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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기만 Nov 07. 2023

내연산 그리고 12 폭포

우리는 이런 말을 배웠다.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 불역낙호(不亦樂乎)는 "멀리서 친구가 찾아오면 이와 같은 즐거움이 없다고 하였다" 우리는 그 친구가 되어서 멀리 있는 친구를 찾아간다.


친구가 멀리 있고, 근처에 산이 있다. 친구도 찾고 산도 찾는다는 개념으로 산을 갔다.


동쪽 끝에 있는 산으로 간다. 서울에서는 멀고 어디에서나 접근성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포항 하면 우리는 포항제철이 생각난다. 인근에 산이 있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다.

친구가 포항에 있다. 친구를 만나고 회포를 풀고 산으로 가기로 하였다. 전일 휴가를 내고 서울에서 내려온 친구를 픽업하여 포항으로 간다. 3시간을 달려서 친구가 퇴근하는 시간쯤에 도착하였다. 친구를 기다리면서 영일만대 해수욕장을 산책해 본다.  도시에 해수욕장이 있는 곳은 부산과 강릉 그리고 포항일 것이다. 도심을 배경으로 하고 그 옆에 해수욕장이 있다. 부산이 매력적인 이유는 바다가 있고 해숙욕장이 있다는 것이다. 아파트가 있고 그 옆에 바다가 있다는 것은 어쩌면 행운아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영일만 해수욕장은 예전에는 포항북부해수욕장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는데 2013년부터 영일대 해수욕장으로 불리어졌다고 한다. 영일대 해수욕장에는 영일대라는 정자가 있다. 인근에 울릉도를 가는 여객터미널이 있고 하여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만을 반대쪽에 있는 포항제철의 야경을 볼 수 있다.

친구를 보고 포항의 야경을 보고 회포를 푼다.

회포를 풀면서 이곳의 호미곶에 대하여 이야기가 주인공이 되었다. 호미곶은 호랑이 꼬리 곶이라는 의미다. 일제 강점기 시절 토끼꼬리로 변화였는데 그것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안주가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쉽다. 조선시대부터 호미곶이었으면 하였는데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에 아쉽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렇다. " 조선 시대 호미곶을 관할한 장기군에서 유래하는 장기곶(, 또는 동을배곶(冬乙背串)이었으며 일제강점기 때 이름은 장기갑(長鬐岬)이었다. 2001년 12월 지금의 이름인 호미곶으로 변경되었다. 조선의 풍수지리학자 남사고(南師古)가 《동해산수비록(東海山水秘錄)》에서 한반도는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모양으로 백두산은 코, 이곳을 꼬리에 해당한다고 묘사하고 명당으로 꼽았다.'(출처 : 나무위키). 다만, 영일(迎日 : 영일군, 영일만 등)이란 이름은 모두 '해돋이/해를 맞이한다'는 뜻으로 이곳은 옛날부터 해돋이가 유명하였다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근래에 포항에서 유명한 곳이 있다고 한다. 친구가 우리에게 도착하면 그곳을 가라고 하였지만, 우리는 바다를 보기 위하여 포기한 곳이다. 그리고 그곳은 고소공포증이 없어야 한다. "포스코가 기획·제작·설치하여 포항시민에게 기부한 국내 최대 규모 체험형 조형물 스페이스 워크 관람객이 바라만 보던 작품, 만지면 안 되는 작품에서 직접 작품 속으로 걸어 들어가 예술과 관객이 하나의 풍경이 되는 조형물로 국내에서 보기

힘들었던 새로운 개념의 체험형 조형물"인 환호공원 스페이스 워크다. 우리는 영일대 해수욕장에서 조망만 하였다.  친구는 아직 100%를 걸어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나도 다음에는 이곳을 방문하여 걸어보리라.

출처 : 스페이스워크 홈페이지(https://www.spacewalk.or.kr/) 캡처

그리고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였다.


아침에 일어나 내연산으로 간다. 아침부터 서두르는 친구를 따라 늦지 않기 위하여 서두른다. 배낭 속에 점심에 먹을 것을 챙기고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으니 우산도 챙긴다. 우산뿐 아니라 비옷도 챙기는 친구를 보고 우리는 가파른 지점이 아닌 곳에서 비가 시작되기를 기도한다.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아침잠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핑계다. 50대 아저씨들은 전립선비대증으로 일찍 일어날 수밖에 없고 다시 잠들기 싫어서 깨어있어서 아침잠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다시 잠드는 버릇을 만들어 보아야겠다. 그 잠드는 버릇이 없어서 오전은 몽롱해지는 것이다. 농부들은 머리가 몽롱해도 육체노동을 하니 문제없는데 정신노동을 하는 사람은 문제가 있다. 나는 그 버릇을 만들고 있다. 6시 전에는 잠자리에서 나오지 않기다.


