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존재의 이유를 찾아가는 새벽길
일 년에 한 번은 고향 산에 올라야 비로소 나의 존재 이유를 확인하는 기분이 든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품어봄 직한 마음일 것이다. 이번 산행은 고향에서 모친을 모시고 사는 친구 H와 함께했다. 지난주 새해맞이 산행을 계획했다가 강풍 주의보로 발길을 돌려야 했던 H에게도 이번 동행은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서울에서 소백산으로 향하는 길은 이른 새벽부터 시작된다. 대중교통 배차 시간이 넉넉지 않아 집에서 새벽 5시에 길을 나섰다. 1월 중순, 제트기류가 약해진 탓인지 매서운 칼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1호선 첫차에 몸을 싣고 서울역과 청량리를 거쳐 기차에 올랐다. 창밖은 어둠에 잠겨 있고 기차는 고요하게 남쪽으로 달린다. 잠시 잠을 청하며 이동하는 사이, 제천을 지날 무렵 H에게서 문자가 왔다. 기차의 도착 시간에 맞춰 단양역으로 마중 나온 친구의 배려가 고마웠다.
2. 얼어붙은 호수와 천동 계곡의 시작
단양역에 내려 H의 차에 올랐다. 흐르는 강물은 얼지 않았으나 멈춰 있는 호수는 지난 추위에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고수동굴과 천동동굴을 지나 다리안 관광지 주차장에 도착했다. 소백산(小白山)은 그 이름처럼 '희고 깨끗한 산'이라는 뜻을 지녔다.
우리는 여러 코스 중 비교적 완만한 '천동 코스'를 선택했다. 풍기 삼가리 코스만큼이나 바람이 적고, 단양에 거주하는 친구와 함께 오르기에 적합한 길이다. 산행 시작점은 지난주 내린 진눈개비가 얼어붙어 눈길이라기보다 빙판길에 가까웠다. 다리안 폭포를 지나자마자 아이젠을 착용했다. 날이 포근해 상고대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였으나, 계곡은 층층이 얼어붙은 얼음과 쌓인 눈으로 겨울의 본색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3. 산에서 만난 인연과 풍경
해발 400m에서 시작해 천동삼거리까지 이어지는 7km의 길은 완만하고 평온했다. 산을 오르다 떨어진 자동차 키를 주워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주는 이의 뒷모습을 보았다. 누군가의 곤란함을 덜어주려는 그 따뜻한 마음을 보며, 분실물에 대비해 연락처 하나쯤은 남겨두는 지혜가 필요함을 새삼 느꼈다.
천동 쉼터에 도착했으나 한파로 인해 화장실이 동파되어 폐쇄되어 있었다. 산을 찾는 이들, 특히 여성 등산객들에게는 큰 불편함이리라. 겨울 산의 냉혹함은 이런 곳에서도 드러난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산객들은 땀에 젖은 패딩을 벗어 배낭에 넣고 가벼운 차림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4. 1,200m의 선물, 상고대와 비로봉
해발 1,200m를 넘어서자 기적처럼 상고대가 나타났다. 이른 시간 덕분에 아직 햇살에 녹지 않은 자작나무의 상고대가 보석처럼 반짝였다. 주목 군락지에 이르러 전망대에 서니 멀리 소백산 정상과 구름 아래 월악산, 금수산의 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쓰러졌다가 다시 세워졌다는 주목 고사목은 그 자태만으로도 산객들에게 훌륭한 포토존이 되어주었다.
천동삼거리에 올라서니 우려했던 칼바람은 없었다. 소백산 특유의 황량하면서도 장엄한 능선이 연화봉까지 이어지고, 멀리 정상 비로봉에는 인증샷을 찍으려는 산객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바람이 잦아든 정상은 평온했고, 우리는 2026년 첫 소백산 산행의 기쁨을 사진으로 남겼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오르내리던 이 길을 중년이 되어 다시 걷는 감회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5. 다시 일상으로
하산길은 올라올 때보다 훨씬 북적였다. 마치 북한산을 연상케 할 만큼 많은 이들이 소백산을 찾고 있었다. 불과 2시간 사이, 1,300m 아래의 상고대는 마법처럼 사라져 있었다. 쉼터마다 인파로 가득해 우리는 걸음을 재촉했다.
총 5시간 10분간의 산행. 단양 읍내에서 뜨끈한 점심으로 허기를 달래며 친구와 다음을 기약했다. H는 집으로, 나는 다시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고향 산의 기운을 가득 담아온 덕분에 당분간은 존재의 이유를 묻지 않아도 충분히 힘차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