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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항사 항해일기

글로발챌린저호 승선일기:예전 항해사로 승선하며 배에서 적었던 일기입니다

by 밤무지개

예전 자료를 보다 배 타면서 적어놨던 항해 일기를 발견했다. 작은 기억의 부스러기들이 일어 오른다.

과거에 나의 삶의 일부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글로발챌린저호 승선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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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8-6 7:44 P.M.

인천을 출항하고 2일이 지나고 있다. 한국에서의 분주했던 시간들이 아스라이 지나간다. 그리운 친구들, 소중한 가족들,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그곳이 너무나도 소중하다. 요즘은 바다도 하늘도 아름답다. 마치 인생의 청년의 때와 같이 한껏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제 4개월이란 기나긴 시간이 지나야 한다. 어떻게 보면 이런 생활들에 대해 익숙해 버린 것인 것 같지만, 어찌할 수 없는 삶의 요구에 순응하는 것 일수도 있을 것이다.

요즘은 이리저리 분주하다. 분주한 가운데 정녕 해야 될 것들을 빠뜨리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있다. 이 시간 사랑하는 이들은 무엇을 하며 지낼까?


98-8-17 9:58 P.M.

호주를 출항해서 스웨덴을 향해 선수를 돌렸다. 여전히 입항 동안의 작업은 날 피곤하게 만들었지만 2달간의 기나긴 항해를 준비하는 지금으로선 담담한 마음뿐이다. 잠시 상륙을 나갔다 왔으나 그리 흥미로울 것이 없는 단편적인 외출에 불과했다. 검은 밤을 항해하는 지금, 왠지 나의 마음이 메말라져 있다는 생각에 슬픈 생각이 든다. 따스함과 인정을 잃어가고 있는 것일까? 칼에 날이 서서 시퍼런 빛을 발하듯이 나의 생활도 그러하다.


98-8-19 7:50 P.M.

오늘은 모처럼 달리기를 해서 가쁜 하다. 오랫동안 달리기를 하지 않은 탓인지 무척 힘들었지만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낮에는 조마드(jomard)협수로를 통과했다. 호주를 내려가는 중요한 관문 중의 하나이다. 이제 파푸아뉴기니를 옆에 두고 지나야 한다. 서쪽을 향한 항해가 시작됐다. 3일에 한 번은 시간 후진을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이렇게 이번 항해가 끝나면 집으로 갈 수 있으리란 생각에 마음이 뿌듯해진다.


98-8-21 11:37 P.M.

시간 후진을 하여 오늘은 5시간 근무를 서고 있다. 다리도 아프고 지겹기도 하다. 갑자기 나타난 어선으로 인해 화들짝 놀랐다. 너무 작은 어선들은 등화를 잘 하지 않기에 바다에서는 골칫덩어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다 먹고살기 위해 그러는 것이니 이해해 줘야 되지 않겠나. 같이 근무 서고 있는 실항사는 처음으로 서는 5시간 근무라 그런지 평소같이 않게 지쳐있는 것 같다.


98-8-24 12:06 P.M.

푸르른 하늘과 맞닿은 바다 빛이 아름답다. 오전 동안 회사에 건의할 월말 서류를 정리하느라 분주했다. 어제저녁 힘겨웠던 당직시간이 아련하다. 하지만 한참을 졸다가 정신을 차려 바라본 하늘의 별들은 왜 그리 밝고 빛나는지. 쌍안경으로 아주 아주 밝게 빛나던 별을 보았을 때 -아마 큰 성운으로 생각됨- 그것은 별을 이루고 있는 가스 덩어리가 폭발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 큰 별 주위를 아주 작은 빛의 수많은 다른 별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런 광경은 처음이다. 아마 그 별은 여러 기체들이 뭉쳐져 폭발하는 혹성이었을 것이며 그 주위의 밝게 빛나는 별들은 지구와 같이 그 별의 주위를 맴도는 행성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별을 보고 나니 별에 대해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천체망원경을 구입해볼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별들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고나 할까! 날씨가 너무 좋다. 디지털카메라로 아름다운 세상을 담아보았다. 어쩌면 사람들의 인적이 없기에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리라. 이번 주는 선원들에게 지급될 본선불과 월말 보고로 바쁠 것 같고 다음주부터는 본격적으로 신문제작에 들어가야겠다.

