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포인트 찾기》〈제14화, 하숙집과 사과서리〉
“신학기가 다가오자 대학가의 하숙비가 평균 20%씩 올랐다. (중략) 지방 학생들은 이같이 하숙비가 인상됨에 따라 등록금·교과서대 등을 제외하고 교통비·잡비 등을 한 달에 5만 원씩 쓴다면 하숙비를 포함해 월평균 최소 9만 5천∼10만 원의 경비가 소요된다. 대부분 하숙업자는 하숙비를 20% 이상 올려도 집세·주식비 등의 물가 인상률이 이보다 커 하숙집은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 때문에 신촌 일대의 경우 지난 하기보다 3분의 1 정도 하숙업자가 줄어들었다.” 1978년 8월 19일 자 경향신문에서 ‘대학가 하숙비 20%씩 올라 2인 합숙 4만 8천 원 독방 경우 6∼7만 원’이라는 제목의 기사 내용이다.
무렵 쌀 한 가마니 값이 2만 4,000원 정도(농림축산식품부 쌀가격 연도별 추이) 했으니 지금과 비슷한 수준이라 할 수 있겠다. 기사 내용은 서울에 있는 대학생 하숙의 경우다. 지방의 경우 그 절반 가격에 형성되었다.
요즈음도 지방 중소도시에서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10% 내외는 시군을 달리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필자가 고등학교를 입학한 1976년 무렵은 그 비율이 더 높았다. 장항선 통학 거리에 있는 광천 상고(공립, 현 충남드론항공고, 전 광천정보고·광천제일고), 홍성고(공립, 2016년부터 남녀공학), 공주사대부고, 예산고등학교(사립, 백종원 이사장) 등으로 진학했다.
필자가 다니던 예산고에도 보령중학교에서 3명을 비롯해 당시 보령군에서 35명이 진학을 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1천 달러였던 당시만 해도 중학교 의무교육이 되기 전이라 중학교 진학률이 79.5%였고, 고등학교 진학률도 75.5%(문교통계 연보)였다. 이처럼 고교 유학이 많았던 것은 1974년 시작된 고교평준화 초기 단계로 지역에 인문계고등학교 없었던 영향이 컸다. 당시 보령군에는 대천종합고(현 대천고)가 실업계에서 인문계로 전환된 첫해였다.
광천과 홍성 지역으로 진학한 친구들은 대부분 기차로 통학했고, 예산지역으로 진학한 친구들은 반은 기숙사 또는 하숙과 자취하고 반 정도는 기차 통학을 했다. 예산고의 경우 성적이 좋은 경우에는 ‘예덕사’라는 기숙사에 입사할 기회가 주어졌으나, 뛰어날 정도는 아니었던 나는 1학년 때는 산성리에 있는 당고모(아버지의 사촌 누님) 댁에서 하숙했다.
한 달 하숙비는 쌀 1 가마(당시 시세 2만 2,000원)였다. 아버지께서는 매달 방아를 찧어서 시내버스에 싣고 대천으로 나가 기차 수화물이나 정기화물로 탁송을 하면 예산에서 육촌 큰형님이나 당고모부가 예산역이나 정기화물에 가서 찾아오는 형태다.
처음 부모와 떨어져 유학하러 온 나는 당고모 보살핌과 한 학년 위인 형 덕분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 밥과 반찬도 맛있고 잠자리도 편안한 친척 집이었지만, 학교와 거리가 좀 멀었다. 중학교 때 했던 거리의 절반도 되지 않는 2km 남짓한 거리지만, 매일 통학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모님께 말씀드려 2학년부터는 학교 근처에서 하숙했다. 부모 입장에서는 친척 집에 두는 것이 안심이겠지만, 잘해주셔도 마음으로는 부담이 되는 친척 하숙이다.
‘리어카’도 간신히 들어가는 골목길 하숙집이었지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좋았다. 예산군청을 다니던 형님 두 분,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친구 4명도 하숙 동기였다. 나지막한 산 아래 한옥 본채에는 주인 부부와 자녀들이, 바로 앞 별채 시멘트블록 집에는 방 두 개는 고등학생인 친구 2명씩, 본채 옆으로 달아낸 곳에는 군청에 다니는 형님들이 살고 있었다.
