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랑 1일 2 산을 하겠다고 용화산을 올랐다가 배후령까지 오면서 장애물 경기도 아닌 장애물 경기를 하다가 지쳐서 오봉산을 바로 앞에 두고 하산을 하였다. 그때 아쉬웠다. J랑 따뜻한 봄이 오면 이곳에 다시 오자고 하였다. 하지만, 봄이 지나고 여름이 와서 도전을 한 것이다. 그것도 오봉산의 맛을 제대로 보았다.
이제는 몸이 여유를 찾았다. 봄의 여유를 산행으로 그것을 달래고 있다.
이번에도 1일 2 산을 생각하면서 여름날 그래도 쉽게 오를 산을 찾으면서 산의 아름다움과 물의 시원함을 동시에 느껴보고 싶어서 무엇인가를 찾다가 홍천의 팔봉산과 춘천의 오봉산이 생각이 났다. 지난겨울의 아픔을 겪은 산 그것이 오봉산이다. 그래서 팔봉산은 여름날 오르기에는 그늘이 거의 없어 산을 오르고 내려와서 홍천강에서 물놀이를 하고 2시간 이내에 오를 수 있는 오봉산을 스치듯이 가자고 하였다. J도 H도 OK다.
그런데 우리 팀에 새로 참가하는 B가 주저하여 셋만 움직이기로 하였는데, B를 포함시키고 오봉산만 간다. 이것이 사회생활이다. 남들을 배려하고 그것에 동참하면서 같이 사는 것이다.
J와 나는 오봉산에 대한 지난겨울의 아픈 추억이 있어 오봉산을 안 갈 수도 없기에 오봉산을 선택하고 그것에 동참하는 H다. 배후령에서 오르는 오봉산은 짧고 간결하다. 그렇게 익숙한 오봉산을 이번에는 제대로 느껴보자는 것이 이번 산행이다. 한 번도 부용계곡 아래에서부터 올라온 적이 없다.
지난겨울 J와 나는 1일 2 산이라는 안내산악회 버스를 탑승하고 이곳에 왔다. 누구는 용화산을 올랐다가 내려와서 배후령이나 배치고개에서 올랐다가 내려온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만족하지 못하고 용화산을 오른 후 능선을 따라 걷고 배후령에 도착하여 오봉산을 오른 후 청평사로 하산하는 원대한 꿈을 안고서 용화산을 오르고 능선을 따라 걸었다. 하지만, 배후령에 도착하기 전에 우리는 장애물 경기 아닌 장애물 경기를 하고 눈 속에 파묻힌 등산로를 찾으면서 걷다가 배후령에 도착한 후 더 이상은 무리라고 판단하여 배후령에서 탈출을 하였다. 지난겨울 눈이 그렇게 와서 나무는 쓰러지고 등산로는 파묻혀 있었던 것이다. 배후령 고갯마루에도 자동차가 올라오지 못하여 배후령 고갯마루에서 터널 입구까지 걸어서 내려간 기억이 있다. 그렇게 지난겨울 아픈 추억이 있는 오봉산을 이제야 온 것이다.
이번에는 오봉산을 아래에서부터 오르고 오봉산을 찍은 후 4봉, 3봉, 2봉, 1봉 이런 순으로 걸은 후 청평사로 하산하는 등산로를 설계한 것이다. 이번 산행에는 B가 처음으로 합류하였다. J와 지난 6월 말 공룡능선을 걸었다고 하여서 이번에는 우리 팀에도 합류하였다. 합류한 사람이 많다면 좋다. 이것을 보면서 생각이 난다. 예전에 인터넷 이런 좋은 글을 보았다.
산을 걷는 것만으로
만병을 낫게 할 수도 있다.
인간은 태초에
산을 걸으며 진화해 왔으며
걷지 않으면 병이 생긴다.
나이가 점점 들어 갈수록
일삼아 자주 산에 가야만 한다!
우리네 선조들은
모두 산에서 태어나서
자연과 어우러져 살았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농민이었다.
