문주 장군은 1231년(고종 18) 귀주성(龜州城)에서 몽고군의 공격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워 낭장(郎將)에 초수(超授)되었으며, 1236년에는 죽주 방호별감(竹州防護別監)이 되었고, 다음 해에 몽고군이 죽주(竹州)를 공략하자 15일 동안을 싸워 끝내 적을 물리쳤으며, 이때 귀주성 싸움의 경험으로 몽고군의 작전과 장비를 잘 알아 적절히 대응하였으므로, 성안의 사람들이 신명(神明)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몽골군은 충청남도 아산 전투에서 큰 손실을 당하고 패하여 북상하던 중 죽주산성에 이르러 성을 공격하였으나 송문주장군 휘하의 고려군의 저항에 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성안의 고려 군사들은 몽골군이 포를 쏘고 불을 지르며 공격할 때는 방어하다가 일시에 성문을 열고 나가 적을 공격하여 물리쳤다. 몽골군은 성안의 물이 많지 않음을 알고 장기전으로 끌고 가려고 하였으나 송문주장군이 성안에 우물을 파 붕어를 풀어놓으며 심리전을 펼치자 몽골군이 곧 물러갔다고 한다.

고려사 절요에는 이렇게 전한다.

몽고 군사가 죽 주에 이르러 항복하라고 타이르므로 성중의 군사가 출격하여 쫓아 보냈더니, 다시 와서 포를 가지고 성의 사면을 공격하여 성문이 포에 맞아 무너졌다. 성중에서도 포로써 그들을 역공격 하니 몽고 군사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조금 후에 또 인유, 소나무 홰, 쑥풀 등을 갖추어 불을 놓아 공격하므로 성중군사가 일시에 문을 열고 출전하니, 몽고 군사의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몽고 군사가 온갖 방법으로 공격했는데 무릇 15일 동안에 끝끝내 함락시키지 못하고 공격에 사용하던 병기들을 불살라 버리고 갔다.


죽주산성을 내려와서 이제는 죽산으로 진입을 하여야 한다. 도로를 가로질러 내려가다 보면 첫 번째 만나는 것이 두려움을 없애고 소원을 들어주는 태평미륵이라고 한다. 매산리 석불입상은 고려시대 몽고군의 침입을 물리친 송문주장군과 김윤후 장군의 명복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라고 한다.


봄이라 이곳에 동네 계신 분들이 들어오셔서 봄나물을 채취하고 계셨다. 무엇을 얼마나 채취하셨는지 친구가 물었다.

"아주머니 무엇을 채취하세요"

"그냥 쑥, 냉이 "

"이곳이 무엇이에요"

"나도 잘 몰라"

이것에 대한 설명을 찾아보니 "매산리 석불입상은 높이 3.9m의 보살상으로 머리에는 보관(寶冠)이 높이 솟아 있는데, 고려 초기 보살상에서부터 흔히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얼굴은 넙적하고 눈·코·입은 비례가 맞지 않아 독특한 인상을 주고 있는데 이러한 토속적인 얼굴은 높은 관과 더불어 보살상의 시대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듬직하고 우람하게 표현된 이 거구의 보살상은 개태사 석불입상(보물 제219호) 등 고려 초기 석불상들과 함께 당시의 대표적인 석조보살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라고 설명이 되어 있다.


태평미륵의 수인(手印)을 보면 오른손은 두려움을 없애 준다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왼손은 중생의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여원인(與願印)을 취하고 있어 모든 두려움을 없애고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태평미륵을 찾고 있으며, 미륵불의 돌을 갈아먹거나 돌을 떼어 삶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말이 전해지는데, 실제로 미륵불 허리 뒤에 돌을 떼어 낸 흔적이 남아 있어 기자(祈子) 신앙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이제는 죽산으로 들어간다. 마을 입구에서 봉업사지(경기도 기념물 제189호)/ 봉업사지 당간지주(경기도 유형문화재 89호)/ 봉업사지 오층석탑(보물 435호)이 있다.

봉업사지는 죽산면 죽산리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이다. 봉업사(奉業寺)는 양주 회암사, 여주 고달사와 더불어 고려시대 경기도 3대 사찰로 꼽히는 거대 사찰이었으며,『고려사』에 따르면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남쪽으로 갔다가 1363년(공민왕 12) 청주를 거쳐 올라올 때 이 절에 들러 태조의 어진(초상화)에 인사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봉업사가 고려시대 태조 왕건의 초상화를 봉안한 진전사원(眞殿寺院)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봉업사지는 오랫동안 죽산리사지로 알려져 오다가 1966년 경지정리 작업 시 출토된 유물의 명문을 통해 봉업사로 밝혀졌다고 한다.

이제 죽산시내로 들어가서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로 복귀를 한다. 용인을 지나서 안성이다. 영남길은 서울을 출발하여 성남, 용인, 안성, 이천을 지나 진천으로 이어진다.


죽산에서 안성을 거쳐서 평택까지 갈 수도 있지만 오늘은 시외버스를 이용하였다. 일죽 ic가 근처에 있다.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는 곳까지 도착하니 이곳은 카드로 승차권을 구매할 수가 없었다. 일부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현금만을 고집하고 있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여행 시 비상금을 가지고 다녀야 한다. 오늘은 친구 셋이서 비상금을 모아서 승차권을 구매하였다


일죽이 종점이면서 죽산, 안성시내를 거쳐서 평택역까지 운행하는 버스를 이용하는 경우 트래픽 잼을 극복할 수 있다. 아니, 서울 서쪽의 경우에는 시외버스 터미널에 접근하는 시간을 감안할 경우 평택을 거치는 것이 더욱 빨리 죽산까지 접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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