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도보여행 강화나들길 17코스, 18코스

4일차

by 김기만

강화를 걸으면서 역사박물관 고인돌 화문석을 생각하게 하는 길이다. 연개소문도 있다,

강화역사박물관에 주차하고 걷기 시작한다. 이곳은 하정면이다. 산으로 나들길이 안내를 한다. 역사박물관 초입에서부터 연개소문 안내다. 커다란 비석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유적비’가 고려산을 바라보며 서 있다. 숭조회가 이를 세웠다고 한다. 자료를 찾아보니 연개소문의 탄생과 성장에 대한 역사적 자료는 아직 발견된 것이 없다고 설명되어 있고 이곳에 연개소문과 관련된 전설이 있을 뿐이다.

이곳의 전설에 의하면, 연개소문은 고려산의 우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자신의 성도 ‘못 연(淵)’으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근처에는 연개소문이 무술을 연마하기 위해 말을 타고 달렸다는 치마대(馳馬臺), 말에게 물을 먹였다는 5개의 우물[五井], 그리고 집터가 아직 남아 있다(출처 :인천시 홈페이지)

봉천산을 올라갔다가 강화 하점면 5층 석탑 방향으로 하산을 한다. 산아래에서 봉천산을 보았을 때는 밋밋한 산이었으나 막상 산에 접근하여 오르니 가파르다. 능선길을 이용하여 산을 오르는 것도 만만치 않다. 섬이란 특성을 감안하지 않으면 섬 산행에 있어 어려움이 당연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나들길에서 산 정상을 가는 것은 이곳과 교동도 석모도 코스 3개에 불과하다. 292m 산에 오르면 봉화대가 있다. 고려 시대에 하음백(河陰伯)으로 봉해졌던 하음 봉씨(河陰奉氏) 봉천우(奉天佑)라는 사람이 봉천대를 쌓았다고 전하는 산이다. 봉천우는 봉천대에서 자신의 조상을 도와준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산의 정상부에는 봉수가 설치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하음산 봉수는 동쪽으로 송악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교동현 화개산에 응한다."라고 되어 있다.

어디에나 전설이 있고 북쪽에 가까우면 북을 볼 수 있다. 미지의 세계인 북쪽에 대하여 미스터리 한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이 될 수 있다. 이곳에서도 북을 볼 수 있다. 날씨가 좋을 때는 개성의 송악산도 보인다고 한다.

봉천대는 조선시대에는 봉수대 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의 유적인 석탑을 만난다. 그런데 나는 이 석탑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어디에나 사찰에 있는 것인데 석탑이 있다고 만 하지 그 의미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찾아보았다. 탑은 부처의 사리를 모셔놓고 예배하는 것으로 고대 인도에서 무덤을 이르는 말인 ‘스투파’가 전래되는 과정에서 ‘탑파’로 불리게 되고 줄여서 ‘탑’이 된 것으로 추정되며, 우리나라의 탑은 재질에 따라 목탑, 석탑, 전탑으로 나뉘고 탑의 이름은 그 탑이 있거나 옮기기 전에 있던 자리, 층수, 재질에 따라 붙인다고 한다. 예를 들어 불국사 삼층석탑은 불국사에 있는 돌로 된 3층 탑이라는 뜻이다.

석탑은 발견 당시 무너져 있었으며 1960년 수리하여 다시 세웠다고 한다.


이제는 석조여래입상 방향으로 전환한다. 석조여래입상 앞에 유래가 적혀 있다. 고려시대 마을 사람들이 빨래하는 연못에 함이 떠있어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있어 아이를 임금에게 바쳤고 임금이 봉우라고 이름을 짓고 잘 기르라고 명을 하였다고 한다. 그 봉우가 자라서 나라에 많은 공을 세웠고 그 5대손 봉천우가그 여인의 은공을 갚기 위해 봉은사를 짓고 화강암에 그 여인을 닮은 석조여래입상을 새겼다고 한다. 이 봉우가 하음봉씨의 시조라고 한다.

마을을 내려오면서 이 생각 저 생각할 수 있다.

강화에 많은 전설이 있다. 연개소문도 있고 봉씨의 시조도 있다. 여기에 고인돌 군집이 있다. 선사시대에 이곳의 집권세력이 강력하였다고 볼 수 있다. 아니면 이웃한 한반도에 강력한 집권세력이 있어서 강화를 이용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강화하면 생각나는 것이 화문석이다. 강화군청 홍보자료에 따르면 강화 화문석은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어 100여 년 전 조선 왕실로부터 화문석의 도안을 특수하게 제작하라는 하명을 받고, 당시 백색 자리의 생산지인 강화군 송해면 양오리 한 충교씨가 연구한 결과 도안에 의한 화문석 제작에 성공, 다양한 도안 개발과 제조 기술개발로 오늘에 이루고 있다고 한다. 겅화의 왕골 돗자리는 화문석이라고 명명되었으며 고려시대의 주요 무역품의 하나로 우리는 배웠다.(고려와 송나라의 무역 시 고려는 송나라에 비단, 옥, 차, 책 등을 수입하였고 인삼, 돗자리, 나전칠기 등을 수출하였다)


요즈음은 중국산이 많이 점령하고 베트남산 대나무 자리가 거실을 점령하고 있어서 그렇지 예전엔 좀 있는 집에서는 왕골 돗자리를 사용하였다.


