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간의 산티아고 순례기 11 - 순례 8일차
소테스의 가정집 알베르게에서 밤새 와인에 시달린 뒤 숙취를 무겁게 안고 아침 길을 나섰다. 언제나처럼 변함없이 맑은 하늘과 상쾌한 아침 공기는 반가웠지만, 배고픈 아침 마땅한 음료수 파는 곳도 없어 한참이나 카페나 슈퍼가 없을까 헤매고 다녔다.
다행히 아침 일찍 문 연 카페가 있어 들어가 오렌지 2개를 사서 주머니에 넣고는 다시 산티아고 순례길로 복귀했다. 걸어가면서 마주친 중년의 커플. 아직 서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남아 있는지 보는 앞에서도 손을 잡고 걸어간다. 순례객으로 보이지는 않았고 주변에 여행을 온 거 같은데 그들 또한 거의 유일하게 문 연 이 카페에 간단히 아침을 먹으러 온 것 같았다.
그들을 뒤로 하고 약 2km 정도를 걸어 순례길에 다시 복귀했다. 아직은 평화로운 평원이 계속 길게 펼쳐져 있는 농업지대. 평화 속에 나와의 대화를 계속 해 나가야 했다.
나바라 지역을 들어서면서부터 평화로웠던 순례길은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긴 평원지대를 걸어간 뒤에 조그마한 마을이 나오고 마을을 지나면 다시 긴 평원이 이어지고. 원래 출발할 때부터 나만의 시간을 오롯이 갖고 싶었지만, 정말 평원 위에 ‘나 밖에는’ 없는 나날들이 이어졌고 낮에는 비가 오지 않으면 걷는 동안에는 그렇게 추운 것도 아니어서 어떨 때는 반은 잠에 취해서 걸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가다 만난 아조프라(Azofra)는 평소 정말 가고 싶었던 유럽의 소규모 마을이었다. 런던, 파리, 프라하 등 대도시들은 어느 정도 여행해 봤으니, 런던 북부에 있는 웨어(Ware)나 슬로바키아의 기아차 공장이 있는 질리나 같은 사람도 적고 주변이 온통 자연인 그런 곳을 가고 싶었다. 웨어는 특히, 자그마한 마을 안에 맛집 레스토랑이 펍, 중식, 이탈리아 식당, 디저트 가게 등 꼭 필요한 것들이 하나씩 있어서 자그마한 호텔에서 며칠이고 머물면서 힐링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아조프라가 딱 그랬다. 오후에 낮잠자기로 유명한 스페인이지만, 아조프라에 들어갔던 오후 2~3시경에는 정말 거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간혹 가다 한두 명 지나가긴 했지만, 그 외에는 모두들 일하러 간 것인지 아니면 인근 도시에 장을 보러 간 것인지 마을에는 긴 햇살만 있을 뿐 푸근한 고요와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처음으로 스페인 시내 버스를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있을 때도 시골 버스를 유독 좋아했었는데, 이 곳의 버스는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2유로라고 들었는데 어차피 이번에 모든 구간을 다 걸을 수는 없으니 나중에 다시 돌아올 생각을 하고 오늘은 한두 구간 정도 버스를 타고 스페인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버스 정류장을 잘못 안 건가, 해서 다시 길을 물어 걸어가보고 지도 앱을 켜보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시골 마을이라 하루에 버스가 몇 대 다니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딱히 움직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하루키 소설에 나오는 ‘봄날의 곰’처럼, 또는 모처럼 따스한 햇살 속에 오후를 즐기고 싶은 겨울 강아지들처럼 그렇게 마을 한 가운데 앉아 한참동안을 쉬었다. 햇살은 느릿느릿 흘러가고 구태여 급할 것도 마땅히 해야만 할 것도 없는 하루가 또 다시 흘러간다. 이대로 지나가면 하루가 온전히 지나고 밤이 찾아오고 다시 또 아침이 오면 언젠가는 도착해야 할 그 길을 위해 나는 다시 ‘순례’라는 길을 떠나게 될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책을 펼치지도 않았는데 마음은 복잡해 지면서 하루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시간이 3시를 넘어가자 오늘은 여기서 순례를 접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간만에,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순례길보다 원래 목적대로 삶과 그분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이 따사로운 햇볕 안에서 더 즐기고 싶었던 것이다.
아조프라는 작은 마을이긴 하지만, 그래도 알베르게는 2~3개 군데 있었다. 그중에는 성당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도 있어서 반가운 마음에 낮에 햇볕 밑에서 책을 읽다가 저녁에는 같이 미사를 드릴까 싶어 그곳부터 가보았다.
