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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벗과 함께 걷는 수원의 세월, 화성

by 김기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 J와 수원 화성을 한 바퀴 둘러보기로 했다. 한양도성을 일주하는 데 꼬박 이틀이 걸리는 것에 비하면, 네 시간이면 족한 화성 둘레길은 우리에게 안성맞춤이었다. 대학 시절을 보낸 수원은 익숙한 도시였기에, 우리는 그 시절 가장 번화했던 팔달문에서 만나기로 했다. 예전의 그 활기 넘치던 모습은 어떻게 변했을까, 그리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복원된 화성은 또 어떤 모습일까. 설렘과 궁금증이 뒤섞인 채 수원으로 향했다.


화서역을 지날 무렵, 친구가 먼저 도착했다는 문자가 날아왔다. 마음은 급해졌지만, 전철역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타야 하는 여정은 오롯이 시간의 손에 맡겨야 했다. 수원역을 나와 매산시장 입구 정류장에서 팔달문으로 가는 13번과 35번 버스를 확인했다. 광교산을 갈 때 탔던 35번 버스가 오늘은 유난히 반가웠다. 출근 시간이 지난 한가로운 버스에 올라, 신호등이 우리를 도와주기만을 조용히 기도했다.

팔달문에 도착하니 J 대신,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켜온 팔달문이 늠름한 모습으로 나를 먼저 반겼다. 친구를 찾기보다 오랜 벗을 만난 듯, 그 모습을 천천히 둘러보며 사진에 담았다. 대학 시절이나 지금이나 도로 한가운데 우뚝 솟아,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모습은 마치 서울의 숭례문 로터리를 떠올리게 했다. 우리가 ‘남문’이라 불렀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길 건너편에 있던 친구와 반갑게 해후하고, 드디어 화성 환종주를 시작했다. 팔달산 정상을 향하는 길, 오늘 여정에서 가장 가파른 계단이 우리를 맞았다. 학생 때는 힘든 줄도 모르고 오르던 길이었는데,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가파르게 느껴졌다. 길 중간, 홍난파 노래비를 만났다. 예전에는 그리 쓸쓸해 보이지 않았는데, 그의 친일 행적이 알려진 이후 찾는 이가 줄어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저 동네 뒷산 오르듯 다니던 길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옛 모습 그대로인 것 같으면서도 한층 정갈하게 복원된 성곽길이 우리의 발걸음을 이끌었다.

처음 만난 남포루는 아쉽게도 보수 공사 중이었다. 걸음을 옮기니 ‘효원의 종’이 나타났다. 평일이라 매표소는 닫혀 있었지만,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한 정조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는 종의 의미가 마음을 울렸다. 첫 타종에는 부모님의 은혜를, 두 번째에는 가족의 화목을, 세 번째에는 자신의 소원을 담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굳게 묶인 당목(撞木)을 보며 마음으로만 세 번의 소원을 빌었다.

이내 팔달산 정상, 군사 지휘소였던 서장대에 섰다. 이곳은 정조가 직접 군사훈련을 지휘하고, ‘화성장대(華城將臺)’라는 현판 글씨를 남긴 역사적인 장소다. 그의 시문 현판까지, 화성에서 유일하게 정조의 글씨 두 점이 함께 걸린 곳이라 하니 그 의미가 더욱 깊게 다가왔다.

서장대 옆 서노대는 학창 시절에는 보지 못했던 생소한 시설이었다. 문득 온라인 게임에서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노대를 세우던 장면이 떠올랐다. ‘아, 저것이 그런 용도였구나.’ 게임 속 평지에 세워지던 노대와 달리, 산 정상에서 아래를 겨누는 서노대의 위용은 아래에 있는 적들에게 얼마나 큰 위협이었을까 상상해본다.

화서문으로 향하는 길, 예전에도 있었던 ‘치(雉)’와 함께 새롭게 복원된 공심돈과 각루가 눈에 띄었다. 특히 서북각루에서 발견된 굴뚝은 이곳에 온돌방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흔적이었다. 밤낮으로 성을 지키던 군사들의 고된 겨울을 헤아렸던 선조들의 지혜에 잠시 고개를 숙였다.