98-8-27 9:38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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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양을 항해 중이다. 어제 오후에 인도네시아를 빠져나와 인도양에 들어왔다. 예상했던 대로 배는 롤링을 시작했고 처음 승선한 2기사 아내는 멀미를 했다. 뱃멀미에는 약도 없다는 이야기가 있다. 고통스러워할 그녀가 안됐다. 이제 지겨운 항해는 시작됐다. 어제야 본선불 월말 계산을 끝내고 선원들에게 돈을 지급하였다. 이제 한 달간은 큰일 없이 조용히 지나갈 것 같다. 준비했던 일들을 진행해야겠지.


98-9-8 7:32 P.M.

날씨가 나빠지겠다는 오션루트의 권고에 따라 아프리카 동부 연안을 따라 내려가는 항로를 택했다. 어제는 나빠질 날씨의 전조가 보이는 듯하더니 오늘은 다시 잠잠해졌다. 여러 가지 일들을 정리하며 생활의 리듬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98-10-3 4:41 P.M.

참 오랜만에 일기장을 폈구나. 그동안 무언가 정신없이 다녔구나 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내일 새벽녘이면 스웨덴의 벙커링 포인트에 도착한다. 2달간의 지겨운 항해의 끝이 보여 기쁘다.


98-10-7 6:17 P.M.

스웨덴에 들어온 지 하루가 지났다. 내일이 되어 출항이 될지는 불확실하지만 며칠을 더 보내었으면 좋겠다. 이곳 스웨덴, 그리고 작은 마을 옥셀순드, 이곳의 느낌은 정적과 평화, 10월 초순의 늦은 가을 날씨의 이곳은 그 차가운 공기에서 우러나오는 쓸쓸함에 사람들의 한적함이 더해져 2달간의 긴 항해에 지친 바다 사람들을 춥게 만든다. 오늘은 바람이 더욱 불어 쌀쌀하다. 모두가 자신들의 일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묵묵히 임하는 중에 이방인들은 이들의 삶에 단 1인치도 침입하여 들어갈 수 없기에 추운 옷깃을 여민다. 고향이 그리운 이들은 밑이 트인 공중전화박스를 쳐다보지만 비싼 전화카드를 살 수 없기에 그냥 지나쳐야 한다. 왜? 육상에 사는 사람들은 바다에서 온 이들을 천대할까? 낯선 거리를 헤매며 본능적인 감각으로 찾아 선 곳은 작은 요트 선착장, 이네들의 단정함과 세심한 배려들이 곳곳에 배어있어 좋다. 하지만 사람이 보고 싶다. 늦게 찾아온 이곳엔 사람들이 떠나고 없다. 선착장에 매어진 하얀 요트를 보며 그 너머에 드리워진 바다를 생각했다. 다시 가야 할 바다.


98-10-8 6:49 A.M.

오늘 하루를 시작했다. 어제의 나른함과 피로를 짧은 선잠에 묻어놓고는 다시 하루를 시작한 것이다. 7시가 훨씬 넘어서야 해가 떴다. 이리저리 조각난 구름 틈새로 억제할 수 없는 듯 빛을 발하는 태양의 강렬함을 보며 뜨거운 생명감을 느꼈다.


98-10-10 4:56 P.M.

