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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anne Feb 10. 2022

<살바도르 달리전>

2022년 2월 5일 토요일

분명 ‘올해는 질보다 양이다!’를 외쳤던 것 같은데 또 한 번 그렇게 해를 넘기고 말았다. 과연 올해는 어떨 것인지…

그 사이에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회사 얘기는 후술 하기로 하고, 오늘은 어제 다녀온 전시회 이야기를 꺼내놓고 싶다.


얼리버드로 예매해두었던 <살바도르 달리전>에 다녀왔다.

사실 버스 정류장의 광고판을 여러 차례 보긴 했지만, 저렇게까지 홍보를 대대적으로 하는 전시회라면-호크니전이 그랬듯- 사람이 미어터질 것 같다는 생각에 가봐야겠다는 마음을 잠자코 접어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리 예매해뒀다며 가보자는 친구의 권유에 설렜었던 걸 보면 한 켠에 살바도르 달리에 대한 궁금증이 내 생각보다 크게 자리 잡고 있었던 듯하다. 흘러내리는 시계, 추파춥스 로고, 언뜻 들었던 아내 갈라에 대한 선망 정도가 달리에 대한 나의 흐릿한 정보였는데, 분명 그 너머에 무엇인가 있을 거 같다는 믿음이 있었다. 한 번 보면 누구에게나 각인될 정도의 흘러내리는 시계, 그 시계를 그린 화가의 정신세계를 조금 더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그리고 실제로 사람은 미어터졌다.

들어가자마자 본 광경은 입장 웨이팅 번호를 받기 위해 줄 서 있는 사람들이었다. 일단 급한 대로 줄 서서 받은 대기 번호는 1039번. 곧이어 내 앞의 웨이팅은 423팀으로 웨이팅 예상시간은 약 113분이라는 친절한 알림 카톡이 왔다. 이러다 주차비가 더 나오는 건 아닌지, 빠르게 후퇴했다가 다음에 다시 올 지를 잠깐 고민했지만 평일 오후에도 웨이팅이 무지막지하다는 블로그 글을 읽고선 그냥 온 김에 보고 가기로 했다. DDP나 돌아보면서 시간을 때워볼까 했는데, DDP는 내 기대와 다르게 황량하게 그지없었고, 몇 없는 카페 자리들도 나와 같은 처지인 방랑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잠깐 DDP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자리 잡은 공차에서 남은 100분 정도를 대기했다. 대기하면서 마음 한 켠의 설렘은 전시가 별로면 어쩌지, 이 정도면 전시장 내부도 시장통이겠는데 하는 불안함에 스멀스멀 자리를 내어주기 시작했다.  


대기 끝에 겨우 입장한 전시회는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시국에 이 정도로 사람이 모여도 되는 걸까 싶었지만, 기다리는 사이에 오디오 가이드 3천 원까지 구매해두었던 터라 용감하게 앞으로 나서보았다. (사람이 많아 작품 옆 설명까지 가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오디오 가이드는 3천 원의 가치를 톡톡히 해냈다.)


그리고 그렇게 달리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The Broken Bridge and The Dream>

한 구역 한 구역 지날 때마다 천재 아니야?를 속으로 계속 외쳤다. 유년기를 보냈던 카다케스의 풍경을 담아낸 그림들과 피카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그림들, 책의 삽화들, 도상학적인 기호들이 나열되어 있는 그림들을 모두 한 사람이 그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나의 변신은 전통이다. 왜냐하면 전통이란 바로 변화이고 또 다른 껍질의 재창조이기 때문이다.

인상주의와 입체주의, 초현실주의를 오가는 달리의 작품들을 보며 느끼는 경외심은 그 많은 그림들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그의 철학에서 비롯된다. 끝없는 탐구 정신과 열정을 모든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피카소는 물론 벨라스케스, 미켈란젤로 같은 과거의 거장들을 존경해 마지않으면서도 그들이 앞서 걸어 나간 길 위에 본인만의 세계를 치열하게 쌓아나간다. 그에 더해 물리학 등 과학적 이론들까지 섭렵, 모든 걸 바닥까지 이해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재탄생시킨 이 화가의 작품들이 경이로울 수밖에 없다.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 다른 차원에 있는 것만 같은 천재성이다. 애니메이션, 영화, 연극 무대 연출까지 무한히 확장되어 가는 그의 세계를 알게 될수록 이 천재성에 감탄함과 동시에 부러움이 커진다. 이게 바로 4차 산업 혁명 이후의 세계에서 필요한 역량이지 않나 하는 쓸모없는 생각도 해본다.

<Napoleon’s Nose, Transformed into a Pregnant Woman, Strolling His Shadow with Melancholia amongst Original Ruins>

달리와 같은 천재가 될 순 없어도, 그의 탐구 정신과 확장성은 어떻게든 흉내 내 보고 싶다. 단편적인 지식 습득이 아닌 깊은 이해와 사고를 하고, 그렇게 쌓인 과실들을 꼭꼭 씹어 내 것으로 소화시켜 무엇인가 생산해 내고 싶다. 그러고 보니 달리전을 다녀와서 글을 다시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든 건 꽤 자연스러운 일이다. 내가 정말로 표현하고자 하는 건 과연 무엇일까.

<Advice from a caterpillar>, <Attaque des moulins>

달리는 확실히 셀프 브랜딩에도 탁월했던 듯하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누구나 기억에 남겨 둘 그의 수염, 흘러내리는 시계를 비롯한 상징들까지, 다시 한번 그가 얼마나 현재의 세계에, 그리고 (모두가 말하는) 미래에 잘 어울리는 사람인지를 깨닫고 약간의 질투까지 하게 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삽화에 등장하는 앨리스가 ‘줄넘기를 하는 소녀’로 표현되어 있는 걸 보면 웃음이 날 수밖에 없지만서도.

과연 113분을 기다릴만한, 그런 전시였다. 동행의 손에는 어느새 도록이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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