옹성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존된 화서문은 예전과 달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었다.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우리 시설은 왜 들어가 볼 수 없냐고 늘 아쉬워하던 친구 H가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어느덧 장안문에 이르렀다. 길목의 ‘치’에 설치된 홍위포가 위용을 자랑하며 밖을 겨누고 있었다. 이곳의 깃발은 흰색이었다. 친구 J가 동청룡, 서백호, 남주작, 북현무의 사방신에 따라 깃발 색이 달라진다고 설명해주었다. 서쪽이기에 백호를 상징하는 흰색 깃발이라는 것이다. 잠시 후 북쪽으로 접어들면 검은색 깃발을 보게 될 거라는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도로 표지석처럼 성곽의 관리 구역을 표시한 옛 표지석도 발견하며 옛사람들의 체계적인 관리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장안(長安). 정조는 이 이름에 ‘북으로 궁궐을, 남으로 현륭원을 바라보며 만년의 평안함을 기원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혹자는 중국의 장안성을 떠올릴지 모르지만, 문화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러운 차용일 뿐 사대주의로 볼 것은 아니라는 J의 말에 공감했다. 예전에는 팔달문처럼 도로 중앙에 있었지만, 지금은 서쪽 성곽을 잇고 동쪽은 다리로 연결하여 그 위용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J의 말대로 깃발이 검은색으로 바뀌자, 화성의 백미라 불리는 북수문, 화홍문(華虹門)이 나타났다. 일곱 칸의 아름다운 홍예문 위로 누각이 세워져, 흐르는 물보라가 무지개처럼 아름답다 하여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군사시설이자 때로는 경치를 즐기는 정자였을 이곳의 풍경은 과연 화성 제일의 아름다움이라 할 만했다. 광교저수지에서부터 흘러온 맑은 수원천이 화성을 더욱 빛내주고 있었다.

화홍문 옆 용연(龍淵)과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물길의 용두(龍頭) 장식은 또 하나의 볼거리였다. 용연에 비친 달의 모습, ‘용지대월(龍池待月)’ 또한 화성의 아름다운 경치로 꼽힌다니, 밤의 풍경은 또 얼마나 황홀할까. 북암문을 통해 잠시 성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화홍문 누각에 올라 수원천을 내려다보았다. 물속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자라의 모습에 이곳 생태계가 얼마나 건강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동장대, 즉 연무대에 이르니 고즈넉한 풍경이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활터에서는 외국인들이 국궁 체험에 한창이었다. 우리 활의 매력을 흠뻑 느끼고 돌아가기를 바라며 발걸음을 옮기는데, 인근 연무초등학교에 걸린 양궁 동메달 획득 축하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연무대의 기상이 어린 꿈나무에게까지 이어진 듯해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 깃발은 동쪽을 상징하는 푸른색으로 바뀌고, 동문인 창룡문에 다다랐다. ‘푸른 용’이라는 이름처럼 힘찬 기운이 느껴졌다. 남쪽을 상징하는 붉은 깃발, 주작을 확인하지 못하는 것이 내심 아쉬웠다. 창룡문에서 동포루까지 이어지는 평탄한 성곽길을 걸으며 성밖을 내다보니, 학창 시절 몇 번 가보았던 거대한 고딕 양식의 수원제일교회가 보였다. 80년대의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동포루에 앉아 잠시 지친 다리를 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름다운 성벽길을 바라보던 J가 남한산성보다 복원이 잘 되었다고 말했다. 그 이유를 찾아보니, 화성은 축성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화성성역의궤’가 있었기에 완벽한 복원이 가능했다고 한다. 기록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여정의 끝, 남수문에 도착했다. 상류의 북수문이 일곱 칸의 홍예였던 반면, 하류인 남수문은 아홉 칸의 더 넓은 홍예를 가졌다. 1922년 대홍수로 유실되었던 것을 2012년에 ‘의궤’를 바탕으로 완벽히 복원했다고 한다. 복원 당시 홍수에 대비해 별도의 수로까지 만들었다는 설명에서 현대 기술과 옛 기록의 조화가 빛을 발했다.

아쉽게도 남수문에서 팔달문까지 이르는 구간은 도시화 과정에서 훼손되어 미복원 상태로 남아있었다. 성문을 지키던 남동적대와 비밀 통로였던 남암문 등이 있었을 그 자리는 이제 텅 빈 채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증언하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쉬엄쉬엄 세 시간 만에 화성 종주를 마쳤다. 늘 산행에 익숙해 주마간산 격으로 걷던 버릇이 있었지만, 오늘은 문화재를 음미하며 천천히 걸으려 노력했다. 종주를 마치고 시장에 들러 뜨끈한 순대국밥으로 허기를 채웠다. 시원한 커피 한 잔을 사 들고 남수문 앞 그늘에 앉으니, 귓가에 들려오는 느긋한 물소리가 우리의 여정을 평화롭게 마무리해주었다. 오랜 친구와 함께 수원의 어제와 오늘을 걸었던, 더없이 충만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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