알베르게에는 국가나 관공서에서 운영하는 공립, 일반 개인이 운영하는 사립 외에도 종교단체(주로 성당)에서 운영하는 것들이 있다. 이곳은 정해진 숙박료 – 공립은 5~10유로, 사립은 통상 10유로 내외 – 가 없고, 대신 기부를 받는다고 했다. 무엇보다 수녀님이나 신부님들이 계실 테니 이분들과 운이 좋으면 영어로 애기를 하거나 아니면 성당 내에서 조용히 미사를 드리거나 묵상 기도를 드리면 참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성당 알베르게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마침 하얀 회벽으로 칠해져 있고 볕이 가장 잘 드는 자그마한 언덕배기 위에 있어서 위치 또한 마음에 들었다. 문제는 이곳이 문을 닫았다는 것이다.
분명 사람이 있었던 것 같아 여러 차례 문을 두드리고 한참을 기다려도 안에서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휴대폰에서 이메일을 보내 봐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것이 아무래도 오가는 순례객이 거의 없다 보니 문을 닫은 것 같았다.
그때서야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나는 아직 마땅히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 곳에 ‘이방인’으로 앉아 있다. 매일매일 숙소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10kg이 넘는 배낭을 지고 걸어가야만 숙소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햇살을 받으며 버스와 알베르게 문이 열리길 기다리며 보낸 시간이 어느덧 1~2시간이나 되었던 것이다.
11월의 스페인은 대략 6시 정도면 해가 진다. 순례길이 대부분 평원이나 산지로 이뤄진 곳이 많아서, 야간 행진을 하는 것은 막막하기도 하고 실제로 위험하기도 해 보였다. 그렇다면 다음 마을까지 서둘러 가야 하는데, 아뿔싸, 다음 마을은 이곳에서 약 9.3km 떨어진 시루에냐였다. 9.3km면 부지런히 달려가듯이 걸어야 2시간 내에 갈 수 있는 거리다. 나는 서둘러 짐을 들고 일어섰다.
사실 이런 경우는 순례 기간 내내 왕왕 있었다. 순례 후반부에는 아예 산길에서 해가 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저녁노을이 모두 지면 나 또한 길위에서 져버릴 것 같은 두려움으로 뛰다시피 걸어간 적도 있고, 초반부에는 앞선 에피소드들에서 얘기한 것처럼 조금이라도 더 가려는 마음에 욕심을 내다가 하루를 굉장히 피곤하게 마감한 적도 많았다.
이번 경우에는 근 10km에 달하는 구간이어서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컸다. 어제 소테스를 들어갈 때도 마지막 1km를 남기고 그렇게 힘들었던 다리가 아닌가. 정말 눈앞에 보이는 마을을 보면서도 100m를 채 못 걷고 몇번이고 쉬면서 걸어갔었는데 이번에는 10km라니, 몸이 피곤한지는 않았지만 막막해 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앉아서 탄식만 하고 있을 수 없어 걸음을 빨리 하는 사이, 평원 사이로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그렇게 평화롭고 고요해 좋았던 평원에도 차가운 바람이 일면서 저녁 시간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한껏 다리에 힘을 주고, 한발 또 한발 달리다시피 걸어가 보았지만, 길은 막막해 보였고 내가 과연 오늘 숙소에 제대로 묵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커졌다.
다행히 숙소는 예약해 두었다. 국내에서는 잘 안되는 경우가 많지만, 적어도 스페인에선 부킹닷컴이나 익스피디어 등 여행 사이트에서 당일 예약도 되는 경우가 꽤 많았다. 시루에냐에 작은 펜션이 하나 있다고 해서 서둘러 예약부터 하고 그곳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위로’를 하고 있었다.
인생이란 작은 길에서 서로 길을 잃고 헤매일 때
탓하기보다 같은 길에 선 ‘동무’로서
작은 손길과 관심을 보냈다
마침내 시루에냐에 들어갔을 때는 해는 이미 지고 노을도 짙게 깔리고 이제는 어스름보다는 진한 어둠이 슬슬 가라앉고 있을 때였다. 꽤 큰 도시인듯, 마을 외곽에 있는 아파트 단지들이 멀리 보이고 나는 무리해서 완주는 해냈지만 이 도시 내에서도 한참을 가야 숙소가 있어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도시 외곽 그 주택단지를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누가 등을 떠민 것이 아닌데, 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누가 협박하거나 강권한 길이 아닌데, 내가 스스로 평화를 찾고 싶어서, 묵상을 하고 싶어서 온 길이 이렇게 힘든가, 매일매일 식사와 잘 곳을 걱정하는 이 삶이 왜 이리도 고단할까. 저 멀리 보이는 저 많은 집들 중에서 내가 돌아갈 곳은 하나도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멍하니 서 있자니, 낮에 내리쬐던 그 따스한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이, 이제는 겨울 바람이 되고 진한 어둠이 되어 내 어깨와 뺨 위에 차갑게 다가오는 것이 더욱 서럽게 느껴졌다.
