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도보여행 강화나들길 9코스, 10코스

5일차(교동도)

by 김기만

오늘은 본도가 아닌 교동도에서 나들길을 걷는다. 예전에는 교동도로 가기 위하여는 배를 타고 가야 했으나 이제는 연륙교가 있어 쉽게 간다. 하지만, 연륙교를 지나기 전 북한과 인접하여 군인들이 검문을 하고 민통선 안으로 들어갈 때 신고하는 모든 것을 신고하고 들어가야 한다. 차량도 들어갈 때 신고하고 사람도 신고한다.

이러한 곳에서는 도둑도 없고 강도도 없을 것이다. 이곳을 빠져나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북한과 인접해 있어서 대북방송도 들리고 북한의 해안가 풍경도 볼 수 있다. 화개산에 올라가서 망원경을 통해 보지 않더라고 북과 가까워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교동도는 동쪽에 화개산, 남서쪽에 수정산, 서북쪽에 율두산을 중심으로 세 섬으로 이뤄져 있었다. 이들 섬 사이로 한강, 예성강, 임진강에서 흘러온 토사들이 쌓여 섬 주변으로 하구 갯벌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고려 대몽항쟁을 위한 강화 천도 때 군량미 확보 차원에서 비롯된 간척과 매립은 조선을 거쳐 일제강점기에 대규모로 진행돼 지금의 교동도가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한다.


교동도를 들어오기 위하여서 자동차를 이용하여 교동대교로 들어가기 전 군 검문소를 거치면서 신상을 기록하였고 임시 출입증을 받았다. 다리 입구에서 다시 한번 확인을 한다. 많은 사람들이 교동도의 대룡시장을 방문하고 구경하기 위하여 섬으로 들어온다. 아침 일찍 오는 사람이 없어서 우리는 기다림이 없이 들어왔다. 자동차를 교동면 사무소에 세우고 고구촌을 거쳐 영산골로 들어간다.


이곳에 조선시대 한증막이 있다. 움집 형태였으며 이곳보다는 수정산에 있는 것이 더 원형에 가까워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연산군의 유배지를 보았다. 교동도는 예로부터 왕족들의 유배지로 고려 희종을 비롯해 조선의 안평대군과 임해군, 능창대군이 이곳으로 유배를 왔다. 강화군에서 이곳을 추정하여 유배지로 만들어 놓았다. 사실 연산군이 중종반정에 의하여 강화 교동도로 유배를 온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연산군은 강화도에 유배되었고 다시 교동도로 이배 되었다. 유배생활 중 그는 폐세자 황이 사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식음을 전폐하며 괴로워하였고, 강화군 교동도에 유배된 지 2개월 뒤인 그해 음력 11월에 역질을 앓다가 11월 6일 역질, 화병 등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는 숨을 거두기 직전 부인인 폐비 신씨가 보고 싶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연산군은 사망 후 처음에는 교동도에 매장되었다가 현재는 우이동에 있는 묘역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사실 승자의 역사에서 연산군이 폭군이었다는 것이 기정 사실화되어 있지만 우리가 어릴 적 광해군에 대하여 폭군으로 배웠으나 어느 시점이 지난 다음 새로운 역사가 등장한 것을 보면 승자의 역사를 그대로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연산군 유배지는 초가집으로 만들어져 있다.

유배지를 벗어나 화개산으로 올라가다가 효자묘를 만난다.

화개산 효자묘에 대한 설명이 있다. 화개산성 입구 근처에 있고 효자가 아버지의 병이 위증하자 자기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했다고 한다. 사실 피를 마시는 것이 현대의학에서 보면 그렇게 잘되었다고 볼 수 없지만 예전에는 피를 마시게 한 행위가 효자의 상징이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효자는 이곳에서 삼년동안 시묘를 하였고 그 자취가 남아 있다고 한다.

이제 화개산성이며 화개산이다. 화개산에서 보면 멀리 북녘땅도 보인다.


화개산성은 고구려유적이라고 한다. 강화군청 홈페이지에 가보면 화개산은 산세가 우뚝 솟아 마치 뚜껑을 활짝 벌려 놓은 것과 같다 하여 화개라는 명칭이 붙었고 교동도에서 가장 높은 고지로서 사방이 완전히 조망되는 관측상 매우 유리한 고지이기 때문에 산성을 쌓았다고 한다. 이 산성은 전체 둘레가 2168m에 이르는 규모가 큰 석성이며, 내성과 외성의 2중 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내성은 그 둘레가 1013m로서 화개산의 정상부를 감싸고 있는데, 이곳은 절벽을 자연 성채로 활용하고 있으며, 내성의 일부를 북쪽으로 길게 빼어 긴 용도를 형성하고 있는 것 등이 특징이라고 한다. 외성은 전체 둘레가 1155m 정도이며, 외성의 석축은 대부분 무너져 잡석만이 성벽 선을 따라 흩어져 있다고 한다. 외성의 성벽이 이처럼 많이 붕괴된 것은 1591년(선조 24)에 지현 이여양이 외성을 철거하여 읍성을 축조하는 데 사용하였고, 또 교동이 수군의 중심지로서 부각되었던 까닭에 육상의 산성은 그 규모에 비하여 전략적으로 크게 중요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화개산에서 화개사로 내려와야 하나 잘못하면 다른 길로도 갈 수 있다. 이정표도 잘못되어 있고 나들길 표시도 이곳저곳 되어 있다. 화개사를 거쳐 교동향교를 지나야 정상이라고 할 수 있다. 화개사에서 교동면사무소로 가는 단축코스가 있지만 대부분은 화개사에서 교동향교로 간다.