스웨덴의 lulea에 도착하여 상륙을 나갔다 왔다. 전형적인 북부 유럽의 도시처럼 아주 깔끔한 느낌의 도시이다. 왕복 4시간의 긴 장정이었지만 후회스럽지 않은 외출이었다. 북부지역이지만 강우량이 많은 탓인지 잔디와 나무들이 탐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특히 침엽수가 주종을 이루고 있어 북부지역의 특색을 잘 나타내어 주었다. 마을 곳곳에는 잔디밭이 있어 녹색의 편안함 색감이 도시의 주종을 이루는 듯했다. 잔디밭을 꾸며 놓은 그들의 손길을 유심히 보니 길과 잔디밭이 마주치는 곳에는 흙으로 고랑을 내어놓고 자연스럽게 그곳에도 잔디가 자랄 수 있도록 해놓았다. 길에는 차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가용이나 자전거를 이용했다. 간혹 조깅을 하는 이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곳은 발틱해의 가장 위쪽 지역이어서 바다라기보다는 호수에 가깝다. 이곳의 비중을 보면 이곳이 담수지역이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 담수지역인 탓에 이곳의 풍경은 바닷가의 풍경보다는 호숫가의 풍경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침엽수림이 멋들어지게 뻗어있는 바닷가에 나무로 만들어진 색색의 집들을 보면 그림엽서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풍경이 그대로 옮겨졌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항구의 정문에서 이곳 지도를 얻어 13km 거리의 시내 중심가를 다녀왔다. 시내 중심가는 예상보다 번화한 곳이라 2달간의 항해에 눌려있던 마음을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이곳은 오후 4시가 되면 모두 집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 같았다. 정각 4시가 되자 약속이나 한 듯이 사람들이 사라져 버려 어리둥절했다.


98-10-17 6:15 P.M.

다시 미국 뉴올리언스로 항해를 하게 되었다. 1년이란 시간이 다음 항구에 대한 기대를 앗아버린 듯하다. 느린 재즈의 선율이 나른하게 만들고 하릴없이 빈둥거리고만 있다. 삶에 대한 싫증인가 아니면 배위에서의 단순한 생활들에 대한 싫증인가를 모르겠다. 무언가 새로운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


98-10-22 0:43 A.M.

악명 높은 비스케이만을 항해 중이다. 그 이름대로 이곳에는 악천후가 일렁인다. 어제부터 배는 정신없이 요동하였고 끝내 건강하던 나의 몸 마저 균형을 앗아버렸다. 오전 근무를 서고는 오후에는 온종일 침대에서 뒹굴어야 했다. 저녁나절 먹지 말자고 다짐했던 두통약 한 알을 먹고 나서야 머리의 통증은 가셨지만 일렁이는 이곳, 삭막함이 감도는 곳에서의 아픔은 육신의 고통보다 마음에서 더했다. 친구에게 전화를 하고는 외로움의 한켠이나마 추슬러보려 하지만 바다의 깊음만큼 패어진 외로움의 상처는 좀처럼 가셔지지 않는 것 같다. 집으로 가는 길인가, 아니면 영원히 방황하는 이방인인가. 집에는 반겨줄 가족이 있지만 인생의 동반자는 그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다. 헤르만 헤세의 他人처럼.

항해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바다 위에서의 항해는 느려 터지는 시간과의 전쟁인 듯하다. 물론 근래의 정기선이나 기타 해운에서의 급격한 변화로 시각을 다투는 항해가 많아졌지만 내가 타고 있는 이 배의 항해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힐 만하면 도착하고 마는 그런 항해를 하고 있다. 나름대로 생활을 잘 해나갈 수도 있지만 적막한 산중의 암자처럼 바깥세상과의 시간적 격리를 느끼게 만들어 버리곤 한다. 인생의 중심에서 의미를 찾는 행위는 아주 경이로운 일이라 하겠다. 그 나름대로 의미를 가지는 생활이지만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의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한 발짝만 떨어져 명상의 눈으로 그곳을 바라본다면 자신의 있던 그곳이 아주 놀라운 것들로 가득한 세상이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바다에서의 생활이 그리 낭만적이지도 않고 모험이 가득한 삶도 아닌 그저 평범한 우리들의 살가운 모습일 뿐이지만 이 바다에 나와 살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의미들이 배어 있음이 분명하다.

감옥처럼 갇혀 있는 생활 속에서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하는 게 현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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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10-23 12:57 P.M.