일정한 방세와 식비를 내고 남의 집에 머물면서 숙식하는 것을 왜 하숙(下宿)이라 했는지 모르지만, 말 그대로 내가 살던 방은 본채 아래에 시멘트 블록으로 만든 허름한 방이었다. 나오면 바로 신발을 신을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사실 당시 하숙은 달랑 집 한 채 있는 억척 아줌마들이 하는 가내 영세 자영업이었다. 손바닥만 한 자투리 공간이라도 있으면 어떻게 가림막이라도 해서 방 하나라도 더 만드는 것이 하숙 자본의 생리였으니, 별채의 하숙방은 겨울에는 시원하고 여름에는 따듯한 것은 당연지사다.
그곳에서 인연이 되어 40여 년 절친한 친구로 지내고 있는 룸메이트가 예산 고덕이 고향인 친구다. 좁은 방에서 혈기 왕성한 머슴아이 둘이 함께 지내다 보니 ‘쿵쾅’ 소리가 자주 났다. 여드름이 많았던 친구는 후덕함을 무기(?)로 투잡을 했다. 공부도 잘했지만, 성당을 나가며 청춘사업도 발군이었다. 하숙집 위에 사는 모여고에 다니는 학생을 여자 친구(?)로 두고 하숙집 초등생 딸을 메신저로 삼아 연애편지를 주고받았다. 여름 방학이면 친구 아버지가 근무하시는 시원한 가야산 별장에서 며칠씩 호사도 누렸다. 과일이 귀했던 그때, 장난처럼 했던 사과 서리 기억이 생생하다.
3학년 가을 대학 입학 예비고사(1978.11.7.)를 치르고 난 무렵이다. 입시에서 해방된 우리는 성당에 오가며 봐두었던 친구의 제안으로 사과 서리(떼를 지어 남의 과일, 곡식, 가축 따위를 훔쳐먹는 장난)를 모의했다. 날은 달빛이 좋은 길일, 장소는 하숙집에서 100여 미터 떨어져 있는 예산성당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곳, 참여는 비밀을 유지해야 하므로 단둘이서 하기로 했다.
드디어 모월 모일 모시 무렵 모두가 불을 끄고 잠든 것을 확인한 우리 둘은 큰 주머니가 달린 트레이닝복을 입고 작전 개시했다. ‘삑’ 소리가 나는 철문에는 살짝 물을 뿌려 소리를 죽이고, 고양이 걸음으로 살그머니 나가 과수원에 다다랐다. 가시철망이 달빛에 서슬 퍼렇게 가로막고 있었다. 미리 준비한 막대기로 바쳐놓고 교련 시간에 배운 낮은 포복으로 들어갔다.
수확을 앞둔 ‘홍옥’은 아스라한 달빛을 받아 새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크고 실한 것으로 몇 개 딸 찰나. 친구가 낌새가 이상하다며 ‘쉿’ 하며 주의를 준다. 아니나 다를까 저 아래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걸리면 개망신. 아니 큰일이다. 들어온 길이 아래쪽이었으니 학교 쪽인 위로 빠른 오리걸음으로 부리나케 도망갔다. 다행히 위쪽 철망은 큰 공간이 있어 쉽게 빠져나와 학교 근처 오동나무가 심어진 곳까지 왔다. 가쁜 숨을 죽이고 쥐 죽은 듯 숨은 우리는 주인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기를 기다리다 새벽녘에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와서 보니 친구 주머니에는 홍옥 3개 나는 2개였다. 지금 흔하지만, 그때만 해도 귀했던 사과, 그 맛은 꿀맛이었다. 지금도 사과를 먹을 때, 가끔은 그때가 생각나 빙그레 속으로 웃는다. 역시 훔친 사과가 맛있다.
저마다 많은 인연과 기억이 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2년을 한방에서 동고동락한 친구.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고 자수성가하여 튼실한 중견 건설회사를 운영하며 서울특별시와 대한민국 건설업계를 중심에서 든든하게 이끌고 있다. 자주 소통하고, 가끔 편안하게 만나는 좋은 친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