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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anne Dec 17. 2020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사실 넷플릭스의 신작 드라마, <래치드>가 재미있어 보여서였다. 좋아하는 배우(사라 폴슨)의 신작, 그것도 넷플릭스 오리지널으로 제작된 드라마라니. 엄숙하고도 정제된 자세로 원작을 찾아 읽는 건 일종의 예의 같았다.

그러나 앞의 몇 장을 읽어 나가다가 앗 역시 60년대 레트로는 영상으로 즐길 때가 제일 좋은 건가?하고 잠시 후회하기도 했는데, "거대한 구조 속 개인의 자유를 향한 열망"이라는 주제 의식을 굉장히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소설의 흐름이 조금은 구태의연해 보였기 때문이다. 빅브라더로 대표되는 시스템에 대한 경계(이미 "빅브라더"라는 단어 자체가 구태의연한 것 같기도 하다.), 부서질지언정 절대 순응하지 않는 개인, 그리고 그 개인이 만들어 낸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자유의 빛에 감화되는 기존 체제 순응자들은 60년대 히피 문학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할 듯 싶다. 거기에 62년도에 발표된 소설인만큼 백인에 의한 원주민 구원 서사, 흑인과 여성에 대한 혐오 표현 등 눈에 거슬리는 부분들이 산적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석 연휴 내내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끝까지 다 읽어 나간 건 소설의 강한 흡입력 덕분이었다. 출간 시점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는데 과연 그럴만하다. 한정된 공간을 배경으로, 다양한 인물 군상에 대한 묘사가 섬세하게 이어지는데다가, 구태의연한 서사도 구태의연하지 않을 수 있도록 사건을 생동감 있게 끌고 나간다. 단체로 바다 낚시를 나가거나 관리인을 꼬드겨 한밤중에 파티를 여는 것 따위의 장면들은 소설의 배경이 정신 병원이 아닌 대학교 캠퍼스였던가 잠깐 착각하게 만들 정도이나, 그러한 착각은 사건 사고를 일으킨 장본인이 강제로 전기 충격 요법을 받는 모습을 더 끔찍하게 만들 뿐이다.

고리타분하다고 하긴 했지만, 사실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으로 합의된 규칙 간의 균형은 방역과 관련해서도,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서도 최근 많이 생각해 보게 되는 주제이다. 누군가는 방역 활동이 개인을 탄압하려는 적대 세력의 음모라고도 하고, 또 누군가는 이제 표현의 자유가 보장 되지 않는, "시민 독재" 시대가 열렸다고도 한다. 의사 수를 늘리겠다는 정부의 말에 의사들은 파업을 하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반대하는 정규직들이 거리로 나선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서는 공동체적 이익이 희생되어야 하고, 그것이 ‘공정’이라고 여겨진다.

물론 제 각기 근거가 있고, 각자의 입장에서는 타당한 주장들일 것이다. 그러나 4차 산업 혁명으로 인한 빠른 변화에 전염병의 창궐이 더해진 거대한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나마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 서로에겐 서로가 필요하다는 사실 아닐까.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공유한 이들이 타인을, 특히 약자를 위해 배려하고 양보할 때 공동체의 기반이 다져지고 개개인은 더 고차원적 의미의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러한 생각에 너무 순진하다고 하는 이도, 또는 래치드 간호사가 할 법한 말이라고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소설이 발표된 60년대와 비교해서 논의가 훨씬 다층적으로, 복잡다단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상황임은 분명해 보이는데, 이는 그래도 그 동안 사회가 많은 이들-맥머피와 같은-의 노력과 논의로 진보해왔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나저나 정작 <래치드>는 무서워서 아직도 보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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