그런데, 50대 아저씨 셋이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 그리고 아침밥은 이동하면서 7번 국도 어디쯤에 있는 식당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보온병을 뜨거운 물을 넣고 컵라면을 챙기고 빵도 챙기고 과일도 챙기고 자동차로 출발을 한다. 7번 국도를 가면서 마을이 있으면 60km, 마을을 지나면 80km로 간다. 제주도에서는 50km까지 떨어졌는데 여기는 그래도 60km다.  내연산이 있는 보경사가 천년고찰이고 내연산도 관광명소인 관계인만큼 신호등으로 이를 제어할 수 있는 것이 한계가 있는지 신호등으로 제어하던 교차로를 이곳에서는 IC를 만들어 놓았다.


내비게이션의 목적지는 보경사 주차장이다. 보경사 주차장이 있지만, 친구들이 좀 더 들어가자고 한다. 그곳에 있는 온천 사우나가 있고 그곳에 주차요금이 4000원이라고 하여 자동차를 몰고 주차장 입구까지 도착하였는데 잘못 보았다. 14000원이었다. 앞에 있는 1만 원을 보지 못한 것이다. 이웃한 음식점 주차장은 무료이지만, 우리가 등산을 하고 음식을 먹을 것도 아니고 아침 일찍부터 문도 열어놓지 않고 있어서 검토대상에서 제외하였다.

자동차를 유턴하여 유수지 바로 옆에 있는 도로가에 주차를 시키고 산으로 간다. 보경사는 산행을 한 후 탐방하기로 하고 산으로 간다. 보경사 앞에 있는 화장실에서 산으로 가기 전 모든 것을 털어 버리고 간다. 속세를 떠나 산사로 들어가기 위하여 준비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모두 떨쳐 내지 못하고 그것이 무엇이 중요하다고 가지고 떠났다. 그것을 삼지봉까지 가지고 갔다. 삼지봉에서 떨쳐내고 그곳에서부터 가볍게 움직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친구들은 산행지도를 보고 보경사 오른쪽으로 하여 능선으로 올라가자고 하지만 나는 아니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가 문수암을 거쳐서 올라간 후 문수봉을 오르는 코스를 제안하였다. 친구들은 내가 내연산을 두 번 정도 오른 것을 인정하고 문수암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였다.


친구의 사무실에서 가을을 맞이하여 가을을 만끽하는 사진 경진대회를 개최한다고 하였다. 우리들 모두들 그 사진 경진대회에 참석하는 것처럼 사진에 심혈을 기울였다. 내연산 계곡의 문수봉 갈림길까지 이곳저곳을 담았다. 문수암을 가기 전 계곡에서 돌탑을 쌓고 그것의 백미인 마지막을 올리는 사진도 담고 인공적인 요소도 가미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내연산 계곡의 그 맛을 사전적으로 즐겼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문수봉 갈림길에서 문수암으로 방향을 잡고 오른다. 문수암을 오르면서 지금까지 편안한 길을 멀리 보내고 가파른 길로 들어선다. 앞에 등산객이 있다. 그들은 우리보다 더 잘 걷는다. 좌우로 들어선 소나무들이 우리에게 내연산의 계곡을 숨겨두고 있다가 조금의 여유를 준다. 이곳에서 가파르게 올라온 숨도 들이키고 내연산의 그 멋진 경치를 사전적으로 즐긴다. 멀리 선일대의 정자도 보고 계곡에서 유유히 흐르고 있는 상생폭포도 사전적으로 감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등산은 경치를 즐기는 맛과 오르막을 오르는 맛에서 한다고 한다. 그 맛을 그대로 느끼면서 문수암에 도착한다. 조그마한 산골집 같은 암자가 문수암이다. 보경사를 지나올 때 해탈문을 지났고 문수암 암자 앞에 있는 산문은 머리를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도록 문설주가 낮다. 누구나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 월악산의  마애불에 있는 샘터도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만 물을 마실 수 있는 구조라 자연스럽게 공손하게 되는데 이곳도 동일하다. 그리고, 문수암은 암자인데 별도의 대웅전이 있다. 요사체 앞마당에서 보면 동해가 보인다. 그 동해에서 뜨는 일출을 매일같이 볼 수 있는 곳이 이곳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문수암도 보고, 숨도 들이키고, 체력도 안배하고 하면서 문수암 암자 앞의 산문 앞에서 너도 나도 쉬고 있다. 그리고 조그마한 산문을 담고 있다. 아직 문수봉까지는 40분이나 더 남았다. 이제는 바로 오르거나 능선 쪽으로 이동을 하여 오르거나 하여야 한다. 우리는 체력을 비축하여야 하므로 30m를 더 가더라도 능선 쪽으로 방향을 잡고 올랐다.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지만, 이 시간의 예보는 1mm 내외이므로 무시하고 간다. 아직 비도 오지 않았고 멋진 경치도 있다. 가을이다. 그 가을이 남쪽에서 아직도 우리에게 단풍을 보여주고 있다. 해발 4-500m 지역에는 낙엽도 없이 곱게 단풍이 물들어 있다. 싸리나무에서 노랗게 물든 것이 이렇게 예쁘게 보인 것은 처음이다.  