강화에서는 현재 화문석의 상품화 등을 위하여 문화관을 건축하고 이를 전수하도록 하는 한편 군청 홈페이지 등에서도 이를 홍보하고 있다. 화문석 체험관도 있다. 어릴 적 돗자리를 만드는 것을 보았는데 그 품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 품과 왕골이 돗자리의 상품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다. 강화도 왕골 돗자리가 화문석이라는 명명되고 특산품으로 나타나기까지 왕골을 잘 재배하였고 그 왕골을 수공업자들이 잘 만들었기 때문이다. 서로가 노력을 한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강화의 민가는 붉은 지붕이고 지붕의 경사가 매우 가파르다. 눈이 많이 오면 지붕이 가파른 것으로 알고 있다. 눈이 지붕에 쌓여 있으면 지붕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가파르게 하여 눈이 쌓이지 않도록 하고 있다. 강화도의 민가 지붕이 이러한 형태로 볼 때 눈이 예전에는 많이 왔다고 볼 수 있다.

강화 고인돌 공원에 도착하였다. 유네스코에 등록된 정보에 따르면 한국의 고인돌은 거대한 바위를 이용해 만들어진 선사시대 거석기념물로 무덤의 일종이며, 고창, 화순, 강화 세 지역에 나뉘어 분포하고 있고 한 지역에 수백 기 이상의 고인돌이 집중 분포하고 있으며, 형식의 다양성과 밀집도 면에서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렵다고 한다.. 이 세 지역의 고인돌은 고인돌 문화의 형성 과정과 함께 한국 청동기시대의 사회구조 및 동북아시아 선사시대의 문화 교류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산이라는 설명이다.

학창 시절 고인돌 하면서 배운 것이 여기에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북방식 고인돌은 지주가 큰 돌이며 덮개도 큰 돌이다. 남방식은 지주가 되는 돌은 그렇게 크지 않다. 전남 화순에 가면 많이 볼 수 있다. 강화도 고인돌 공원에 있는 고인돌은 이름이 붙여져 있다. 고인골 공원까지 오는 과정에도 나지막한 언덕을 걷을 때에도 번호가 부여된 고인돌 군을 볼 수 있다.

강화역사발물관이 고인돌 공원 옆에 있고 자연사 박물관도 있다. 어린이들이 지겨워하면 안 되지만 어린이들을 데리고 오면 하루 종일 탐방을 할 수 있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번호라고 한다. 고인돌은 기원전 1000년경 동아시아 선사시대의 주목할 만한 유적으로 티베트, 쓰촨, 간쑤와 같은 중국 서부와 산둥 반도, 일본 규슈 북서 지방과 같은 해안 지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고창의 고인돌은 기원전 7세기경, 화순의 고인돌은 5-6세기경인데 비하여 강화의 고인돌은 역사를 알 수 없지만 더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고인돌이 무너진 곳에서는 일반인들이 보았을 때는 그냥 돌들의 집합체로 밖에 볼 수 없는데 이것도 고인돌이라고 한다.

점골, 삼가리, 고천리 고인돌군이 동일한 형태로 조성되어 있고 관리되고 있다. 강화 고인돌 유적은 연안 섬 강화도 산기슭에 위치해 있다. 강화의 고인돌은 다른 유적들보다 높은 지대에 있을 뿐만 아니라 보다 초기의 형태가 많다고 설명이 되어 있다. 사실 고천리 고인돌군은 고려산 능선에 있다. 고려산 능선까지 올라오는 계곡을 따라 고인돌 군이 형성되어 있고 능선에 올라서 보니 고려산 능선이었으며 능선 이곳저곳에 고인돌군이 형성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고려산 능선을 걸어서 낙조봉을 지난 낙조대에 이른다. 대는 봉우리를 뜻하고 특별히 경관이 좋은 곳을 말한다. 낙조대도 동일하다. 강화 8경 중의 하나로 일몰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연말에는 마지막 날 해가 바닷속으로 떨어지는 장면을 보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몰린다고 한다. 낙조대에는 적석사에서 관세음보살상을 봉안하여 불자들이 수행을 하는 장소였으나, 일몰을 보기 위해 모여드는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철과 나무로 구조물을 만들어 안전하게 석양을 감상하도록 하였다


적석사는 내가면 고천리 고려산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절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 말사고 416년(장수왕 4) 인도 승려가 연꽃을 날려 떨어지는 곳에 지었다는 사찰이며, 적석사 사적비는 조선 숙종 40년(1714)에 세워진 것으로 높이 3.94m, 높이 3.4m, 너비 0.69m이다. 비문에는 사찰의 중건, 중수 상황과 고려시대 몽골침입에 대항하여 강화에 도읍을 옮겨 왔을 때의 상황 등이 기록되어 있다. 글씨를 쓴 사람은 조선 후기의 명필인 백하 윤순(1680~1741)이다.


마지막으로 오상리 고인돌군이다. 오늘은 연개소문으로 시작하여 고인돌로 끝났다.


다시 고인돌 공원 주차장으로 가기 위하여는 산을 넘어 원위치하던가 내가면 사무소까지 이동하여 외포리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야 한다. 산을 넘기에는 지쳤고 내가면 사무소 입구까지 걸어가서 버스를 탑승하고 차량을 회수를 하려 간다. 내가 저수지를 다시 보면서 저기에서 낚시하는 사람들은 세월을 낚을까 아니면 고기를 낚을까 이리저리 쳐다본다.

저수지의 물고기가 낚시꾼을 부르듯이 산이 등산객을 부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