우리는 길을 잘못 들어 교동향교도 화개사도 들르지 못하였다. 처음에 이렇게 걷고 난 다음 화개사, 화개산, 교동향교를 올 기회가 있어 이 길이 정상이란 것을 알았다. 그리고 화개산에서 화개사로 간 다음 교동향교까지 다시 걸었다.


화개산에서 면사무소 방향을 잡고 내려오다 화개사 갈림길에서 화개사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화개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자세한 내력은 전하지 않는다. 1840년경 화재로 소실되었고, 1915년에는 붕괴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전등사(傳燈寺)의 말사였는데, 1928년 3월 승려 정운(晶雲)의 불사(佛事) 기록이 남아 있다. 1967년 다시 화재를 겪었고 다음 해에 중건되어 오늘에 이른다. 수령이 200년 된 소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화개사는 그렇게 큰 사찰은 아닌데 소나무가 참 멋있게 생겼다고 볼 수 있다.

불교와 유교가 접하는 장소가 여기에 있다. 불교에서 유교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다. 서로 간에 왕래를 한 것은 다산이 강진에 유배 갔을 때 이야기 가장 유명하다. 이곳에도 길이 연결되어 있다. 다만, 이곳은 사찰과 유교의 향교다. 교동향교는 고려 인종(仁宗) 5년(1127년)에 창건된 것으로 한국에서는 가장 오래된 향교이다.

충렬왕(忠烈王) 12년(1286년)에 제거(提擧) 안유(安裕)가 왕을 따라 (元)에 가서 공자(孔子)와 주자(朱子)의 상을 처음 그려왔고, 김문연 등을 중원에 보내 선현과 72 제자의 상을 그리게 하였으며 각종 제기와 악기, 육경과 제자백가의 책, 역사서를 사들여 고려로 가지고 오게 했는데, 김문연 등은 서해 방면으로 귀국하면서 지금의 교동에 기착, 가지고 온 기물과 책들을 교동 향교에 잠시 봉안하였다가 개경으로 이안하였다고 한다. 영조(英祖) 17년(1741년)에 강화부사 조호신(趙虎臣)이 화개산 남쪽 계곡,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예전의 향교터는 지금의 고구리에 남아있으며, 현재도 구향교골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이제는 월선포 선착장으로 이동한다. 월선포 선착장은 연륙교가 개통되기 전에는 교동도로 들어오는 출입구였다고 한다. 예전의 영화는 사라졌고 조용한 마을이 되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월산포 선착장에서 멀리 연륙교를 담아보았다.

제방길을 따라 동진포로 간 후 교동읍성으로 들어간다. 화개산 남쪽의 읍내리에 있는 교동읍성은 조선조 인조 7년(1629년) 수영이 설치됐을 때 축조된 것으로 도읍 전체를 둘러싸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고 군데군데 문을 내어 바깥과 통하게 했다. 성의 둘레는 약 430m, 높이 약 6m로 동남북쪽 세 곳에 성문을 두었고 각 문에는 망을 보기 위해 문루를 세웠는데 현재는 반원 형태의 작은 남문인 홍예문만 남아 있어 섬의 오래된 역사를 보여준다

교동읍성을 벗어나 남산포 선착장에 가본다. 예전 삼도수군통어영지가 여기인데 관리는 엉망이다. 이곳에는 인조 11년 수군 통어영을 설치하여 수군을 훈련하였으므로 배가 정박할 시 묶어두었던 계류석이 남아 있다.

그런데 산을 살짝 올라가니 사신당지가 있다. 고려 때 송나라 사신이 해로를 이용하여 배로 왕래할 때에 교동도 앞바다를 지나면서 무사 태평하기를 기원하며 제사를 지낸 당집이라고 되어 있다.. 당집을 지었다는 것은 그만큼 바닷길은 험악하였다고 보면 될 것이며 연안을 끼고 배가 움직이다가 그래도 가볼 만한 곳에서 바다를 건넜다고 보면 될 것이다. 해변 바위에는 정으로 쪼아 만든 층계가 아직도 남아 있어 당시의 모습을 짐작케 해준다고 설명이 되어 있다. 고려 때 이곳은 예성강, 한강의 입구이므로 송나라와의 교역에 있어서 중요한 해로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제는 길을 따라 대룡시장에 도착했다. 대룡시장은 현재는 시골장터, 옛 모습 등을 보러 오는 사람들로 번창하고 있다. 옛날스럽지만 정겨운 오래된 간판이 손님을 기다린다. 옛 다방도 있고 미장원도, 이발관도 있다. 방앗간에서 가래떡을 만들어서 팔기도 한다. 사실 나 어릴 적 면소재지에 가면 이러한 풍경이 있어서 그 시절이 생각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나보다 연장자분들은 그때가 어려고 힘들면서 살만했다고 한다. 그때를 동경하기도 한다. 근현대사 박물관에 온 것이나 아니면 영화 세트장에 온 것 같다.