소나무 군락지가 있고 그 군락지 사이를 지나가는 등산객의 모습이 예술이다. 그 예술적인 모습을 사진으로 담고 또 우리도 연출을 해본다. 오늘 사진을 출품하면 순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임도를 만났다. 보경사 오른쪽에서 시작한 임도가 굽이굽이 돌아서 이곳까지 온 것이다. 그렇게 힘들지 않게 올라올 수 있는 길이다. 임도를 벗어나 문수봉 정상으로 향한다. 그렇게 감흥은 없지만 정상으로 향하는 발길은 뿌듯하다. 오늘 오를 봉우리가 문수봉, 삼지봉, 향로봉 그리고 이름 없는 봉우리가 몇 개일 것이다. 힘들게 올라왔고 첫 번째 봉우리를 지나는 것이다.

문수봉 정상이다. 정상이라고 하여서 뾰족하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중에 가장 높은 곳에 정상석이 있다. 이제는 삼지봉으로 향하는 것이다. 조망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삼지봉으로 가면서 H가 왜 올라왔지 그냥 임도를 따라갔으면 편안할 것인데 하면서 투덜거린다. 그 투덜거림은 언제나 똑같다. 우리가 가지 않았다면, 본인이 먼저 정상을 갔을 것이면서 한 번쯤 투덜거리는 것으로 간주한다. 문수봉에서 삼지봉까지는 그렇게 힘들이지 않고 걷는다. 왼쪽으로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수시로 나타난다. 그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가파르게 올라온 것인 만큼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삼지봉을 600m를 남겨두고 은폭포로 내려가는 길이 주 등산로이다. 삼지봉까지 가는 사람들은 다시 돌아와서 이곳으로 하산을 한다. 나도 2번인가 왔는데 이곳으로 하산을 하였다.

삼지봉으로 가는 길이 너무 좋다. 앞에 가는 사람들 뒤를 따라가면서 낙엽 속에 걷는 모습을 담는다. 그리고 그 모습이 너무 좋다. 그리고 큰 비가 오지 않았고 포항 근처라 큰 추위도 오지 않아서 해발 600m 근처는 단풍이 너무 좋다. 삼지봉은 갈림길이라는 뜻이다. 그 삼지봉에서 향로봉으로 갈 수도 있고 동대산으로  갈 수도 있다. 이곳에서는 나는 가벼워졌다. 그 가벼움이 향로봉까지 부드럽게 갈 수 있었을 것이다. 배낭 무게를 줄이기 위하여 너도 나도 배낭에서 먼저 꺼낸다. 이것이 단체 산행의 묘미다.


삼지봉은 711m, 향로봉은 930m인데 내연산을 가리키는 지도상의 표지는 삼지봉을 가리키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까지 왔다가 은폭포로 내려가지만 우리는 향로봉으로 간다. 향로봉으로 가는 길은 조금씩 오르면서 3km 정도를 걷는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된 이유는 삼지봉 바로 아래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산은 무서운 것이다. 산을 올라갈 때에도 준비를 철저히 하고 겨울산은 특히 눈이 날리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민주지산에서도 예전에 특전사 군인이 사망한 것을 보면 누구에게나 위험한 것이다.

