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덕면사무소가 있는 신흥리에서 다시 출발한다.
지난번 광덕면 사무소가 있는 신흥리 무신교차로에서 종료하여 다시 시작한다.
도시 간 철도인 무궁화를 영등포에서 타고 천안까지 이동한 후 천안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광덕리까지 왔다. 우리나라는 대중교통이 발달되어 있어 이러한 여정에 적절하게 이용할 수 있다. 시외버스를 이용하여 다니는 것보다 기차와 시내버스를 적절히 이용을 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교통체증에 걸려서 많은 시간을 허비할 필요도 없고 피곤한 몸도 기차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어서 좋다. 나는 그래서 버스보다는 기차다.
차령터널은 천안논산 간 고속도로를 이용할 때마다 이용을 하였고 국도 23호선의 차령터널, 차령고개를 넘나드었지만 옛 고개를 넘어가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넘어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 국도 23호선 구간이 편리한 것 같지만 산그늘을 이용할 경우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쌍령고개에서 시작하여 계룡면까지 간다. 차령고개를 거쳐 중간에 공주시를 거친다.
고려 태조 왕건은 자식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훈요십조』에서 차령 이남과 공주강(금강) 밖의 지세가 반역형이므로 인심도 그러할 것이라 하여 차령 이남 사람을 공직에 등용하지 않으면서 차별하기도 했다.
차령은 충청에서 호남지방으로 향하던 길목에 있는 고개 가운데 아주 험준했던 고개 가운데 하나이다.
차령 서쪽에 있는 봉수산은 공주 월성산에서 고등산으로 보낸 봉수를 받아 천안으로 보내던 봉수터이다. 이 봉수대를 중심으로 동쪽에 있던 고개가 원터고개 또는 수레고개라 불린 차령이다. 봉수대의 서쪽에 있던 고개는 이수원고개 또는 쌍령이고개라 불린 쌍령(雙嶺)이다.
조선시대에 관리들은 주로 차령을 이용했고, 일반 나그네들은 차령보다 20리 정도가 짧은 쌍령을 넘어 다녔다고 한다. 쌍령은 천안 이남에 있는 사람들이 이동하던 삼남대로의 중요한 고갯길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쌍령은 차령보다 고도가 50m가량 높았고 고개로 가는 길목에 마을이 없어, 관로로 이용되었던 차령을 넘는 신작로가 먼저 개통되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출발하였을 때 몰랐으나 천안은 약한비가 온다. 일기예보를 보니 비가 곧 그친다고 한다. 멀리까지 와서 이정도 비에 시작을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시작을 한다. 우산과 비옷은 준비를 항상 배낭 속에 있는 것인만큼 문제가 없다, 특히 임도에서 시작한 만큼 우산을 쓰고 거리를 걷는 것이나 진배가 없다. 비는 쌍령고개 정상에서 그쳤고 신선한 기분을 느꼇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옛길이지만 임도도 정비되어 자동차도 다닐 수 있다. 아침 비와 4월의 초록이 어울려 아침의 산은 시원한 느낌이며 신선의 세계로 들어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쌍령고개를 오르면 신선의 세계로 들어서는 기분이며 임도를 이용하여 4륜구동 자동차가 올라온 흔적이 있다. 길 양옆에 두룹이 있나 찾아 보았으나 주인이 있는 밭두둑에 두룹이 있다. 저것을 채취하면 걸린다. 쌍령고개는 사실 고개가 2개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첫 번째 고개를 올랐다가 내려 간 후 마을을 지난 새로운 고개로 올라가서 봉수산을 타고 이동하다가 차령이 목적지가 되어 버린다. 조선시대 삼남길이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봉수산 정상을 옆으로 끼고 임도를 타고 이동한다. 우리는 산의 정상이 목표가 아니므로 무조건 길을 따라 걸을 수밖에 없다. 봉수산 정상에 봉수대가 있다는 데 여유가 좀 있었으면 하였는데 그렇치 못하다. 쌍령이나 차령이나 모두 200m 남짓의 고개인 만큼 그렇게 힘들지 않고 오르며 봉수산을 트래킹 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냥 지나친다. 차령에 도착하니 차령고개라는 이정표가 눈에 띈다. 차령도 이제는 차령터널이 있어 차량통행이 거의 없다. 차령터널로 무심한 차량들이 속도를 내어 지나간다.
