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연말은 이상하게도 주말만 되면 비가 내렸다. 내 기억으로 겨울비가 이렇게 자주 온 적은 드물었던 것 같다. 평소 등산을 즐기는 나로서는 반가운 손님이 아니었다. 눈 덮인 산은 좋지만 비 내리는 겨울 산은 사양하고 싶다. 여름에는 우중 산행 나름의 운치가 있지만, 겨울비는 체온을 급격히 떨어뜨려 위험하기에 비 소식이 있으면 일찌감치 산행을 포기하곤 한다.
눈꽃 산행을 즐기지 못해 아쉬운 12월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나무들에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거운 눈을 머리에 이고 겨울을 났다면 가지가 꺾이는 아픔을 겪었을 텐데, 올해는 비 덕분에 무사히 지나갔으니 그 점에 감사하기로 했다.
친구들과 마지막 산행을 약속하고 주말을 기다렸으나, 크리스마스가 지나자마자 갑작스러운 한파 경보가 내려졌다. 친구들은 추위를 피해 방 안에 머물기를 원했다. 겨울에 방에만 있으면 '곰'이 된다고 농담 섞인 핀잔을 줬지만, 결국 나 또한 어쩔 수 없이 곰이 되어 12월 내내 집 근처 동네 산만 한두 시간씩 가볍게 오가며 한 해를 마무리했다.
2026년 1월 1일 일출 산행 역시 쉽지 않았다. 또다시 긴급 한파 주의보가 내리자 친구들은 따뜻한 아랫목을 찾았다. 결국 새해 첫날 일출 산행도 무산되었다. 친구 한 명은 이미 곰이 되었고, 또 한 명도 곰이 되어가는 중이라 했다. 나는 그날도 홀로 동네 둘레길을 찾았다. 그곳에서 서울의 전경을 담아 친구들에게 사진을 보냈더니, '곰보다는 사람'이 되고 싶다던 친구 하나가 주말 일출 산행을 제안해 왔다. 곰이 되기 직전이었던 나머지 친구도 흔쾌히 'OK' 사인을 보냈고, 그렇게 우리의 새해 첫 일출 산행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그동안 여러 번 일출 산행을 함께해 왔다. 노고산에서 북한산 인수봉과 영봉 사이로 솟아오르는 해를 보기도 했고, 검단산 정상에서 경기도 광주 양자산 줄기를 타고 오르는 일출을 보기도 했다. 2024년 땅끝마을 망섬 사이의 일출, 지리산 노고단과 천왕봉에서의 일출 등 추억이 선명하다. 이번에는 1월 1일의 인파를 피해 조금 한적해진 검단산을 목적지로 정했다.
토요일 이른 새벽, 도로는 한가했다. 징검다리 연휴를 맞아 많은 이들이 서울을 떠난 모양이다. 하남까지 약 40km를 달리는 동안 한강 옆 도로는 고요하기만 했다. 일출 시간은 오전 7시 45분. 검단산 주차장에서 현충탑 코스로 오르면 정상까지 1시간이면 충분하기에 6시 30분에 집합하기로 했다. 이동 중에 친구 J가 전화를 걸어왔다. 현충탑 근처에 차를 모두 세우면 하산 지점과 멀어지니, 본인이 나를 태우고 올라가겠다고 배려해 주었다. 사실 하산 후 복귀하는 둘레길이 잘 되어 있어 큰 상관은 없었지만, 차 3대가 움직이는 상황이라 효율적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현충탑 근처에서 3명이 모였다. 한 명은 끝내 '곰'이 되어 나타나지 않았지만, 남은 우리 셋은 헤드랜턴을 켜고 야간 산행을 시작했다. 걸음이 빠른 이들에게 길을 양보하며 천천히 발을 뗐다. 내 랜턴은 빛이 약했지만 달빛과 친구 H의 랜턴 불빛 덕분에 길을 잃지 않았다. 하남 쪽 코스는 가파르긴 해도 북사면(North Face)이 아니라서 다행히 바람이 거의 없었다. 도시의 불빛이 서서히 멀어지고, 여명이 밝아오는 하늘에는 달빛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벌써 하산하는 이들이 한둘 보였다. 일출보다는 야간 산행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인 듯했다. 우리는 일출 시간에 딱 맞춰 도착하기 위해 거북이걸음으로 천천히 올랐다. 우리가 스스로 '늙은 거북이'라고 자조하자, 한 친구가 응수했다. "거북이는 300년을 사는데, 이제 예순인 우리는 겨우 5분의 1을 산 셈이니 거북이 입장에서는 이팔청춘이야!" 그 농담에 힘을 얻어 7시 20분경, 정상까지 900m 남은 지점에서 서로를 독려하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능선 직전의 가파른 구간에 다다르자 J가 "오색 코스로 설악산 오르는 것보다 쉽네!"라며 잘도 걷는다. 그 기세에 힘입어 마침내 7시 42분, 검단산 정상에 도착했다. 아직 일출 전이었다. 정상석에서 인증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이미 많은 이들이 동쪽을 향해 자리를 잡고 있어 우리도 조용히 그 대열에 합류했다. 기다림 끝에 마주할 일출에 미리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7시 45분, 드디어 해가 머리를 내밀었다. "올라온다!" 하는 탄성과 함께 모두가 휴대폰을 들고 장엄한 순간을 담느라 분주했다. 지구가 자전하며 태양을 마주하는 당연한 이치라지만, 일출은 언제 보아도 가슴 벅찬 감동을 준다. 3분 남짓 일출의 여운을 즐긴 뒤, 우리는 정상 인증을 하고 유길준 묘역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능선을 타니 확실히 북사면 특유의 칼바람이 느껴졌다. 재빨리 자켓 모자를 눌러쓰고 바람을 피했다.
팔당호가 내려다보이는 팔각정 아래에서 한 폭의 산수화 같은 풍경을 감상했다. 추위를 녹여줄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고 나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내려가는 길, 마주 올라오는 등산객들에게 새해 인사를 건넸다. 학생부터 어르신까지 산을 찾는 사람들의 부지런함에 경의를 표했다. 우리도 아직은 '노인' 대열에 끼지 않음에 감사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중간에 만난 유길준 묘역을 둘러보았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서유견문』의 저자이자, 조선 최초로 서양 문물을 기록으로 남긴 선구자의 묘역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하산 길은 예전보다 훨씬 잘 정비되어 있었다. 하산 도중 현충탑으로 이어지는 둘레길 이정표를 발견해 그 길로 접어들었다. 덕분에 예정보다 1km 이상 걷는 수고를 덜고 곧바로 주차장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각자의 차를 회수해 식당으로 이동, 늦은 아침 식사를 마쳤는데도 아직 오전 10시가 채 되지 않았다. 일출 산행만이 줄 수 있는 부지런하고 알찬 보람이다. 다음 산행은 1월 29일로 기약하며 각자의 일상으로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