향로봉으로 향하면서 우리 앞에 있던 등산객이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났다. 삼지봉에서 휴식을 취하였다고 한다. 그분들에게 길을 물으니 향로봉까지는 가지 않고 중간에 내려간다고 하였다. 그분들은 산악회를 운영하는 분들로 산을 즐기고 있었다. 사전에 답사를 하면서 산악회 회원들이 편안하게 등산하기를 바라고 있다. 통관봉을 지난다. 정상석은 없고 누군가가 나무에 정상표지를 해 놓았다. 해발이 높아진 만큼 단풍은 없고 낙엽만 있다. 우리는 낙엽을 발고 지나가면서 떨어져 있는 향로봉 이정표를 바로 세워본다.

향로봉을 바로 앞에 두고 정자가 있다. 향로봉은 정상에 헬기장이 있고 정상 오른쪽과 왼쪽에 정자가 있다. 정자마다 등산객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제는 하산이다. 그리고 멋진 경치를 다시 감상을 할 것이다. 시명리라는 예전에 화전민 마을까지 바로 내려간다. 930m에서 400m까지 내려가야 하므로 무릎도 조심해야 하고 낙엽도 조심하여야 한다. 그러한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갈 뿐이다. 내려가면서 이 길을 올라오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오르는 길은 오를 수 있지만 내 짝꿍은 이 길을 내려가는 것을 싫어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르는 길은 힘들더라도 오를 수 있지만, 가파른 길을 내려가는 길은 무릎도 그렇고 허리도 그렇고 하여서 싫어한다.


시명리를 2-300m 남겨두고 있는 지점에서 오르는 등산객이 있다. 그 오르는 등산객이 우리에게 물어본다. 얼마나 올라야 하는지를 우리는 1시간 30분 정도 올라야 한다고 이야기하면서 지금 시간에 오르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H가 오른 후 삼지봉까지 가는 길 중간에 계곡으로 하산하는 길이 있다고 하니 그분이 오른다. 하지만, 오후에 비예보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오후 3시에 비예보가 있었고 우리가 그분을 만난 것이 2시가 지난 시점이었다. 그분이 산을 오르면서 우리를 원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본인이 결정을 한 것이다. 본인이 결정을 하고 본인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산행인 것이다. 누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가 공룡능선을 걸을 때 힘들어하면서 "누가 옮겨줄 것도 아니니 걸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시명리에 도착하였다. 예전에 화전민들이 살았던 마을이라고 한다. 이 깊은 계곡에서 어떻게 살았을 까 궁금하다. 내연산의 계곡은 깊고 우리가 내려온 향로봉은 가파른데 화전민들이 화전을 만들 땅도 마땅치 않아 보였는데 반대편에서 화전을 일구고 살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뒤쪽의 향로봉을 배경으로 하고 앞으로 난 계곡 사이에서 화전을 일구고 살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비가 오기 시작한다. 3시부터 온다는 비가 온다. 우리는 비가 온다는 예보에 따라 우의도 준비하고 우산도 준비하였는데 향로봉을 내려올 때 비가 오지 않은 것에 감사를 하면서 비를 맞으면서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서 내연산 12 폭포를 즐기기로 하였다. 이제 우의도 입고 우산도 펼치고 있는데 반대편 능선을 종주한 사람들이 내려오고 있다. 힘들다고 하면서 우리 보고 힘들게 내려왔다고 한다. 우리와 합치면 산을 완전히 원형으로 종주한 것이다.


제일 먼저 접한 것이 12 폭포 중 제12폭인 시명폭포다. 등산로에서 120m를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야 한다. 시명폭포는 시명리에 있는 폭포라는 의미다. 반대쪽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그 폭포를 지나친다. 우리는 처음 왔고 다시 올 기회가 거의 없다고 생각하여서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시명폭포를 보러 내려가면서 감흥을 기대하였는데 실망을 하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것을 폭포라고 정의하기에는 그렇다고 하였다. 그리고 계곡을 내려갈 때에도 조심하여야 하고 올라올 때에도 조심할 정도로 좋지 않은 길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제12 폭에서 실망하고, 제11 폭을 어떻게 고민하고 있는데 제11 폭인 실폭포가 나타났다. 제11 폭은 300m 정도 계곡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실망을 하였지만 제12 폭을 보았으니 제11 폭로 발길을 돌렸다. 우리들의 발길을 잡은 것은 데크로 정비가 잘되어 있다는 것이다. J가 이야기하기를 하늘에서 폭포 떨어지고 계곡에서도 폭포가 떨어진다고 하였다. 실폭포를 오르는 마지막 계단 앞에서 또 올라가야 하나 하면서 폭포를 보고 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마지막 데크 계단을 올라야만 하였다. 시명폭포에서 실망을 하였지만 실 폭포에서는 감동을 받았다. 실폭포는 물줄기가 마치 비단실처럼 가늘고 고와서 '실폭포'라고 불린다