천안에서 논산이나 공주로 이동할 때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경우 민자고속도로이고 국도 23호선을 이용하는 경우 그렇게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인지 국도를 많이 이용한다. 특히, 추석이나 설 등 명절에 서울에서 호남지방으로 가는 많은 귀성객들은 천안논산고속도로를 피해 우회구간으로 23번 국도를 많이 이용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제 차령을 넘으면 공주시다. 공주는 백제의 한때의 도읍지인 만큼 다양한 볼거리가 많고 예전에는 공주를 거치지 않으면 호남지방으로 갈 수 없었기에 교통의 요충지였으나 고속도로와 철도가 교통의 중심이 되면서 교통의 축이 대전을 중심으로 이동하여 공주는 잊혀져 가는 도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천안에서 공주로 넘어오면서 가장 중요한 특징이 호두나무가 많았으나 이제는 밤나무가 많다. 정안밤이 유명한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차령을 벗어나서 천안논산고속도로와 23번 국도 사이에 있는 마을 옆으로 정안천을 끼고 걷는다. 세종시가 정안 IC에서 나와서 접근을 하는 만큼 많은 교통수요가 있고 하여 정안 IC는 어느 IC에 버금가게 교통량이 많아졌다고 할 수 있다.
공주에는 백제의 도읍지였던 만큼 다양한 유적이 많다. 삼남길과 연결되는 주요 유적을 살펴보면 공산성, 공주 금강철교(公州 錦江鐵橋)이며 금강, 정안천, 혈저천을 지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정안천 뚝방을 따라 삼남길은 공주시 중심으로 이동한다. 정안천을 이리 건너고 저리 건너고 하면서 지루하지 않게 정안천 뚝방길을 지속적으로 공주시 중심으로 이동한다.
금강철교에 도착하여 건너려고 보니 이제는 보존하여야 해서 차량통행은 일방통행으로 변경되었고 인도가 중심이 되었다. 공주시 금성동과 신관동을 연결하는 교량이다. 이름은 '철교'이지만, 경상남도 창녕 남지철교와 마찬가지로 철도 교량이 아닌 도로 교량이다. 1932년 일제강점기 하에서 건립됐으며. 2006년 3월 2일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232호로 지정되었다
금강철교를 지나면서 공산성을 보니 그림 같은 풍경이다. 이를 담아 본다. 하늘의 구름이 금강에 비치어 그림을 그렸고 공산성의 산그늘이 또한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금강에도 물이 흐르지 않는 공간을 공주시는 아름답게 가꾸어 놓아서 금강철교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다.
공산성에 도착하였다. 공산성은 2015년,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그래서 입장료를 내고 공산성에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입구가 아닌 출구 쪽에서 들어가면 입장료를 내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공산성은 고구려가 백제를 침략하지 못하도록 천혜의 방어 수단인 금강을 끼고 있다. 한성에서 고구려의 압박으로 도읍지를 옮기다 보니 공주로 옮겼다고 보면 될 것이다. 특히, 금강을 끼고 서해로 나갈 수 있으니 한강과 같이 수운을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같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공주 즉, 웅진에 잠깐 머무르다 부여로 다시 천도하게 된 이유는 공주가 그렇게 넓지 않는 산악지역으로 대부분의 평지는 금강 북쪽에 있어 도시를 확장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었다. 부여로 도읍지를 바꾸므로 도시의 확장에 어려움이 있는 문제를 해결하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삼국시대에 한성에서 웅진으로 도읍지를 바꾼 백제 입장에서는 천혜의 방어선이 있는 금강을 이용할 수 있는 곳이 적절하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공산성(사적 제12호)은 백제시대의 유적으로 웅진백제시대 (475~538) 때 왕이 머물렀던 성이다.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흙으로 지은 포곡형 산성이다. 지금은 석성의 형태로 남아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때 개축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조선시대 때 인조반정 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인조는 공주로 피난을 오게 되고 6일간 공산성 안에 어떤 두 나무 사이에서 반란이 종결되기를 기다렸다고 알려지고 있다. 얼마 후, 인조의 바람대로 이괄의 난이 진압되자 인조는 자신과 함께 서 있었던 쌍수에 정삼품의 작위를 내렸고 쌍수가 보이는 곳에 쌍수정이라는 누정을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공산성은 쌍수정, 쌍수정사적비, 명국삼장비, 영은사, 연지 및 만하루 등 백제시대로부터 조선시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유적들이 남아있다.