사납던 바다가 잔잔하다.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공기는 포근하게 몸을 감싼다. 넓은 초원처럼 푸르게 펼쳐진 바다 위를 걷는 기분이 든다. 세상의 모든 시름이 지난 며칠간의 풍랑 속에 녹여진 듯한 생각이 들었다. 미국 입항을 위해 갑판 위에선 사람들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

사람에게 주어진 축복 중에 상상이라는 게 있다. 그리고 어느 한 가지로 인해 떠오른 생각들을 연상이라 한다. 평온함이 깃들인 바다 위에서 그리운 집을 상상해 보고, 따스함이 감도는 10월의 맑은 오전 중에 고향의 봄날을 연상했다. 난 상상의 나래를 달고 푸른빛이 자라는 바다 위를 일렁이며 고향의 봄날로 가고 있다. 조심스레 두 눈을 감아보면 두 뺨에 닿는 포근한 바람이 고향 언덕 위의 봄바람처럼 아늑하다. 철벅 이는 바다 위를 뛰어 바다 향내가 부서지도록 내달리고 싶다. 수평선은 언제나 시간과 공간 속에 평행하여 만남을 허락하지 않는다. 수평선을 향해 나아가는 항해자의 모습은 우리 삶의 모습이다. 도달할 수도 없는 가까워질 수도 없는 수평선을 향해 오늘도 침로를 맞추었다. 고행의 의미처럼 거친 바다 위의 항해는 우리의 삶의 고통을 속죄한다. 어느 누구도 찾아주지 않는 곳에서 바다와 싸워 고통당하는 항해자의 모습은 고행자의 모습과 흡사하다.


98-10-28 10:43 P.M.

저녁 동안 달이 둥그러니 떠있어 좋다. 지난 일주일 동안 초승달에서부터 시작된 달의 성장은 반달에 이르렀다. 황량한 밤바다 특히 대양의 밤은 참으로 고독스럽기 그지없다. 밝게 빛나는 달빛은 그 고독들을 잠시 잊게 하는 진통제인 것 같다. 검은 바다, 검은 밤을 은색으로 뒤덮는 그녀의 빛을 보고 있노라면 난 잠시 그 빛에 흡수되어 버린 듯하다. 이틀 동안 계속된 풍랑의 요란함은 어느새 진정되는 듯하여 좋다. 달빛이 있는 밤


98-11-1 10:43 A.M.

바하마 군도에 접어들었다. 바하마군도를 지나 플로리다만을 지나면 멕시코 해에 들어가게 된다. 현재 SW PILOTS지점까지의 ETA는 3일 19시이다. 날씨는 어느새 중남미의 열정을 품은 카리브해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것저것 할 것도 많고 생각도 많다.

그동안 정성을 주고 키웠던 희망목에 꽃이 피려고 꽃몽우리가 생겼다. 기대가 된다. 사과나무와 그 외 망고 나무들도 잘 자라고 있다. 망고 나무는 한때 잎사귀가 마르는 듯해서 가지치기를 해주었다. 수박넝쿨이 어느새 푸르른 자태를 뽐내며 11월 멕시코만의 햇살을 받아먹고 있다. 곧 수박을 영글수 있겠지.

바다를 보노라면 바다와 같이 넓은 마음을 갖고 싶다고 생각될 때가 많으나 생각같이 잘 되지 않는 것 같다. 바다와 같은 넓은 마음. 아량이라고 하면 좀 더 적합한 표현일까. 좁은 세상, 넓은 세상. 사람은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가느냐가 그 사람의 인격과 생각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준다고 여겨진다. 내가 서있는 곳을 볼 것인가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볼 것인가. 이것은 아주 큰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배에서 배안의 세상을 보는 것과 넓은 바다를 보며 아량을 키워가는 데에 큰 차이가 있듯이 넓은 대륙에 살던 사람과 좁은 땅에 갇혀 살던 사람들 간에는 큰 차이가 있다. 물론 그 사람 됨됨이는 그 사람 나름대의 모습이겠지만. 이 차이의 중요한 배경에는 그 사람이 바라보던 경치나 환경이 자리 잡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넓은 바다에서 생활하면서 좁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 바다를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우리들의 삐뚤어진 초상인 것 같다.