농부란 산에서
나무를 하며 산에서
사람과 같은 것이다
넷이 모이는 것이 수월하지는 않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명은 남쪽, 두 명은 서북쪽, 한 명은 서쪽에 살고 있으니 동쪽의 산을 갈 때에는 서쪽에 있는 한 명이 희생을 해야 다 모이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모였다.
추억의 경춘선 블로그에서 가져옴
춘천 가는 고속도로는 아침부터 만원이다. 춘천 가는 기차가 예전에는 만원이었고 그곳에 낭만이 있었는데, 나에게는 낭만은 없었고 군대의 추억만 있다고 할 것이다. 20대 시절 2년 이상을 이곳에서 보내었다. 그렇게 춘천 가는 기차가 싫었다. 춘천 가는 고속도로 위에 서다 가다를 반복하다가 가평휴게소를 지나면서부터 자동차는 제속도로 찾았다. 가평휴게소에 들어가는 그 많은 자동차들을 뒤로하고 춘천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배후령 터널을 들어가기 전 한번 더 춘천을 보고 배후령 터널을 지났다. 터널이 없을 때에는 무척이나 힘들었다. 이제는 산을 가는 사람만이 배후령을 지난다. 고개를 즐기면서 지나는 사람만 오른다.
배후령을 지나지 않고 터널로 지난다. 터널이 개통되고 나서는 양구가 30분 더 가까워졌다. 청평사로 가는 길은 춘천에서 소양댐에 자동차를 세워두고 배를 타고 들어가거나 배후령을 지난 후 배치고개를 넘어가는 방법이 있는데, 배치고개를 넘어간다. 배치고개는 오봉산과 부용산 사이에 있는 고개다. 그 너머에 있는 청평사는 천혜의 요새다. 이곳을 방어하면 아무도 들어올 수 없을 것이다. 소양댐이 건설되기 전에는 소양강을 거슬러 올라온 후 들어와야 하기 때문이다.
춘천사람들은 이곳에 놀러온다. 뱃놀이도 하고 청평사도 구경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많지 않은 춘천의 휴양지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춘천사람들은 이곳에 놀러 온다. 뱃놀이도 하고 청평사도 구경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많지 않은 춘천의 휴양지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등산로는 이 고개를 지나 부용계곡 아래에서부터 시작한다. 고개를 넘어 굽이굽이 내려가면서 우리들을 세우는 사람이 있다. 주차요금을 받는다. 주차장을 들어가는 것이 아닌 계곡을 들어가는 것 자체가 주차장을 들어가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스트리아 할슈타트를 들어가면서 주차요금을 내는 것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어디도 갈 수 없고 들어가는 것 자체가 주차인 것이다. 친환경자동차라고 50% 할인을 해주니 감사하다. 그리고 입구에 주차를 하고 등산을 준비한다. 주차장을 건너면 바로 등산로가 시작이 된다.
스틱을 준비하기보다는 장갑이 필요한 오봉산 산행은 이렇게 시작이 되었다.
오봉산은 전국에 참 많다. 그래도 이곳의 오봉산이 가장 유명하다고 할 것이다. 그만큼 경치가 멋있는 산이라고 할 것이다. 오봉산에 대한 노래도 있다. 경기민요 중의 하나다.
오봉산 꼭대기에/에루화 돌배나무는/
가지가지 꺾어도/에루화 모양만 나누나
에헤이 여허 에헤이여/영산홍록에 봄바람
혹!, 춘천의 오봉산의 돌배나무가 있을까 하여 오른다. 결론은 없었다. 경기민요에서 나오는 오봉산은 이곳이 아닌 것이다.
산을 휘둘러 왼쪽으로 갔다가 능선길로 들어서면서부터 산은 우리에게 경의를 표하도록 요구한다. 스틱은 배낭 속에 넣고 장갑을 두 손에 끼고 조심스럽게 경의를 표하면서 산을 오른다. 처음부터 가파르다. 우리에게 앞서 있던 등산객이 있었으나 첫 번째 오르막에서 우리에게 길을 양보하고 천천히 오른다. 산은 깎아지른 절벽을 오른쪽에 두고 청평사의 목탁소리를 들으면서 한 발 한 발 오르게 한다. 청평사로 가는 길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하지만, 그 길은 하산하면서 들르는 길이고 오르는 사람들은 정상으로 가는 이정표만 열심히 본다.