제10 폭과 제9 폭은 복호 2 폭포, 복호 1 폭포라고 하였다. 호랑이가 이곳에 곧장 출몰하여 바위 위에 엎드려서 쉬고 있다는데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시명폭포로 내려가는 길이 험난하였는데 복호 2 폭포를 내려갈까 하다가 멀리서 카메라 기술을 이용하여 당겨서 구경을 하고 복호 1 폭포로 이동을 하였다. 복호 1 폭포로 내려간 후 사진을 담고 다시 올라선다. 복호 2 폭포는 전망대에서만 구경을 하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복호폭포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다고 친구 H가 이야기하여 생각해 보니 가평의 조무락골에서 화악산을 가는 길에서 만난 폭포였다.

복호폭포를 지나고 제8폭인 은폭포까지는 거리가 상당하였다. 은폭포를 지난다. 은폭포는 일반인들이 이곳까지 올라오기에 더욱 유명하다고 할 수 있다. 등산객들이 12 폭포까지는 가지만 일반인들은 이곳까지 온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은폭포를 만나기 전에 보행교가 포항의 상징처럼 보인다. 은폭포는 연산폭포까지 올라간 사람들이 찾는 숨겨진 폭포(은폭(隱瀑))라는 의미이다. 은폭포를 지나면 이제 사거리다. 삼지봉을 오르는 길, 소금강전망대 가는 길, 선일대방향으로 가는 길, 계곡 상류로 가는 길이다. 우리는 갈림길로 소금강 전망대와 선일대를 두고 고민을 하다가 선일대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고 다리는 천근만근이 되고 있다. 두 곳을 다 오르겠다고 산행을 처음시작할 때는 마음을 잡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이제는 선택을 하고 선일대를 오른다. 계단이 많다. 250m 거리가 만만치 않다. 선일대를 오르면서 한 손은 우산을 들고 한 손은 스틱을 잡고 계단을 오른다. 선일대 올라 정자에 앉아서 떨어진 기력을 보충을 한다. 그리고 우산 없이 자유를 만끽한다. 선일대 정상에서 내려다본 관음폭포는 이렇게 멋있다. 연산폭포는 숨어져 있다. H가 머리에 열이 나는지 마지막 식수를 머리에 붇는다. 아직도 2km나 남았는데 우리는 아쉬움을 표하는데 본인은 열이 나는 것을 해소한 것에 만족한다. 선일대는 '신선이 학을 타고 비하대(飛下臺)에 내려와 삼용추(三龍湫)를 완성한 후 이곳 선일대에 올라와 오랜 세월을 보냈다'는 곳이다. 반대편에서 보면 더욱 좋겠지만 오늘은 비가 와서 반대편 전망대를 가지 않고 관음폭포 위에 걸린 구름다리 위에서 이를 담아 보았다.

선일대에서 바라다보면 관음폭포가 있고 그 아래에 무풍폭포가 있다. 뒤에 숨어 있는 연산폭포가 있는데, 이것을 보고 겸재선생이 청하현 현감으로 있으면서 삼용추(三龍湫)를 그렸다고 한다. 겸재선생이나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곳까지 밖에 오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 위로 가는 것은 힘든 여정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에서 보면 관음폭포 쪽으로 어떻게 내려가는지가 궁금할 것이 깎아지른 절벽 사이에 폭포가 있어서 더 신비롭다고 할 수 있다. 학소대, 비하대, 선일대를 주변에 두고 관음폭포가 보이는 것이다. 비 오는 날 경치가 무척 신비스럽다. 바위와 구름과 나무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선일대를 내려서서 관음폭포 입구로 들어간다. 선일대, 비하대 사이에 난 데크로 내려간다. 그 계단을 내려가면 이제 쌍폭이 우리를 기다린다. 12개 폭포 중에 삼보폭포, 상생폭포, 관음폭포가 쌍폭이상이다. 다만, 삼보 폭포는 현재는 쌍폭이 아니다. 관음폭포를 보면서  그 모습을 담고 그 아래에서 인증샷을 남긴다. 그리고 연산폭포로 가기 위하여 관음폭포 위에 걸린 구름다리를 지나간다. 옛날 겸재가 그린 그림을 보면 사다리가 놓여 있었다. 오늘날에는 구름다리가 걸려 있다. 관음폭포는 비하대 아래에 형성된 폭포로 주변의 경치가 너무나 빼어나 관세음보살이 금방이라도 나타나 중생들의 소원을 들어줄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다. 또한, 정시한의 산중일기에는 하폭인 상생폭포, 중폭인 관음폭포, 상폭인 연산폭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는 3개의 폭포만 있었다고 이해해도 될 것이다.