그렇다. 그건 서러움이다. 내가 선택한 길이지만, 그 길에 아무도 없을 때 이유 모를 어리광이라도 부려보고 싶은 것, 그저 삶이 힘들어 얘기하고 싶은 그런 잔잔한 서러움이자 조그마한 슬픔이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누군가 어깨를 두드렸다. 옆을 보니, 꽤 나이든 작은 스페인 할아버지가 나를 바라보면서 뭐라고 스페인어로 한참 애기하신다. 물론 말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까미노’ (순례), ‘페레그리뇨’(순례자) 등의 말이 나오는 것을 보아, ‘너 순례 힘들지? 정말 장하다. 꼭 기운내서 완주해라’ 뭐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것 같았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그의 눈을 보면 안다. 왈칵 안기고 싶을 정도로 그의 눈이 ‘얼마나 힘드니’ 하면서 말보다 더 간절히 통하는 몸의 언어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옆에 있던 친구도 먼 발치에서 나를 위로하는 눈빛을 보내고, 할아버지들의 그 작은 위로에 마음 속 무언가가 풀어지면서 그들에게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 생겨났다.
그렇다. 그들은 ‘위로’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생이란 작은 길에서 서로 길을 잃고 헤매일 때 또는 선택한 길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힘들다고 불평하며 쓰러질 때 그들은 탓하기보다 같은 길에 선 ‘동무’이자 ‘선배’로서 내게 작은 손길과 관심을 보냈던 것이다. 삶이란 것이 그러니까, 다들 그렇게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고 그 선택에 너무나 힘들고 쓰러지고 그러니까 그걸 잘 아는 그들이 낯선 동양의 한 순례객에게 이런 감사한 위로를 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날 받은 위로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떨어져 잠시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이번에는 지나가던 차가 멈추더니 안에서 인상 좋아 보이는 흑인 할아버지가 내렸다. 해가 졌다며 태워주겠노라고 손짓을 했다.
스페인 사람들은 순례객에게 엄격하다고 한다. 버스나 택시 등 탈것을 이용하지 말고 반드시 길을 자신의 발로 걸어서 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외 격려를 보내주거나 ‘부엔 까미노’하고 순례길에 축복을 내려주는 것은 그들에게는 흔한 격려의 문화다.
나는 그의 차를 타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감사히 받아들였지만, 또한 방금 전까지 내가 선택한 이 순례길이 힘들다고 불평했지만 이는 내 삶이고 나는 반드시 그 삶에 최선을 다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마음만 따스하게 받으면 된다. 나중에 내 뒤를 따라올 나보다 더 어린 친구들에게 그대로 갚아줄, 그런 따스한 ‘인간’의 마음을.
그날 마지막 감동은 스페인 와서 처음 먹은 수프였다. 커다란 순례자 그림이 벽화로 그려져 있는 숙소에 투숙했을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주고니 받거니 내 숙소와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식사를 하면서 나는 특별히 뜨끈한 것이 먹고 싶어 혹시 ‘수프’가 있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내 영어를 간단한 말이지만 이해하지 못했고 나는 그녀의 스페인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한참 얘기한 뒤에 마침내 그녀가 ‘소파!’하고 얘기했다. 앉는 소파는 아닌데, 스페인어로 수프가 ‘소파’(Sopa)였던 것이다. 이어 갖다 준 닭고기 육수로 만든 것 같은 수프를 나는 생전 수프 처음 먹어본 사람처럼 열심히 먹어 댔다. 앞에서 바라보던 할머니는 더 필요하니, 하면서 아예 냄비 채 내게 더 주었다.
내가 고팠던 것은 그들의 따스한 말, 그들의 격려, 그들의 수프 한잔이었다. 이미 힘든 것은 내가 겪을 수 있었고 버텨낼 수 있는 힘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길을 누군가가 봐 주고 위로해 주길 바랬다. 이곳이 낯선 외국일지라도, 이방인에게 관심 없을 그런 평원과 농촌일지라도 그저 내 영혼을 따스하게 적실 그런 마음의 양식 하나가 필요했다.
그날, 할아버지의 눈에서 바로 그 양식 하나를 물었고, 차문을 열던 흑인 할아버지에게서 그 냄새를 맡았으며, 할머니의 닭고기 수프에서 비로소 내 마음이 조금씩 차분해져 갔다.
그렇다. 나는 순례길에 있었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인생이란 긴 길에서 잠시 햇살에 길을 잃다가 헤매게 되어도 따스한 위로와 격려를 받게 되는 그 사랑 안에 있었다. 그것이 내가 한국을 떠나 이곳 스페인에서 산티아고를 향해 걷게 된 내 마음의 길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