가파르게 오르면서 뒤를 돌아보니 소양호가 어느새 눈앞에 들어온다. 그리고 목탁소리 들리던 청평사도 눈아래에 있다. 그렇게 산을 오르면서 일행이 생겼다. 4명이 일행이었으나 5명이 일행이 된 것이다. 사진을 찍어주고 하면서 친분을 쌓고 그리고 산을 오르면서 이야기하면서 또 친해진다. 그렇게 산행친구가 된 것이다. 마지막에 우리가 오층석탑을 보려 가면서 헤어졌지만 좋은 인연이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오층석탑을 가면서 인사를 못한 것이 아쉽다.
여기에서 소양호를 바라도 보니 한반도가 그대로다. 영월에서는 이렇게 보이는 지역에 전망대를 설치하고 관광지로 개발하였는데 이곳에서는 스토리텔링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래서 스토리텔링을 하였다. 우리가 있는 위치가 어느쯤일까 생각하니 중국의 길림성의 장춘쯤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스토리텔링을 하면서 산길을 걷는다.
J가 농담을 한다. 오늘따라 힘들게 올라오면서 노루가 왜 한 번씩 올라오면서 고개를 돌리는지 물었다. 우리는 모른다고 하니, "그것은 한 번씩 쉬면서 숨을 들이켜는 것"이라고 한다. 본인이 오늘 힘든 얘기를 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내가 힘들고 어떤 때는 J가 힘들다.
청평사가 고즈넉 자리 잡고 있고 고사목이 바위와 어울려 있다.
소요대에 도착하였다. 배꼽봉이라는 이정표도 있고 이곳에서 청평사 방면으로 하산을 하면 '천단'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급경사로 하산을 하는 것이 싫고 오봉산 정상으로 가야 한다. 배꼽봉을 지나서 조금 오르고 뒤를 돌아보니 배꼽봉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배꼽처럼 솟아 있는 봉우리인 것이다.
소요대에 대하여 청평사에서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조선시대 서종화의 「청평산기(淸平山記)」 에서는 ‘산기슭의 머리 부분이 잘라져 돌이 드러나면서 대가 된 것인 데, 그 위에 너 댓 사람이 앉을 만하다. 험한 골짜기에 임하여 있는데 수천 길이나 된다. 이곳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층층이 쌓여 있는 봉우리가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다. 뛰어올라 솟아 나온 듯한 대단한 산의 기세를 모두 보여주는데, 기이한 형태와 자태를 모두 다 기술할 수 없다. 산의 푸르른 기운은 아래로 퍼지고 상쾌한 기운은 옷소매를 가득 채우는데, 마침 늙은 중 천호(天浩)가 따라왔다. 그와 반나절 동 안 얘기를 나누었는데, 이야기가 맑고 깨끗하여 들을 만한 것이 마치 신선인 홍애(洪厓)와 선문(羨門)과 함께 세상 끝 아득히 먼 곳에서 같이 있는 듯하다.’라고 표현하였다
암릉을 오르면서 즐거움은 조각품을 찾는 것이다. 그 조각품이 바람과 비와 눈 그리고 시간이 만든 작품인 것이다. 그리고 암릉을 이겨내고 자라고 있는 나무이다. 곳곳에 그러한 풍경을 담을 뿐이다. 경이롭다고 할 것이다.
소요대를 내려가니
이제 홈통방위다. 어떤 곳에서는 구멍바위라고도 표기하여 놓았다. 그곳을 지날 때 조심조심 아니 적당한 키에 적당한 몸을 유지한 사람이 유리하다. 아니 키가 작거나 여린 사람이 유리하다고 할 것이다. 예전 장군들은 이곳을 지나가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 우람한 덩치로 인하여 홈통바위를 지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 홈통바위를 바로 앞에 두고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고 지나갈 뿐이다. 그렇게 지나면 이제 정상이 바로 코앞이다
위 사진 중 오른쪽 사진이 망부석이다.
