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아픈 역사가 있는 곳이다.
병자호란이란 역사에서 남한산성은 청나라 대군과 항전한 곳이며 조선의 왕이 한동안 머문 몇 안 되는 성이다.
코로나 19로 인하여 원거리 산행은 대부분 축소되고 근교 산행이다
친구 따라 장에 간다고 하는데 나는 친구 따라 남한산성을 갔다. 하남 검단산에서 출발하여 남한산성까지 10년 전에 걸은 기억이 새롭다. 하지만 오늘은 성곽을 따라 걷기다.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지 처음 걷는 길이다. 남한산성이 복원되고 유네스코에 기록된 것이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유혹하지만 오늘은 옛 자취를 찾아 떠난다
전철로 남한산성입구역에 도착하니 친구는 벌써 도착해 있다. 둘째가 이곳에서 학교를 졸업한 이래 거의 찾은 기억이 없다. 둘째가 이곳에서 학교를 다닐 때 국가고시를 위하여 밤늦게 공부할 때 아비로서 자주 찾았던 곳이다.
총선을 얼마남겨 두지 않아서 그런지 그리고 이곳 시민들이 이곳을 많이 찾아서 그런지 거리유세를 위한 차량들이 즐비하다. 오늘은 친구가 지역 전문가이고 나는 그의 안내에 따라 탐방을 할 예정인 만큼 산성입구에서 친구의 안내를 따라 약수사로 방향을 튼다.
약수사 입구에서 친구는 온 기억이 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다른 기억이 있다. 남한산성이 많은 사찰이 있고 그중에 하나인데 약수사는 조계종의 본부가 조계사가 된 것처럼 여래종의 본원이라 한다.
사찰 입구까지 자기의 염원을 담은 석등이 줄지어 있다. 불경을 돌기둥에 새겨두고 그위에 부처를 놓아두었는데 어는 부처는 머리가 없어진 것도 있는데 머리 대신에 조그마한 돌을 올려놓은 것이 애처롭다.
단양의 구인사 계곡에 사찰이 위치하였지만 약수사는 가파른 언덕에 위치에 있다. 이곳의 주불은 약사여래라고 한다.
구인사와 조계사가 본전인 것처럼 이사찰도 여래종의 본전이라고 한다. 약사여래를 모신 사찰이라고 한다. 힌두교에서도 이러한 예가 있듯이 불교에서도 약병을 들고 있다.
사찰을 벗어나 등산로에 접어드니 등산로는 가파르다. 힘들게 오르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봄꽃이 우리를 기다린다. 털제비꽃이라고 한다.
등산로 주변의 약수터는 언제부터인지 먹을 수 없다. 예전에는 산객들의 목을 축일 수 있는 약수터였으나 이제는 그저 물터일 뿐이다. 이곳의 물터도. 이제는 약수터가 아니다. 대장균 검출로 인하여 음용 부적합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과일을 먹고 손을 씻을 수 있는 좋은 곳이다.
이제 남한산성 옹성에 도착하였다. 옹성은 성을 방비하기 위하여 쌓은 성이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 밖으로 한 겹의 성벽을 둘러쌓은 이중의 성벽을 말하며 남한산성의 옹성은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하고 요충지에 대한 거점 확보를 위해 성벽에 덧대어 설치한 시설물로 다른 성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남한산성에는 5개의 옹성이 있었다고 한다.
제 1옹성에 오른 이후 좌익문으로 이동을 시작한다. 우리는 좌익문, 우익문 등으로 표기하였는데 언제부터인가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라고 한다. 나는 이것이 일제강점기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전승문 지화문 등이 보다 조선스럽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좌익문으로 이동하는데 한 무리의 산객들이 남장대터에 자리를 잡고 막걸리를 꺼내면서 개념이 없게 행동을 한다.
남장대 성 밖의 고목이 아름다운 자태를 보이고 있다.
이제 성을 따라 걷는다. 좌익문까지 성벽의 자태를 보고 성벽이 복원된 모습도 본다
좌익문이 모습을 드러내고 좌익문과 암문 사이에 현대화로 인하여 도로가 놓여 있다. 복원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터널형으로 만들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수문은 있는데 여울은 이동하여 개울이 되어 흐르고 있다.
남한산성이라는 이정표가 그렇게 중요한지 그렇게 크게 만들어 놓았다.
좌익문을 지나면서 남한산 능선으로 이동을 한다. 지금까지는 청량산 능선이었으나 이제는 남한산 능선인 것이다. 행궁을 중심으로 하여 보았을 때 조선시대로 보았을 때 임금의 좌측에 있었으므로 좌익문인 것이다. 이곳을 조금 벗어나면서 친구가 황진이를 만날 수 있다고 하였다. 그곳이 송암정터다.