대룡시장에 유명한 꽈배기를 사 먹고 다음 코스로 이동을 준비한다.


이제는 10코스로 간다. 10코스는 지루함의 연속이고 겨울에는 절대 이코스를 걷는 것을 권장하지 않는다. 교동도는 간척된 섬으로 3개의 섬이 연결된 섬이다. 6·25 때는 활주로로도 사용했던 곧게 뻗은 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이것이 활주로였다는 사실을 잊는 순간 이렇게 지루한 곳이 되고 만다. 공군부대에 근무하면 활주로를 어떻게 지나다닐까 생각하지만 그들은 자동차를 타고 지나간다. 하지만, 오늘은 걸어가야 한다. 드넓게 펼쳐진 교동평야를 보면서 논의 길이를 가늠해보기도 한다. 도대체 저 논 하나에 모내기를 할 경우 지금처럼 이 아닌 옛날처럼 이면 하루 동안 모심기를 다 할 수 있을지도 궁금하다. 우리들 어릴 때는 다락농이 있는 산촌에 살았기 때문에 이같이 넓은 논을 보면 부러울 뿐이다. 평야가 끝날때 쯤 바닷가가 가까울 때즘 거대한 호수를 연상케 하는 난정저수지를 만나게 된다. 난정저수지는 농업용수 개발을 위해 난정리와 무학리의 일부 주민을 이주시키고 1991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2006년 완공하였다고 한다. 공사기간동 길고 저수량도 엄청나다 6,214천 톤이라고 한다. 난정저수지에는 요즈음 마을 주민들이 해바라기 심어 해바라기 마을정원이 유명하다고 한다.

난정저수지 뚝을 따라 걷다 보면 수정산에 도착한다. 수정산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한증막이다. 조선 후기부터 1960년대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황토와 돌을 이용하여 축조하였고 둘레가 18m, 높이는 2.5m다. 소나무로 불을 지펴 그 열기로 가열하고 일정한 온도가 되면 물을 뿌려 불을 끄고 이때 발생하는 수증기로 공기가 가습 되면 입욕자는 헝겊이나 가마니를 두르고 들어가 땀을 내는 방법을 탕욕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을 요즈음의 한증막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무리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에게 있어서 어떻게 사용되었을까 하여 자료를 찾아보니 대부분 땀을 내어 질병을 치료하는 형태로 사용된 것 같다. 조선시대에 있어서는 한증소로 이용되고 있었고, 한증욕(汗蒸浴) 또는 발한욕(發汗浴)이 의료에 언제부터 이용되기 시작하였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문헌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 세종 때부터이다. 세종 4년(1422) 8월 한증욕이 병을 고치는 데 효과가 있는지를 예조에서 조사하라고 지시한 기록이 있고, 세종 10년조에 “동서활인원(東西活人院) 및 서울에 있는 한증소의 승인(僧人)들이 병증(病症)을 가리지 않고 땀을 냄으로써 간간이 사망하는 일이 있어 이제 문외(門外)·경중(京中)에 각각 한 곳에 한증소를 두고 전의감·혜민국·제생원에서 그곳에 각각 의원 2인을 보내 그 질병의 상태를 본 다음 땀을 내게 하고, 만일 자세히 진단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이 사망하였을 때에는 의원·승인을 막론하고 모두 죄를 물을 것이고 동서활인원 및 서울에 있는 한증소는 그대로 두겠다고 예조에 청하였기에 이에 따랐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치료용으로 사용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요즈음도 몸이 피곤하면 사우나를 간다고 하는 것과 감기가 들면 땀을 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들은 몸에 땀을 내는 것이 중요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교동의 한증막은 고구리, 봉소리 등에도 있었으나 본래의 모습을 간직한 곳은 수정산이 유일하다고 한다. 선조들의 치병과 목욕문화를 연구할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볼 때 움집보다는 발달되어 있다. 무덤 속에 들어가 있는 형태로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수정산을 지나고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머르메로 가는 길은 옛사람들의 일상이 풍경이 돼 남아 있는 코스다. 머르메는 동산리(東山里)의 자연부락으로 가장 큰 마을이라는 뜻의 두산동(頭山洞)이라 했으나 우리말로 ‘머르뫼’로 부르던 것이 와전돼 현재까지도 ‘머르메’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다시 대룡시장까지 걸어가야 한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활주로가 도로 된 갈울 4km 이상을 걸어야 한다. 차량이라도 달리면 먼지가 난다고 보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