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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기만 Aug 08. 2023

예산, 서산의 가야산 이야기

더위가 계속된다.

아침부터 열기는 하늘을 덮고 있다.

태풍이 올라오면서 열기를 한반도로 보냈고 시베리아 쪽 찬 공기는 열기를 더 이상 못 올라오게 만들고 있어서 한반도는 열기로 가득하다. 이 와중에 한국에서 잼버리가 열리고 있는데 이것에 대한 준비부족을 누구나 이야기한다. 이렇게 열기가 가득한데 잼버리 대회를 연다고...


그리고 그것을 이 더운 여름에 개최한다고 비난한다. 알지도 못하면서 그것에 대하여 비난을 위하여 비난을 하는 것이다. 세계의 학생들은 7월 말 8월이 되면 여름학기가 끝이 나고 새로운 학기를 시작하거나 새로운 학년이 되기 위하여 방학에 들어가고 그때 잼버리 대회가 열리는 것인데 그것을 9월에 개최하라고 한다....


더위에도 산을 간다.

이른 아침 집을 나선다.

그리고 산아래 도착하였는지 주차장은 벌써 절반이 자동차로 메워져 있다.

그리고 바로 앞에 온 자동차도 벌써 산을 가기 위하여 준비를 하고 있다.

나도 그들을 따라 준비를 하고 산으로 간다.


오늘은 가야산이다. 가야산 하면 우리는 합천해인사가 있는 산이 생각이 나는데 충청남도에도 가야산이 있다. 충청남도 예산군과 서산시의 경계에 있는 산이 가야산이다. 산 위에서 보면 서해안이 보이는 산이 가야산이다.  가야산은 서산시, 예산군 및 홍성군에 걸쳐 있으면서 남북 방향으로 뻗어 있는 가야산맥의 주봉이다. 가야산에는 주봉인 가야봉[677.6m]을 중심으로 원효봉(元曉峰)[677m], 석문봉(石門峰)[653m], 옥양봉(玉洋峰)[621.4m], 일락산[521.4m], 수정봉[453m], 상왕산[307.2m] 등의 봉우리가 연결되어 있다. 특히, 석문봉은 가야산 봉우리 중에서 가장 바위가 많은 곳으로 대문처럼 서 있는 바위가 있다.


가야산의 명칭과 유래등을 찾아보기 위하여 가야산에 대한 설명자료를 먼저 찾아보았다.

예산군 문화를 설명하는 자료"가야산은 백제 때 상왕산이라 불렀으나 신라 통일 이후 산 밑에 가야사(伽倻寺)라는 십리지관(十里地官)의 큰 절을 세우면서 가야산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가야산의 지명 유래를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가야산은 본래 붓다(Buddha)가 깨달음을 이룬 붓다가야(Buddhagayā)의 서북쪽에 인접한 산을 의미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호산록(湖山錄)』에 “가야산이라는 이름은 본래 불서 가운데서 유래된 것이다.”라는 언급이 있는데, 이는 가야산 지명이 불교와 관련이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가야산은 백제 때 상왕산이라 불렸는데, 신라 통일 후 이 산 밑에 가야사를 세운 뒤 가야산이라 하였다고 전해진다.”라는 주장도 가야산 지명의 불교 관련설과 관련된 것이다. 부연하면, 가야(伽倻)라는 산 이름은 불교에서 신성시되는 코끼리, 즉 상왕(象王)의 범어(梵語) 카야(Kaya)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그러나 가야산 자락에는 개심사, 일락사,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등 불교 유적이 자리하고 있어, 가야산 지명의 불교와의 관련성을 보여 준다. 가야산을 흔히 ‘호서 불교의 성지’라고도 하는데, 이 역시 가야산의 지명 유래가 불교와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라고 디지털예산문화대전(http://yesan.grandculture.net/yesan/toc/GC06600023)에 설명되어 있다.