오봉산 3 지점이라는 표시와 함께 5분이면 정상에 도착할 수 있다는 표시가 있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배치고개로 내려가는 길을 만나고 50m만 가면 정상이라는 이정표를 만난다. 겨울날 많은 사람들이 배치고개에서 이리로 올라와서 정상을 찍고 하산을 하였을 것이다. 배후령은 배후령 터널이 있어 그렇게 제설작업이 안되지만 이곳은 제설작업이 잘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산을 오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그것도 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건강을 지키는 것이다.
정상에 올라서니 배후령에서 올라온 사람, 배치고개에서 올라온 사람 등등이 정상인증샷을 남기고 있다. 우리도 동참할 뿐이다. 어떤 사람은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용화산을 거쳐서 이곳까지 왔다고 한다. 우리가 겨울산에서 겪은 아픔이 있는데 대단하다. 우리는 이제 4봉, 3봉, 2봉, 1봉으로 간 후 지도에 있는 2봉과 1봉 사이에 있는 등산로를 이용하여 청평사로 하산을 할 것이다.
등산로 안내도에 있는 모양을 보고 추측을 하면서 하산을 하는 것이다.
정상을 내려서자마자 다시 봉우리가 있다. 이것이 4봉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아니다. 배후령에서 온 사람들이 힘들었다고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가소롭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힘들게 올라왔는데 배후령에서 온 것이 무엇이라고 성취가미 있고 우습게 보는 것이다. 4봉을 바로 앞에 두고 50m만 가면 4봉을 가고 그렇지 않으면 우회할 수 있다고 설명이 되어 있다. 우리는 이의제기도 없이 4봉을 오른다. 그리고 다시 내려선다.
청솔바위가 있다. 그렇게 소나무가 암릉 위에 자리를 잡고 몇백 년을 유지하였을 것이다. 청솔바위 앞에서 다양한 폼으로 인증샷을 남긴다. 오늘 우리가 내려가면서 마지막으로 밧줄을 잡고 내려가는 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배후령에서 오르면 첫 번째 만나는 암릉인 것이다. 경이로운 모습으로 소나무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이제 3봉은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고, 제2봉을 지나면서 그래도 봉우리인데 하면서 인증샷을 남긴다.
이제는 내려가는 길도 필요하다. 2봉과 1봉 사이에 난 길을 찾아야 한다. 오봉산 정상을 오를 때에는 정상으로 가는 길과 청평사 가는 길이라는 이정표가 있었는데 없다. 다만, 배후령 내려가는 길만 있다. 이정표가 없이 능선으로 빠지는 길이 있다. 그 길이 하산길이라고 생각하지만 또 다른 길이 있을까 하여 1봉까지 간다. 1봉까지 가면서 새로운 길이 없기에 조금 전 보아두었던 등산로로 다시 이동을 한다.
하산을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였다. 오봉산 정상을 오르면서 그렇게 가파르게 올랐는데 내려가는 길도 가파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하산길이 그렇게 가파르지 않았다. 10-20분만 내려서면 그렇게 좋은 등산로가 없다. 배후령에서 온 사람들보다 부용계곡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원점회귀하는 등산로라고 보면 될 것이다. 계곡을 지나고 다시 계곡을 만나는 지점에서 오봉산 정상에서 완만한 등산로를 따라 내려오는 등산로를 만난다. 그곳에서부터 청평사까지는 500m 남짓이다. B가 오를 때는 그렇게 잘 오르다가 내려오면서 힘들어한다. 오를 때는 잘 오르는데 내려올 때는 쥐약이라고 하였다.
H 호기심이 발동하였다. 이곳에서부터 440m 지점에 오층석탑이 있다는 이정표를 보고 가보자고 한다. 왕복 1km가 되지 않기에 J와 내가 호응을 하고 H는 계곡에서 발을 담그고 쉬기로 하였다. 그렇게 440m를 가면서 이곳에 있었던 암자의 흔적을 보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던 이자현(李資玄)이 37간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아래의 청평사도 그 흔적이라고 한다. 암자가 있었던 터가 있고 이자헌의 세수터도 있다. 더 위에 오층석탑이 있다. 오래된 탑이 아니고 1978년 건축한 탑이었다. 다만,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적명보궁에 안치하면서 이곳에 탑을 세웠다고 안내되어 있다. 이 오층석탑은 사리탑이라고 한다. 청평사에서 안내하는 자료를 보면 1979년경에 주지 향봉스님이 스리랑카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옮겨와 아래의 식암 터에 적멸보궁(현재 해체)과 함께 이 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하였으며, 고려시대 석탑의 양식을 모방하여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적멸보궁 터라고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다.
