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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느끼고 있는 그건 틀린게 아니에요

피해자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에게 by.리아


2015년 소라넷 공론화 이후, 2017년인 지금까지 사이버 성범죄 문제는 꾸준히 논의되고 있습니다. 


워낙 많은 분들이 이 문제에 대해 발언하다 보니 몇몇 분들은 집 밖에 나가기도 두렵다는 피해자의 토로에 “피해자는 잘못이 없으니 고통스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얘기하거나 “몰카 좀 찍혔다고 너무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고 타이르기도 하는데요, 이는 언뜻 듣기엔 피해자 유발론을 저지하기 위해 페미니스트들이 해왔던 이야기와 비슷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이 말은 교묘하게 다시 피해자를 탓하는 말이기도 하고, 또 다른 가해가 될 수 있답니다.

피해자들은 실제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자기 잘못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도,
실질적인 고통은 멈추지 않습니다.

1.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에서 상담을 진행하고 있는 대부분의 피해자는 직장을 잃었습니다. 그렇게 아무 수입이 없는 칩거 생활 중에 법적 비용, 사이버 장의사 비용까지 월 200~300만 원씩 지불해야 하지요. 경제적으로 벼랑 끝에 내몰린 어떤 피해자는 사채를 쓰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피해자가 스스로 ‘내 잘못이다.’ ‘세상이 무너진 것 같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피해자의 세상이 정말 무너져 버리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뿐입니다.


2. 여전히 사회 주류 의견은 슬럿셰이밍에 물들어 있습니다. 사이버 성범죄를 당한 피해자를 오히려 문란하고 더러운 여성으로 여기고, 꽃뱀으로 모는 분위기가 만연합니다. 성관계를 한 여성을 징벌할 권리가 있다고 착각하는 일부 남성들은 피해 여성의 신상을 털고 학교와 집까지 찾아와 강간, 강제추행, 폭행, 협박 등의 또 다른 폭력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하급심 판결문 사례 조사에서 다수의 성폭력 사건이 사이버 성폭력 사건과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부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담당 수사관까지 ‘여자가 행동거지를 잘못 했을 것이다.’라고 면전에서 피해자를 질책하는 이런 현실 속에서, 피해자가 ‘난 잘못 없으니 괜찮아!’라고 맘을 고쳐먹어야 한다는 식의 말은 너무 폭력적이지요. 실재하는 심각한 사회문제를 개인의 내면에서 극복 가능한 문제처럼 돌리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습니다.


3. 발언자의 맥락도 중요합니다. 그런 발언은 비당사자, 특히 가해 남성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한 번이라도 비동의 유출영상, 몰카를 찾아 봤다면 말을 아껴 주세요. 연예인의 유출 비디오에 대해 쑥덕거린적 있다면, 피해자가 당할 만 했겠지, 라고 생각했었다면. 당신이 바로 피해자를 아프게 했던 그 사람이니까요. 당신의 발언은 누군가를 때려 놓고 “때리는 사람이 잘못한 거니까 넌 고통스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을 건네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 단락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최소한의 염치도 없이 피해자에게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해라’고 말하는 가해자 분들에게 전하는 것이 되겠군요.


이렇게 글을 써도 비슷한 종류의 가해가 쉽게 멈추지 않을 것임을 압니다. 피해자가 고통받을 필요가 없다는 말은 이상적인 사실이기도 하고요. 다만 이상과 현실이 다른 상황이고, 그 지점을 명확히 구분해야 현실을 이상에 가까워지도록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잘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둘을 혼동해선 안 되겠지요. 


지금은 비당사자가 피해자에게 뭐라고 말을 할 시간이 아닙니다.
피해자의 얘기부터 들어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피해자 스스로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럽다고 말하고,
괜찮으면 괜찮다고 말할 것입니다.


어떤 분은 고통을 느끼는 자신에게 다시 화가나 괴로운 부분도 있었다고 얘기해 주셨습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는 점도 알고, 수치스러워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인 것도 아는데 왜 나는 계속 고통스러워하고 있을까? 힘들어할 필요 없다고 머리로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힘들어하는 자신을 자책하느라 오랜 시간을 보내셨다고요.


한사성은 피해자와 발맞춰 가고 싶습니다. 피해자의 위치가 어디든, 당신이 느끼고 있는 그건 틀린 게 아니에요. 누군가는 화를 내고,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아 하고, 누군가는 죽음을 생각하기도 하는 모든 감정에 쉽게 ‘피해자분들은 이래야 한다’고 말을 뱉지 않겠습니다.


저희는 긴 논의 끝에 ‘피해자들이 고통받을 필요 없다는 얘기는 피해자가 스스로 그 위치에 닿았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저희와 함께 당사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함께 천천히 가주는 사람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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