산행길은 다양하다고 하는데 그중 많은 사람들이 찾는 코스로 산을 오른다. 주차장에서 옥양봉을 오르고 석문봉을 지나 가양봉을 간다. 그리고 헬기장에서 계곡을 따라 하산하는 코스롤 이동을 할 예정이다. 그래도 중간중간에 있는 문화재도 탐방을 할 예정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코스를 가는데 앞서가는 사람들이 주저주저한다. 그래도 나는 씩씩하게 걸을 뿐이다. 길이 벗어나는 것도 아니고 옥양봉을 오르 것이 힘들겠지만 그리고 나면 능선길을 따라 오르고 내리면 되는 길이다. 이동을 하면서 삼가리에 있는 미륵불을 본다. 신기하게 계곡 앞을 보지 않고 계곡 쪽으로 서있다.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처음 보는 형태다. 대부분이 계곡 앞, 올라오는 사람들을 보고 서 있는데 그렇지 않다. 옥양봉을 가는 길이 아닌 오른쪽으로 백제의 미소길이라는 길을 따라 걷다가 보면 나타난다. 그리고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등산로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은 것 같아서 오늘은 사양하고 옥양봉으로 가는 길로 돌아서 간다. 화장실이 있고 그것을 지나 임도를 만난 후 왼쪽으로 방향을 전환을 하니 옥양봉, 석문봉으로 가는 길이 나타난다.


옥양봉 아래쪽에 있는 관음전까지 가는 임도가 있어서 그런지 등산로가 너무 좋다. 길을 따라 걸으면서 OFF-ROAD자동차가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쉽게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4륜구동 화물차가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가파르지 않고 오르고 오를 뿐이다. 이제 임도가 끝이 나고 관음전으로 가는 물품을 이송하는  모노레일 레일이 보인다. 이제는 가파름이 그대로 시작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스님들도 이곳까지는 자동차로 물품을 옮기고 이곳에서부터는 모노레일을 이용하여 물품을 운반하는 것 같다. 옛날에는 삼가리에서부터 물품을 지고 관음전까지 옮겼을 것인데 문명의 이기를 제대로 이용하는 것 같다. 옛날에는 그것이 수행이었는데 지금은 노동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좀 더 편리하게....

가파름이 시작되는 지점에 앞선 등산객들이 가파름 언덕을 올라서기 전 휴식을 취하고 오르기 시작한다. 그들 뒤에서 천천히 따라가고 있는데 그들이 처음에는 이야기를 하였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길 뿐이다. 친구 J와 친구 H가 생각이 난다. 셋이서 등산할 때 친구 J는 조용히 발을 옮기는데 나와 친구 H는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 산을 오르 내내 이야기를 한다. 친구 J가 그 힘이 어디서 나는 것인지 궁금하다고 한다. 산을 오른다. 데크도 있다. 도립공원으로 관리되고 있어서 그런지 등산로는 잘 정비되어 있다.

너른 바위에 도착하였다. 선행하였던 등산객들을 모두 추월하고 나 혼자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면서 멀리 있는 가야봉을 쳐다본다. 가야봉 정상에 있는 철탑들이 주변에 모든 것을 제공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주변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만큼 그곳에 무엇을 설치하여 모든 것을 주고 있다. 옥양봉을 오르면서 더위는 점점 강해지고 있는데, 쉬흔 길 바위를 오르기 전 계곡을 들어서는 순간 가파름이 더욱 심해졌지만 갑자기 서해안의 바닷바람이 정상을 넘어서 계곡을 휘감고 내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해발이 550m를 넘어서 그런지 시원한 에어컨이 있는 계곡이다. 너무 시원하다. 밀양 얼음골에서도 이런 맛은 없었고, 제천의 얼음골에서도 이런 맛은 없었다. 시원한 에어컨이 있는 계곡을 50m 정도 오르면 쉬흔 길 바위를 만난다.