다시 자료를 찾아보니 2013년 청평사에서 노후화된 적멸보궁을 철거하였다고 한다. 화재에 의하여 소실된 것은 아니었다.
이곳에 적멸보궁이 있다고 하는데 없다. 다면, 바위에 새겨진 청평식암(淸平息庵)이라고 부조되어 있다. 이곳에 예전에 적멸보궁이 있었다고 2013년 산행기를 보면 있는데, 지금은 없다. 청평식암은 없고 청평식암지만 있다. 그리고 계곡에 가면 이자헌의 세수터가 있다. 네모반듯하게 바위를 쪼아 웅덩이를 만들어 놓았다. 우리는 모두 그곳에서 세수를 하였다.
식암폭포가 있다. 계곡을 내려가면서 또 폭포를 보겠지만 처음으로 만나는 폭포이다. 폭포이지만 그렇게 많은 유량을 갖고 있지 못하여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구송폭포에서 아쉬움을 달랬다.
계곡에 흩어져 있는 국가의 유산을 둘러보고 이제 청평사로 간다. B와 헤어진 지점에서 족탕을 하려고 하였으나 마음이 급한 친구가 먼저 내려간다. 그 아래에는 해탈문이 있었는데 세월의 흐름에 따라 지붕은 없는 형체만 있다.
청평사 바로 앞에 있는 계곡에서 바를 담그고 세수를 다시 하고 사찰로 들어간다. 그곳에 나중에 확인을 하니 공주탕이다. 이곳이 공주와 상사뱀 설화에서 평양공주가 상사뱀을 공주굴에 떼어 두고 절에 올라와서 가사불사를 하기 전에 목욕재계를 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그렇게 큰 사찰은 아니지만 아담하게 지어졌다. 고려 광종 24년(973년)에 창건되었으며 세 번의 중창과 조선 명종 때 보우대사가 중건하여 대사찰이 되었으나, 한국전쟁 때 거의 소실된 것을 1970년대에 전각들을 다시 짓고 회전문을 보수하고 요사채를 건축하였다고 설명이 되어 있다. 청평사의 현존건물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극락보전, 삼성각, 회전문(廻轉門, 보불 제164호), 관음전, 나한전 등이 있다.
청평사 뒤에 있는 봉이 나한봉이고 그 봉을 배경으로 가람이 배치되어 있다. 이제는 전설을 따라 움직인다.
H는 공주탑을 찾아갔고 우리는 공주상을 찾으러 갔다. 그리고 내려가면서 영지를 보았다. 영지에서는 봉우리의 그림자가 보이도록 영지(影池)를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봉우리가 보이지 않고 나무의 그림자 보일 뿐이었다. 청평사에서 안내하는 자료를 보면 고려시대 진락공 이자현이 청평사 골짜기 전체를 사찰 경내로 삼아 선원(禪園)을 가꿨는데 그 중심에 영지가 있도록 했고, 조선 초기 김시습의 한시를 비롯한 많은 문인들의 시에 언급되어 있다고 한다. 일본이 자랑하는 교토(京都) 사이호사(西芳寺)의 고산수식(枯山水式) 정원보다 200년이나 앞선 정원이며, 한국 정원사(庭園史)에 중요한 자료라고 언급하고 있다.