토성을 내려가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간다. 공산성과 작별이다. 공산성을 벗어나는 지점에 있는 집들과 골목이 이채롭다. 아주 시골마을에 있을 때 그 모습이 그대로다.
공산성을 벗어나 이제는 계룡면으로 가야 한다. 계룡시도 있고 계룡면도 있다. 공주시 계룡면이다.
계룡면으로 가기 위하여 혈저천을 따라간다. 혈저천을 따라가면서 특이한 것은 그저 뚝방이 이렇게 생겼구나 지루하다고 할 수 있겠다. 주변의 경치를 쳐다본다. 멀리 계룡산도 보이고 23번 국도를 이웃하면서 걸을 뿐이다.
계룡면은 충청남도 공주시의 남부에 위치한 면이다. 북부와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약 200-300m의 산지가 형성되어 있다. 면의 중앙부에는 혈저천과 월암천이 남북으로 연이어 흘러 연변에 충적 평야가 펼쳐져 있다. 특히 월암천 연변의 충적 평야는 금대들 · 상평들 · 산정들 등으로 구성된 대규모 평야로 화평들과 이어진다. 계룡산이 있는 지역으로 갑사의 창건과 들이 펼쳐져 있어 일찍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 백제 때에는 웅천, 신라 때에는 웅주, 고려 때는 공주목에 속하였다. 현재 월암리 · 봉명리 · 기산리 · 화은리 등 17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공주목에 속하고 익구곡면(益口谷面)과 진두면(辰頭面)지역으로 익구곡(益口谷)의 이름을 따서 익구곡면이라 하였다. 1914년 익구곡면과 진두면의 일부를 병합하고 계룡산의 이름을 따서 계룡면이라 하엤다고 한다 면사무소를 경천리(敬川里)에 두었다고 한다.
현재는 월암리에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다.
계룡면 사무소가 있는 월암리에 도착하니 거의 7시가 되었다. 오늘도 48km를 걸었다. 산길은 공산성, 쌍령을 제외하고 없어서 그런지 거의 평지길을 걷다 보니 시간당 거의 5km를 걸어서 그런지 10시간에 48km를 걸었다. 아침 9시부터 걸어서 오후 7시에 끝났다. 여기서 어떻게 서울로 갈 것인지 고민을 한다.
이웃한 KTX 공주역을 처음 생각하였는데 택시로 이동을 하려고 주민들에게 물어보니 시외버스정류장을 관리하는 아저씨 왈 여기에서 공주역으로 가는 것보다 조금 있으면 시외버스가 오는데 그것을 타고 논산역으로 가라고 한다. 여기서 논산까지는 3-40분이면 갈 수 있고 거기에서 기차를 타면 된다고 한다.
다시 올 때에도 역순으로 올 수 있기에 논산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논산역에서 새마을호를 타고 서울로 복귀한다. 이제 서울이 점점 멀어지니 대중교통을 이용함에 있어서 속도가 빠른 것을 이용하는 것 같다. 처음에는 지하철, 다음에는 무궁화호 이제는 새마을호다. 조금 있으면 KTX로 바뀔 것이다.
서울을 떠난 지 4회 차에 벌써 공주를 지나 다음에는 논산을 거쳐 호남지방으로 진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래도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