쉬흔 길 바위란 '쉰 질'은 '쉬흔 길(50길)'의 충청도 사투리로 매우 높다. 혹은 매우 깊다는 뜻으로 매우 높고 우람한 바위를 쉰길바위라 부른다고 설명이 되어 있다. 이 쉰길바위는 일명 '장수바위'라고도 한다고 하며, 옛날 어마어마한 큰 장수가 이곳에서 한 발자국을 남기고 삼가리 주차장 바위에 한 발자국을 남겼다고 한다. 하지만 삼가리 주차장 부근 바위는 깨어져 흔적이 없어졌다고 한다.


해발을 20m 정도 오르면 이제 옥양봉을 다 오른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삼거리가 나오는데 그전에 아내를 내려다보면서 아래를 사진으로 그대로 담는다. 그리고 삼거리에 있는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할 뿐이다. 옥양봉은 하얀 바위가 그대로 보이고 하얀 옥이 있는 봉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내려간다. 내려가기 전에 있는 데크에서 내가 가야 할 가야봉까지의 산세를 보고 오른쪽의 서산의 모습을 본다. 이웃한 해미읍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천수만을 거슬러 올라온 왜구들이 해미읍성까지 침입하였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 그렇게 바다가 가까워 보인다. 그리고 석문봉을 간다.

오른쪽에 바다가 있어서 그런지 해발이 600m 정도 되지만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서 그렇게 덮지 않다고 느끼면서 걷는다. 이 길이 금북정맥이라고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걸은 흔적이 있다. 친구 H가 있었다면 금북정맥을 걸은 무용담을 이야기하겠지만 나 혼자 걷기에 세상은 조용하다. 그리고 가끔씩 지나가는 등산객들이 있어 서로 인사하면서 지나갈 뿐이다. 가양봉으로 올라선 사람들이 옥양봉으로  벌써 왔다.  나보다 1시간 이상 일찍 시작한 사람들이다. 여름날 산행은 일찍 시작하는 것이 최선이다. 이글거리는 태양을 그대로 몸으로 체험하면서 걸을 필요가 없다고 본다.

이제 석문봉이다. 가야산 줄기에서 암릉이 가장 많은 봉우리라고 한다. 내가 사진을 내 짝꿍에 보냈는데 그것을 아는지 옥문봉에서 더운데 천천히 다니라고 하더니 석문봉을 보내지 않았는데 조심하라고 한다. 석문봉은 석문이 있어서 석문봉이 아니고 정상부근의 암릉들이 석문처럼 생겼다고 하여서 석문봉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돌탑이 있다. 그리고 가야봉까지는 40분 정도 걸린다는 이정표가 있다. 가야산에서는 재미있게 이곳에서 옥양봉까지 얼마 정도 걸리고 석문봉까지 어느 정도 걸린다는 이정표가 곳곳에 있다. 그리고 주차장으로 가는 길이 곳곳에 있다.

석문봉에서 가야봉으로 가면서 소원바위를 만난다. 소원바위에 무엇인가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곳에 이렇게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국가를 위해 소원 한번, 가족을 위해 소원 한번, 친구를 위해 소원 한번, 나를 위해서 소원 한번 빌어보세요. 그 어떤 것이던 간절한 마음으로' 누군가가 소원을 빌면 이루어 지기를 바라겠지만, 나는 지나간다. 다만 오늘 산행이 무사히 안전하고 무사하게 끝나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거북바위를 만난다. 이곳의 거북바위는 쉽게 찾았다. 내가 대전의 갑하산을 걸으면서 거북바위를 못 찾아서 오르고 내리 고를 두 번이나 한 기억이 있지만 이곳의 거북바위는 그 모양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서 그런지 쉽게 찾았다. 거북바위는 어느 곳에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제 가야봉을 바로 300m 남겨두고 주차장에서 올라오는 길이 있는 삼거리에서 쉼터를 지키고 있는 바위에 앉아서 소나무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조금 지나서 가양봉을 오르는 인공구조물을 담는다.

