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길 9코스

by 김기만

다시 죽산으로 간다.

영남길중 9코스와 10코스를 하루에 걸어 볼 것이다.

10코스 끝 지점에서 출발하여 9코스 시작 지점인 죽산 터미널에서 종료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역순으로 글을 쓴다. 죽산에서 출발하여 9코스를 끝내는 것으로 한다.


죽산을 가기 위하여 남부터미널이 아니고 전철도 아니고 무궁화를 타고 평택역에 내려서 죽산 가는 버스를 탔다. 토요일 이른 아침에 버스는 거리낌이 없다. 타고 내리는 사람도 거의 없다. 경기도 버스는 타고 내리는 사람이 없으면 그렇게 달린다. 그래서 배차간격이 엉망이 되어 버린다. 앞차에 타고 내리면 뒤차가 근처까지 와버린다. 종점에 거의 동시에 도착한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내가 편한 것을 선택한다. 이것이 정의는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고 내입장만 생각한다. 차를 탄 사람은 빨리 가기를 바라고 차를 기다리는 사람은 정시에 오기를 바란다. 간절한 것은 기다리는 사람인데 기사 아저씨는 차를 탄 사람의 소망에 편승한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이 백만 부 정도 팔렸지만 우리는 정의가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른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것을 보기도 하였지만 내가 갖고 있는 기준이 정의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철학이 무엇이냐가 중요하며 남들에게 그것을 강요하지 않을 때 정의는 구현된다고 볼 수 있다. 전두환 대통령 때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거창한 구호가 있었지만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고 본다. 통치자가 부르짖는 것은 반발을 불러일으킬 뿐이며 통치의 수단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9코스는 죽산 터미널에서 출발하여 병인박해 현장인 죽산성지를 거친다.

영남길 9길인 죽산성지순례길은 천주교 탄압이 극심했던 시기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가슴 아픈 역사를 지닌 길이다. 죽산면 소재지를 출발하여 죽산성지에 이르면 넓고 아름답게 조성되었지만 슬픈 순교성지를 통과하게 된다. 죽산성지를 지나면 일죽면의 넓은 들을 지나게 되는데 멀리 보이는 성당 건축물과 함께 이국적인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장암리, 화봉리, 금산리까지 이어지는 들길은 영남대로 주변에 있던 여러 재미있는 전설과 민담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죽산 관아에서 죽산성지까지 가는 길은 들판이나 처형되기 위하여 걸었던 사람들은 어떠한 심정이었을까 생각해본다. 그저 그 당시 사람들은 유교의 이념이 아닌 이국 종교에 심취하였다는 것으로 삶을 끝내야 했다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과 차이가 없었다. 죽산은 조선시대에 중요한 길목으로서 양지, 용인, 진천, 안성, 음죽, 음성, 충주 등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였다. 그래서 이곳에 도호부가 설치되어 있어 주변지역의 천주교인들을 이곳으로 끌고 와서 처형하였던 것이다.

죽산을 들어서면 기본적으로 우리들은 잘 몰랐던 송문주장군의 동상이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동상처럼 서있다. 죽주산성에 장군의 사당이 있고 면소재지에 동상이 있다.

천주교 4대 박해 중 하나인 병인박해(1866) 때 많은 천주교인들은 현재 죽산면사무소 자리에 위치해 있던 죽산 관아에서 참혹한 고문을 받다가 이곳에 끌려와 순교하였다고 한다. '치명일기'와 '증언록'에 그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만 해도 25명이나 된다고 하며, 순교자 ‘김도미니꼬’는 박해를 피해 깊은 산속에 숨어 살았으나 어느 날 천주교 신자인 것을 안 마을 사람 10여 명이 찾아와 열일곱 살 난 딸을 내주지 않으며 포졸을 데리고 와 가족을 몰살하겠다고 위협하였고 그녀는 여러 가족을 생각하여 할 수 없이 피눈물을 흘리며 딸을 내어 주었다고 한다.


무명 순교자의 무덤을 보면서 우리의 무명용사의 무덤이 생각났다. 조선시대에는 도호부가 있어서 이곳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다른 곳에서 이곳으로 이동하여 참수하였던 것 같다. 사형장이 있던 곳이 성지가 된 것이다. 도호부에서 사형장까지는 2km 정도 되어 끌려가면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인간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모욕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고수하다가 순교의 길을 걸어간 것이며 당시 상황으로 보아 이렇게 밝혀진 순교자 외에도 수많은 무명의 신도들이 끌려와 처형되었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원래 이 부근은 고려시대 몽고의 3차 침입 때 송문주 장군이 이끄는 죽주산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몽고군이 진을 친 곳으로, 오랑캐들이 진을 쳤던 곳이라고 하여 이진(夷陳) 터라고 하였으며 이러한 유래를 지닌 '이진터'는 병인박해 때 '거기로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하여 잊은터가 되었는데 후에 음이 변하여 '이진터'란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도 전해진다

지금은 천주교 성지로 조성하였다.

