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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꿈이 건설한 도시, 수원 화성

by 김기만

흔히 '계획도시'라고 하면 세종시나 여러 혁신도시처럼 현대에 들어 조성된 도시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외국의 사례로도 호주의 캔버라, 미국의 워싱턴 D.C., 브라질의 브라질리아 등을 먼저 생각하지만, 계획도시의 역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지금의 서울 역시 조선 건국과 함께 세워진 계획도시이며, 중국의 베이징 또한 명나라 영락제가 수도를 옮기며 건설한 계획도시입니다.


이러한 역사 속 계획도시들은 대부분 수도 이전을 목적으로 건설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기존 기득권 세력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새로운 터전에서 국가의 기틀을 다지려는 의도였습니다.

반면, 워싱턴 D.C., 캔버라, 브라질리아와 같은 현대의 계획도시는 그 성격이 다릅니다. 이 도시들은 국가가 안정된 이후에 수도권 과밀 해소, 지역 간 균형 발전, 국가 통합과 상징성 강화라는 새로운 목표를 가지고 건설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세종시 역시 수도권 과밀을 해소하고 지역 균형 발전을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되었으며, 그 발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선 정조 시대에 건설된 '수원 화성'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화성은 비록 수도 이전이라는 거시적인 목표를 완성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학계에서는 정조의 강력한 개혁 의지가 담긴 정치적 중심지로 평가합니다. 정조는 화성을 통해 새로운 정치 체제를 구축하고 왕권을 강화할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수원화성문화재단의 설명에 따르면, 화성 건설에는 더욱 복합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한 정조의 지극한 효심, 부패한 구 정치 체제를 개혁하려는 의지, 그리고 은퇴 후 여생을 보내고자 했던 개인적인 소망까지 담겨 있습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풍수지리상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옮기면서, 기존에 살던 백성들에게는 넉넉한 보상금과 이주비를 지급했습니다. 이후 팔달산 아래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며 관아, 향교, 도로 등 도시 기반 시설을 체계적으로 마련하고 민생 안정에 힘썼습니다.

정조의 노력은 도시 건설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상공업은 물론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만석거, 축만제 같은 저수지를 만들어 가뭄에 대비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오늘날 수원이 농업 과학 교육의 중심 도시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지금의 수원은 정조가 남긴 화성 유산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그 역사적 가치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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