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복의 《무한화서》(2015, 문학과지성사)
'시란 무엇인가'라는 막연한 나의 질문에 대답을 준 책이다. 시골쥐가 새해 벽두에 수도권 전철 2호선을 탄 느낌이다. 객차 다섯 량에 승객 471명이 탔는데, 모두 에티켓을 지키며 타고 있는 서울쥐다.
수도권 전철 2호선은 48.8km다. 43개 역을 순환하는데 90분이 소요된다. 환승역은 22개다. 2호선은 시발역과 종착역이 있는 다른 노선과는 달리 순환선이다. 무한궤도다. 평일 974회, 평일 840회 운행하며 2024년 기준 718만 명이 이용했다. 8개 노선 중 이용객이 가장 많다.
이 책은 '시란 이런 것이다.'라고 무한궤도처럼 반복적으로 알려준다. 끊임없는 반복이지만 경과하는 지점마다 느낌이 다르다. 어떤 곳은 터널을 들어서는 것처럼 어두컴컴하기도 하지만, 어떤 지점은 터널 끝처럼 환해지기도 했다. 한강을 지날 때처럼 가슴이 탁 트이는 순간도 있었다. 시인은 부분을 통해 전체를 드러내는 게 시이고, 부분을 떼어내면 전체가 무너지는 게 시다. 토씨 하나에도 희로애락이 실리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묻어나는 말, 번지는 말이 시다. 시 이거나 시가 아니거나 어느 하나일 뿐, 시 비슷한 건 없다고 했다. 철도면 철도이지 철도 비슷한 건 철도가 아니다. 간격과 이음새가 정확해야 탈선하지 않고 덜컹대지 않는다.
전철을 타면 사람을 찾거나 크게 불편하지 않으면 객차 간 이동을 하지 않는다. 탄 객차에서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다 그 역에 다다르면 내린다. 전철을 이용하다 보면 가끔 내가 탄 객차가 왠지 불편할 때가 있다. 그때는 다른 객차로 옮겨갈 수도 있다. 시인도 이렇게 이야기한다. 수긍은 가지만 해석이 안 되는 것,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전할 수 없는 것. 가령 그토록 바라던 칭찬을 받았을 때 왜 눈물이 나는지 생각해 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대상을 붙잡지도 말고, 놓아버리지도 말라면서 사랑할 때도 미워할 때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대상도 망가지게 된다고. 다섯 량의 객차마다 원심력과 구심력이 잘 버무려져 있다.
환승역과 이용객이 많은 2호선처럼 이 책에서 471명의 승객은 저마다의 개성을 갖고 독자에게 속삭인다. 시는 말할 수 없는 거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버리면 그 전제를 무시하는 거라고. 그러면서 시는 정말 해야 할 말, 하고 싶은 말을 끝내 안 하는 거라고 하면서 이렇게 깔끔하게 결말을 내린다. 시는 희미한 것을 또렷하게 하고, 안 보이는 것을 보이게 하고, 같은 것을 다르게 하고, 없는 것을 있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나는 '살아 있다' 하는 대신 '죽어가고 있다'라고 말하라. '희망은 절망이다'라고 말하고 나서, 그것을 증명하는 게 시라고 했다.
시골 쥐가 객차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예의 바른 승객들의 대화를 듣다 보니 금세 한 바퀴를 돌아보고 탑승 역에 도착한 느낌이다. 시는 자연스러움이다. 스크린도어가 열리면 내린 후에 타고, 타고나서는 다른 사람을 위한 작은 배려를 하는 에티켓처럼. 시골쥐의 새해 소망은 서울쥐처럼 자연스러움을 담은 시 몇 편 쓰는 것이다. 옆에 두고 심심할 때마다 "무한화서"를 타볼 요량이다. 이제 무료 승차가 가능하니 말이다. 성복행 시인열차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