김시습의 글을 찾아보았다.( 「청평산 세향원 남쪽 창에 쓰다」)
네모 못엔 천 길 산봉우리 비치고 / 方塘倒揷千層岫
절벽에선 만 길 물 내달리며 떨어지네 / 絶壁奔飛萬丈淙
이것이 바로 청평산 선경(仙境)의 운치 / 此是淸平仙境趣
어이하여 시끄럽게 지난 행적 묻는가? / 何須喇喇問前蹤
영지를 지나고 폭포가 있다. 구성폭포다. 부안의 직소폭포와 유사한 모양이다. 그렇게 폭포 옆에 공주굴이 있다. 그 굴도 같이 담고 아래로 내려가는데 폭포가 또 있다. 9그루의 소나무가 있는 대(臺)가 있어서 구송대(九松臺)라 하고 그 아래의 폭포를 구송폭포(九松瀑布)라 한다. 조선 후기에 구송대의 소나무는 없어졌다고 설명이 되어 있다. 또한 아홉 가지 소리를 낸다고 구성폭포(九聲瀑布)라고도 한다. H가 헷갈린다고 한 부분이 여기에 설명이 된다. 도대체 구송폭포야 구성폭포야 한 얘기다.
이곳에는 고려 초기에 건립된 삼층석탑, 이자현이 조성한 영지, 비를 기원한 기우단 터, 하늘에 제사 지내던 천단, 공주와 상사뱀 설화의 유래가 전해지는 공주탑과 공주상이 있는데 우리는 공주상이 더 관심이 있어 그것을 찾는다. 예전의 매표소 근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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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와 뱀의 전설은 이렇다(출처 : 청평사 홈페이지)
신라 선덕여왕 때 당나라 태종의 딸인 평양공주가 있었는데 청년이 그를 사랑하였다고 한다. 이에 황제는 일반 백성인 청년이 황제의 딸을 사랑한다는 노여움을 받아 처형되었다. 청년은 죽어서 뱀으로 변해 공주의 몸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상사뱀의 이름은 이런 이유로 생기게 되었다). 황제는 점술가와 의원을 불러 치료를 부탁하였으나 모든 방법이 듣지 않았다. 또한 중국의 여러 사찰을 돌며 부처님께 빌어 보았으나 효험이 없자 신라에서 온 스 님에게 말을 듣고 신라의 산하를 두루 다녔다.
그렇게 다니던 중에 청평사에 도착한 공주는 공주굴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아침 종소리를 듣고 뱀에게 절에 가서 밥을 얻어 올 테니 기다려 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동안 공주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던 상사뱀이 공주의 몸에서 떨어져 공주는 절에 올라갔다. 마침 절에서는 가사불사를 하고 있었는데 공주는 공주탕에서 목욕재계를 하고 가사에 서너 바늘을 뜬 다음 법당에 들어가서 염불을 하고 있었다.
기 다리다 지친 상사뱀이 공주를 찾아 정문을 들어가려 할 때 뇌성벽력과 함께 소나기가 쏟아져 물에 떠내려가고 말았다. 후세 사람들은 이 문을 회전문이라 부르게 되었다. 공주가 밥을 얻어 동굴로 돌아와 보니 상사뱀이 죽어 폭 포에 떠 있었다. 공주는 시원하기도 하고 가련하기도 하여 청년의 화신인 상사뱀을 묻어 주고 이 사실을 본국에 알렸다.
당나라 태종은 재상 저수량에게 공주의 혼인 때 쓰려고 비축해 두었던 금덩어리 세 개를 주어 화려한 법당을 세우게 하였다. 저수량은 금 한 개로 법당과 공주 이궁 및 저수량 봉교서비를 세우고 또 한 개는 장차 중건할 때 쓰라고 어디에 묻었으며 나머지 한 개는 공주의 귀국 여비로 주고 떠났다. 공주는 구성폭포 위에 삼층석탑을 세 워 부처님 공덕을 찬양하고 귀국하였다. 그런 이유로 이 탑을 공주탑이라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와 당나라는 급속히 친밀해져 삼국통일에 큰 기여를 하였다고 한다. 이외 다양한 내용으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제 집으로 가기 위하여 주차장으로 이동을 한다. 2km를 걸어야 한다. 그렇게 멀게만 느껴진다. 이제는 지친 다리를 원망하면서 구름다리를 건너고 계곡을 가로지르고 그렇게 건넌다. 주변의 먹을거리가 있지만 그것도 싫다고 자동차로 간다. 주변의 모든 것이 싫다고 하면서 화장실로 가서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고 이동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