이제 경기 옛길 9구간은 천주교 죽산성지를 지나면 이제는 전원풍경의 연속이며 축사가 많다.

동네에서 벼를 재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는 대부분 가축을 위한 사료용을 재배하고 있다. 저 넓은 벌판에 이제는 식량이 아니라 가축을 위한 먹이를 재배하고 있다. 가축 먹이가 식량도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주변은 축사이다. 축사가 마을에서 500m 떨어져 있어야 한다. 도심 근처에서 축사는 이제 멀리멀리 가지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축사에서 탄소를 자동차나 공장보다도 더 많이 내뿜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단백질 섭취를 위하여 우리는 가축을 사육하고 있다.

장암마을을 지나면서 갓바위가 있다. 갓은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부에 넘치고 그것에 따라 그것이 복인지 모르고 투덜거리면서 그것을 어떻게 즐기면서 그것을 고맙게 생각하여야 하는데 그것이 남들이 보면 복에 겨워서 하는 소리이고 복이 넘치는 것인데 그것에 대하여 힘들다고 해소방안을 고민하고 이렇게 소원을 빈다.

바위 앞에 놓인 스토리텔링을 보면 이렇다. 소원을 들어준 갓바위라고 한다. 어느 부잣집 며느리에게 매일 같이 찾아오는 손님 때문에 손에 물이 마르지 않으니 이것을 해결할 수 있도록 기도하니 어느 날 스님이 와서 저 갓바위의 갓을 벗겨서 땅에 묻으면 소원을 이룰 것이라고 이야기하니 갓을 떼어내 땅에 묻으니 부잣집이 망하여 손님이 오지 않아 손에 물이 말랐다고 한다. 그래서 소원을 들어준 바위라고 한다. 과유불급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구간에서는 스님들은 소원을 잘 들어주면서 풍수지리를 이용하여 설명을 하고 그에 따라 그 마을은 망하고 집도 망한다. 이유는 모르겠다. 이러한 스토리텔링보다 아름다운 스토리텔링이 좋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대사골 서당에서 축지법을 배운 임경업 장군 이야기를 스토리텔링 이야기가 있다. 임진왜란 때 곽사문(郭嗣文)은 전란을 피해 화봉리 광천마을에 정착한 후 대사골에 서당을 개설하여 후학들을 교육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기골이 장대하고 풍모가 준수한 한 학생이 서당을 찾아와 제자 되기를 청하였는데, 그가 바로 임경업(林慶業) 장군이었다고 한다. 임경업은 날이 갈수록 학문의 깊이를 더해 갔으며 비범하고 출중하여 곽사문은 후에 반드시 나라를 위하여 큰 공을 세울 인물임을 확신하였으며, 곽사문은 임경업에게 천문 지리와 축지법(縮地法)까지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안성에서 이천으로 들어가기 전에 망이산이 있다. 산 정상에 산성이 있다. 이곳이 망이산성이다.

예전에 이곳에 가본 기억이 있다. 그때의 기억을 되새겨본다. 망이산의 팔송나무다. 사실 저 소나무를 볼 수가 없었는데 우리가 한남금북정맥을 산행을 하다가 길을 잘못 들어 일명 알바를 하여 저곳을 본 기억이 있다. 망이산성은 삼국시대부터 조성된 성으로 현재 이를 고증하고 있다고 한다.

문화재청 자료에 따르면 백제 성곽은 산 정상부를 둘러싸고 있는 토성이며, 둘레는 250m 정도로 성벽은 영정주를 사용하여 판축 공법으로 구축된 것으로 확인되었고 성내에서는 다량의 토기류와 철제무기류가 출토되었다고 한다. 조성시기는 한성백제 시기인 4세기부터 5세기 대에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통일신라 성벽은 백제토성을 감싸며 능선을 따라 구축된 포곡식 산성으로 전체 둘레는 2,080m로 대규모에 속하는 산성이며, 장방형으로 4개의 문지와 5개의 치, 다수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고 설명이 되어 있다.


망이산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다.

안성에 축산농가가 이천보다 많다. 가축분뇨 냄새가 장난이 아니다. 하천에는 가축분뇨에 따른 오염이 되어 있고 녹조가 있다. 폐교는 40년 가까이 학생들을 배출하였고 1998년 폐교된 후 출판사의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교정에는 초등학교 졸업생들이 기증한 세종대왕 동상과 이순신 장군 동상이 양쪽에서 지키고 있었다. 40년 넘은 세월을 보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