98-11-7 7:15 P.M.

뉴올리언스를 출항하여 미시시피 강을 항해 중이다. 내일 새벽녘이면 바다로 접어들 것이다. 어제 접안하여 오늘 오후에 출항하는 아주 빠른 선적이었다. 지금은 이번에 샀던 재즈를 들으며 잠시 쉬고 있다. 곧 근무를 하기 위해 올라가야 한다. 멋진 뉴올리언스의 야경을 보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기약을 한다.


98-11-9 7:24 P.M.

멕시코만을 항해 중이다. 파나마 도착 예정일(ETA)은 12일 새벽이다. 날씨가 좋지 않아 선속은 1 KNOT이상 떨어졌다.


98-11-11 8:44 A.M.

오전에는 모처럼 사진을 찍었다. 며칠 전 집드라이브에 저장해 두었던 사진들을 정리하다 보니 요즘은 통 사진을 찍지 않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새로운 기분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현재까지 400여 장의 사진을 찍었다. 물론 엉터리 사진이 많지만 그런대로 만족할만하다. 카메라의 성능이 더 좋으면 나아지겠지만 사진을 찍는 정확한 기술과 지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침 당직을 위해 브릿지에 올라오자마자 꽃망울을 터트리려 며칠 전부터 들썩거리던 수박 꽃을 살피기 위해 화분이 있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놀랍게도 노란색의 아기 같은 꽃이 꽃망울을 터트리고 활짝 웃고 있는 것이었다. 놀라움과 희열이 번갈아 가며 지나갔고 몇 번의 開花를 경험한 터이지만 매번의 이 경험은 생명의 놀라움을 느끼게 하는 사건과 다름없다는 생각을 했다. 수박 꽃과 희망목의 꽃을 사진에 조심스레 담아본다. 오전 내내 소나기구름이 지나가는 통에 日光이 좋지 않지만 햇빛이 구름 사이로 새어 나오는 틈을 타서 몇 번의 촬영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98-11-12 7:37 P.M.

크리스토발에서 엥커링을 하고 있다. 모처럼 다가온 휴식에 마음의 긴장이 풀린 듯하다. 저녁에는 당직에 올라가지 않고 몇몇 사람들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간단하게 식당에서 샐러드와 화채를 준비하여 맥주와 음료수 그런 것들이 함께 하는 차분한 모임이었다. 지금은 모두 떠나고 혼자 앉아 멋진 음악을 듣고 있다. 미국에서 구입한 DIANA KRALL의 크리스마스 노래이다. 재즈 풍의 음악에 성숙한 듯한 그녀의 음성이 아름답게 들린다. 이번 크리스마스를 집에서 보낼 수 있다면... 한해를 다시 넘기며 마음도 조금은 기운을 잃은 듯하다. 무엇인가를 다시 시작하기에는 조금 늦은 듯한 계절이지만 난 다시 많은 일들을 시작하고 있다. 잘 될 거야. 사랑이라는 것을 그려본다. 삶이라는 것을 상상해본다. 모두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지만 하나는 내게서 크게 자리매김되어가고 하나는 형체를 잃어 가는 듯하다. 삶의 향기가 짙어 갈수록 진실한 사랑은 연해져만 가는구나 라는 생각을 해본다. 내게 사랑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나의 삶은 어떠한 모습을 가질까? 수많은 의문이 가득한 삶을 살아간다. 나의 삶을 작은 스케치북에 그려보았다.


98-11-15 11:13 A.M.

어제 파나마를 통과하고 태평양에 들어섰다. 왠지 대서양에서보다는 마음이 푸근하다. 고향에 인접한 대양이라서 그런가 보다. 지금부터 대만 카오슝까지의 항해일수는 30일이다. 정확하게 1달간의 항해이다. 2달 이상의 항해를 여러 차례 한 탓인지 지금은 1달 항해에 대한 두려움이나 걱정은 그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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