 정상은 철탑들이 있고 등산객들은 그 옆에서 정상을 만끽하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 정상석이 있다. 서산에서는 가야산이라고 정상석을 산악회 명의로 만들어 두었고 예산에서는 가야봉이라는 정상석을 만들어 두었다. 산악회 명의의 정상석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바위 위에 위치하고 있다.

어르신 부부가 와서 내 모습을 담아 준다. 그분들은 어떻게 올라왔을까 궁금하였는데 30분도 되지 않아 그것을 확이하였다. 철탑 바로 아래까지 도로가 있어서 그 길로 자동차가 올라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로 가는 길은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나는 헬기장을 찾아 가는데 길을 잘못 들어서 도로가 있는 길로 들어섰고 그 어르신들을 그곳에서 다시 만났다. 헬기장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은 조금 더 내려가서 가야 하는데 도로가 있는 길로 가는 등산로가 있어 그 길을 들어선 것이 잘못된 것이었다. 나는 돌아서서 가는 길도 있지만 그 아스팔트로 된 길을 30분 정도 걸어서 내려가 헬기장으로 갔다. 그렇지만 그 길에서 위를 쳐다보니 멋있는 경치도 보았다.

아스팔트 길이 그래도 오전이라 열기를 내뿜지 않아서 견딜만하였다. 그리고 천천히 내려가는 길이라서 어렵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헬기장에 도착하여 이제는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헬기장부터 주차장까지 3.3km 정도 되며 가파름도 없다. 쉽게 내려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내 무릎이 편안함을 그대로 느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산길로는 제격이었다. 내려가면서 낭만은 없었다. 그리고 가야봉을 오르는 삼거리를 지나고 변산바람꽃이 있다는 계곡에서 얼굴도 씻고 족욕도 하고 내려간다. 그곳을 지나서 얼마 안 되어 산은 끝이 나고 도로다. 그리고 휴양지다. 사람들이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삼가 저수지에서 전체를 보면서 사진으로 담는다. 삼가저수지 가야산 전체가 들어가 더위를 식히고 있다. 그래서 산이 시원하였을 것이다.

이제는 마지막이다.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가 이곳에 있다. 원래는 이곳이 아닌 경기도 연천에 있었는데 대원군이 집권한 후 이곳으로 이장을 하였다고 한다. 흥선 대원군이 그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풍수지리설에 따라 길지(吉地)에 이장하였으며, 무덤을 쓰기 위해 원래 있던 절에 불을 지르게 했다는 소문은 민간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사실 그곳에 가야사지가 있고 그것을 발굴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 묘를 이장하여서 그런지 1868년(고종 5) 독일 출신의 상인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가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도 있었고 그것을 국사시간에 배운 적이 있다. 


남연군묘 도굴사건은 실패하였다. 독일인이 도굴하여 조선의 개항을 도모하려고 하였다고 하나 그 여파는 무척이나 커져서 외교문제로 대두되었고 조선의 개국은 그만큼 늦어졌다고 문화재청의 자료는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천주교 신자들과 같이 동 사건이 기획되어 천주교 박해가 이때 다시 가일층되었고 오페르트가 수차 내항했던 내포(內浦) 일대를 중심으로 한 충청도 지역에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당하였다고 한다. 이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천주교 박해도 희미해졌을 것이고 조선의 개항도 빨라졌을 것이라고 본다.


남연군의 묘도 지난 폭우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묘소 주변을 싸고 있는 흙들이 무너지고 있는데 그것을 복원하지는 못하고 비닐로 더 많은 물들이 들어가지 않게 보호하고 있다.

남연군묘가 이곳까지 오는 과정에 사용하였던 상여가 있는데 그 상여의 복사품이 이곳에 있다. 그리고 그것을 보호각을 만들어 보관하고 있다. 상여의 진품은 현재 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라고 본다. 이곳 사람들은 상여와 함께 농토를 하사 받아 풍요롭게 살았기에 그 상여와 묘역을 잘 관리하였을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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