제7폭이 연산폭포이고 제6폭이 관음폭포이다. 이 두 폭포가 가장 아름답다고 이야기되고 있다. 연산폭포는 학소대 아래에 놓여 있으며 숨은 그림처럼 숨어 있다. 그런데 가장 웅장하다고 할 수 있다.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한다. 여름날 비가 많이 온 후에 그 모습은 장관일 것이다. 겸재의 삼용추가 그대로 재연될 수 있을 것이다. 관음폭포 바로 아래에 무풍폭포가 있다. 사람들은 그것이 그것 같다고 하지만,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잠룡폭포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연산폭포를 갔다 와서 무풍폭포를 바람처럼 지나가면서 잠룡폭포를 찾지만 보이지 않는다. 잠룡폭포는 숨겨져 있다고 설명이 되어 있다. 이곳이 영화 ‘남부군’의 한 장면, 곧 지리산의 어느 골짜기에 모인 남부군 대원들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발가벗고 목욕하는 장면을 촬영한 곳이라고 한다(출처:포항시청 홈페이지). 숨겨진 폭포인 것이다. 잠룡이란 '아직 승천하지 못하고 물속에 숨어 있는 용'이란 뜻이다. 선일대 밑에 있는 협곡이라고 한다.


제3폭은 삼보폭포라고 하는데 거의 찾는 사람이 없다. 옛날에는 세 줄기였는데 지금은 한줄기 밖에 없어서 그런 것 같다. 그리고 그 모습이 그저 그랬다.

제2폭은 비도 오고 지쳐 있어서 계곡을 내려가서 가보기는 싫었다. 다만 폭포가 보이지 않지만 전체적인 그림이 너무 멋있어서 그 배경을 그림으로 담았다. 선일대가 보이고 계곡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제1폭 상생폭포다. 쌍폭이다. 여름날 물줄기가 많다면 더욱 장대하겠지만 그래도 만족할만하다고 할 수 있다. 예전부터 처음 만나는 폭포인 만큼 사람들이 즐겼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 마지막으로 만나는 폭포인 만큼 이곳에서 마지막 인증샷을 남겼다.


8시간 이상을 등산과 계곡트래킹으로 체력이 방전이 되어 소금강전망대를 가지 못하였으며, 보현암은 가지 않았다. 찬구들은 불교와 연관성이 있고 하여서 보현암이 2분 거리에 있다고 하여 가보았지만 나는 그 2분 거리에 속지 않고 나의 체력을 유지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자동차를 몰고 올라와야 하기 때문이었다. 갓부처가 있었다고 하는데 갔다 온 친구들이 왕복으로 10분을 소요하였다. 보현암이 어려운가 보다 했다.


지쳐 있다. 그리고 어둠이 올라오고 4시 30분에 폭포를 보겠다고 올라오는 할머니들이 있어서 말린다. H가 늦어서 갔다가 올 수 없다고 말린다. 향로봉을 내려올 때 산행을 권장하였던 것을 아쉬워하면서 이번에는 안전을 이야기한다. 비는 오고 등산로는 미끄럽고 어둠이 찾아오면 최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랜턴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안전이 최우선이다.


문수암을 가는 삼거리에 도착하니 이제는 오늘의 산행이 끝나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주위의 모든 것이 아침에 본모습 그대로다. 보경사에 도착하였다. 아침에 오를 때 보경사를 지나쳤으니 이제는 탐방이다.

보경사는 신라 수도인 경주의 인근의 사찰로 신라의 보국사찰이었다고 한다. 보경사는 '신라 지명법사는 602년 중국 진나라에서 팔면 보경을 갖고 귀국했다. 진평왕에게 '동해안 명산에 이 거울을 묻고 불당을 세우면 왜구의 침략을 막고 삼국을 통일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진평왕이 오색구름에 덮인 내연산 아래 연못에 거울을 묻고 창건한 절이 보경사다'(출처 : 포항시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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