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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anne Feb 13. 2022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강화길과 한강의 글을, 에이미 와인하우스와 빌리 아이리시의 음악을 좋아한다. 주말 아침 느지막히 일어나 먹는 빵과 커피도. 더 고급 취향을 꺼내 보이고 싶지만 (브람스보다는 라흐마니노프를 좋아해요, 라고 멋있게 말해보고 싶다.) 지금으로선 저 정도가 최선인 듯 하다.


요즈음 그녀는 책 한 권을 읽는데 엿새가 걸렸고, 어디까지 읽었는지 해당 페이지를 잊곤 했으며, 음악과는 아예 담을 쌓고 지냈다. 그녀의 집중력은 옷감의 견본이나 늘 부재중인 한 남자에게 향해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아를 잃어버렸다. 자기 자신의 흔적을 잃어버렸고 결코 그것을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그녀는 여전히 갖고 있기는 할까?


다시 한 번 돌아서서 생각해보면, 사실 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까마득하다. 최근에 개봉했다던 <프렌치 디스패치>도 아직 보지 않았다. 강화길과 한강의 신작은 여러 달에 걸쳐 겨우 챙겨 읽었다. 에이미 와인하우스와 빌리 아이리시의 음악들보다는 누군가가 선곡해 둔 유튜브의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한다. 주말 아침의 빵과 커피만 잘 챙겨 먹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취향은 무엇이라고 굳이 찾아내어 말하는 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폴이 되고 싶지 않다는 강한 열망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 자신의 흔적을 계속해서 붙들고 있고 싶어서.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가지고 싶어서.

일상의 소중함을, 무탈함으로부터 나오는 평온을 감사히 여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저 그냥 살아가는, 폴과 로제 사이의 관계 같은 그런 권태로움에 젖는 것이 두렵다. 생활에 취향이 잠식 당하지 않는, 풍요로운 삶을 꾸려 나가고 싶다. 폴은 도대체 왜 로제에게 다시 돌아간 걸까. 폴은 다시 8시의 전화를 기다리고, 로제는 끝끝내 본인의 천박한 취향을 잘 지켜낸 듯 보여 답답함은 한층 더해진다.


그녀로서는 그들 두 사람의 삶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그들의 사랑을 위해 육 년 전부터 기울여 온 노력, 그 고통스러운 끊임없는 노력이 행복보다 더 소중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바로 그 자존심이 그녀 안에서 시련을 양식으로 삼아,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로제를 자신의 주인으로 선택하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로제는 그녀에게서 언제나 빠져나갔다. 이 애매한 싸움이야말로 그녀의 존재 이유였다.


일상이란, 오래된 사랑이란 그만큼 중요한 것이었을까. 로제와의 사랑은 어떤 종류의 사랑이었을까. 폴이 "나는 너무 늙었어"라고 말하고 체념해버리기보다는 시몽의 열정 어린 사랑을 받으며 취향을 다시 찾아나가기를, 나아가 그 누구도 아닌 폴 스스로를 자신의 주인으로 선택하고 인정하는 결말을 책을 읽는 내내 바랐다. '덧없고 변하기 쉬우며 불안정하고 미묘한 사람 사이의 감정'인 사랑의 덧없음에 집중한 소설이라는 서평에는 그래서 마음이 조금 공허해진다. 시몽의 사랑이 속절없이 식어버린다고 하더라도 함께 찾은 폴의 취향은 그대로 남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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