옛날에는 저곳에 정자가 있었고 멋진 풍광을 자아냈으며 황진이가 금강산에서 수도를 하다가 하산을 하여 이곳을 지나는데 기생들과 사내들이 술을 먹고 놀다가 황진이를 보고 술 취한 사내들이 희롱하니 황진이가 불법을 설법하니 기생하나가 이를 깨우치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 죽었다고 한다. 기생의 한의 소리가 이곳에 사무쳤다고 한다.
멀리 행궁이 보이고 그것을 쳐다본다. 숙종 시절 이곳을 재건하면서 사찰을 5곳이나 건립하였다고 친구가 전하는데 1000년 가까이 이어진 불교문화가 유교사상이 건국이념이었던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유지되었고 기독교가 전파된 후에는 기독교와 불교가 부딪히는 현실을 보면서 아! 하는 생각이 든다. 장경사와 망월사가 있지만 1 산 1사 원칙을 지켜 지나간다.
망월사를 지나면서 벌봉을 항해가는 성을 따라가는 길은 가파름 그대로다. 산성으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하였을 것이다. 가까이에 한봉과 노적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보인다. 이곳에도 옹성이 있다.
옹성을 나가는 암문을 통해나가 보니 햇빛을 쬐고 있는 나무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장경사 쪽으로 접근하는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옹성이다.
옹성을 벗어나서 올라서니 벌봉을 확인할 수 있는 동장대 터다. 개념 없는 누군가가 여기에 물병을 올려놓았다.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으며 건물이 남아 있는 곳은 수어장대이고 이곳은 동장대이다.
병자호란 시절 벌봉에 위치한 청나라군을 직접 보고 이를 지휘하던 최전방관측소이자 지휘소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지금은 느슨한 능선으로 되어 있지만 호란 이전에는 산봉우리와 산봉우리 사이에 안부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청군은 산성을 점령하기 위하여 맞은편에서 이곳을 메우기 위하여 노력하였을 것이고 조선군은 이를 막기 위하여 노력하였을 것이다. 호란 후 봉암성이 되어 남한산성의 외성이 되었지만 당시의 전쟁의 모습이 아련하다.
전쟁 시 적이 이곳에서 성을 관측한 것을 보고 이러한 약점을 해소하기 위하여 봉암성은 숙종조에 축조하였다고 한다.
봉암성은 벌봉 바위성을 한자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남한산성을 탐방하면서 벌봉을 지나칠 수 없어 암문을 통해 벌봉을 오르니 지나가는 산객들이 그곳에서 청 태종이 수어장대를 바라보면서 전쟁을 지휘하였다고 하니 친구가 스틱으로 청 태종 내창을 받아라 한다.
벌 모양을 하고 있는 바위라고 하여 벌봉이라고 한다.
봉암성축조 기념비를 새겨놓은 바위를 지나 다시 본성으로 향한다.
봉암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보고 이제는 전승문으로 간다. 이곳에서는 북문이라고 하지만 전승문이 더 좋다고 본다. 코로나로 인하여 사람들은 근접하지 않고 있다. 전승문을 지나면서 이제 산성 전체를 탐방할 것인지 가본 곳은 생략할 것인지 고민이다. 고민은 쉽게 해결된다. 대화가 지름길이다.
국청사를 거쳐가기로 하고 국청사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국청사 입구에 다다르니 코로나의 영향으로 마스크를 하지 않으면 들어오지 말라고 한다.
국청사 약수터는 물이 참 많다. 이 높은 곳에 이렇게 많은 물이 나오는 약수터가 있다니 천혜의 산성터다.
수어장대 옆에도 우물터가 있다. 하지만 그곳은 빈약하다 아래어정약수터다. 지금은 거의 물이 거의 없다. 임금이 수어장대에 있으면서 물을 마셨다는 곳이다.
아래어정약수터가 수어장대 우물인데 수어장대에 가서 우물 찾았다.
국청사를 지나서 우익문에서 성 밖으로 하여 수어장대로 이동을 한다. 수어장대는 장대 중에 유일하게 건물이 남아 있는 장대이다
정부 초기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한 후 공원화 사업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기념식수를 하였고 그 나무가 60년이 넘어서는 수령이다. 내 나이보다 많다.
이제는 끝을 내어야 한다. 남문이라고 하는 지화문으로 이동한 후 산성입구로 나가면 남한산성을 탐방을 마친다. 지화문으로 가면서 성곽의 아름다운 모습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지화문에서 마지막 인증샷을 남긴 후 통상적으로 하산하는 코스가 아닌 다른 코스를 찾아 하산한다.
하산하면서 여성 산객 4명의 수다를 엿들으면서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남성은 하나의 주제를 그렇게 오래갈 수 없는데 30분 이상을 하나의 주제로 수다를 떨 수 있다는 것에 감탄을 한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드라마다 나는 사실 드라마를 즐겨보지 않아서 그 드라마를 알지 못하지만 짐작은 간다. 자목련이 있는 사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