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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anne May 24. 2019

<무진기행>


여행을 좋아한다. 낯선 곳에서 모르는 사람들 틈에 섞여, 모르는 언어로 이루어지는 옆 자리의 대화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사실 여행지는 크게 상관없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관념 속에서 그리고 있는 어느 아늑한 장소(<무진기행>)’가 나에게 필요한 것일 뿐, 그 장소가 현실의 어디인지는 중요치 않은 건 아닐까 하고 자문해보곤 한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이라면 충분한 것 같기도 하다. 외지인으로 지낼 수 있는, 구태여 ‘모든 타인들에게 그들이 나의 타인임을 분명히 해(<서울의 달빛 0장>)’ 둘 필요가 없는 곳. 각자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사람들, 현대의 문명인이 마땅히 지켜야 할 윤리와 규범들은 과연 잘 준수되고 있는지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여행지로의 여행을 현실 세계의 나는 꿈꾼다. ‘도망’이나 ‘새 출발’의 필요로 찾은 무진에서, 서울에 버려두고 온 책임과 삶의 버거움을 생각지 않고 자유롭게 지낼 수 있기를 원한다.
무진에서의 가벼움을 꿈꾸는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라고 확신한다. 아니, 자의식을 가진 현대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책임, 규칙, 타인의 시선 따위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공간을 상상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고 조금 더 과감하게 추측해 볼 수도 있다. 여행의 즐거움은 평소라면 쓰지 않을 비용도 복잡한 계산 없이 턱턱 지출하는 데에 있다며, 그렇게 뒷 일은 생각하지 않고 돈을 쓰면 어디서든 즐거울 수밖에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작가 김승옥은 <무진기행>을 통해 근대 이후의 도시인들이라면 이렇듯 하나쯤은 마음속에 품고 있을, 자유로운 데다가 어쩌면 무책임하기까지 한 도피처를 구현해낸다.

한 편으로는 현재의 나와 단절될 수 있는 공간이 여행지로 제격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른바 ‘진정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대낮의 생활로부터, 이 도시로부터, 자기의 예정된 생활로부터, 자기가 싫증이 날 정도로 잘 알고 있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해 보고 싶은 (<야행>)’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기차에, 비행기에 오른다. <서울 1964년 서울>의 두 청년이 기쁨으로 얼굴을 빛내며 ‘나만이 아는, 그렇기 때문에 완전히 나의 소유인 사실’들을 주워섬길 때처럼 신이 나 ‘이건 내가 아니라고 생각한 (<서울의 달빛 0장>)’ 현실의 나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김승옥의 주인공들이 그러하듯, 언제나 이러한 도망, 일탈로부터 현실로 다시 돌아온다.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삶을 살아간다. 이전의 나도, 이건 내가 아니라고 하는 지금의 나도 모두 나이기 때문이다.

이건 내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전에도 항상 이건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았었다. 이건 내가 아니고 이전의 내가 나라고 한다면 이전의 나는 그 이전의 나를, 그 이전의 나는 그 그 이전의 나를……. 그리하여 나는 무(無)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건 내가 아니라고 하는 바로 내가 나임을 나는 안다. 어느 때가 돼야만 이건 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건 꿈속의 꿈임을 나는 안다. (<서울의 달빛 0장>)


생각해보건대 여행은 끝이 있기에 여행일 뿐, 끝이 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또 다른 삶이 되어버리고 만다. 아내의 전보를 받고, 무진의 연인에게 쓰던 편지를 찢어버린 후 서울행 버스에 오른 <무진기행>의 '나'도 이를 알기에 다시 한번 무진을 떠날 수 있지 않았을까. 현재의 나를 인정하고, 비록 한없이 부끄러울지라도 삶을 책임감 있게 살아 낼 때에야 비로소 일탈이 일탈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다섯 편의 단편 소설(<무진기행>, <생명연습>, <서울 1964년 겨울>, <야행>,<서울의 달빛 0장>)을 읽으며 줄곧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는데, 작가가 여성 캐릭터를 바라보는/사용하는 방식 때문이다. 문학 작품들이란 으레 이성 간의 관계와 상대방으로부터 발생하는 고난, 역경, 그리고 이어지는 구원의 과정을 다루기 마련이지만 김승옥의 소설들은 너무나 끈질기게 여성의 순결과 타락에 집착한다. <무진기행>의 하인숙과 <생명연습>의 어머니, <서울의 달빛 0장>의 아내 한영숙은 정숙하지 못한 이들로서 주인공에게 심적 고통을 주고, 때로는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도구로 손쉽게 사용된다. 숨막히는 현실로부터 일탈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여성으로 밤거리를 헤매다가 어느 여름 낮 낯선 이에게 끌려가 성폭행을 당하는 <야행>의 화자 현주는 두려웠던 그 순간을 문득문득 떠올리며, 다시 한번 그 '울타리를 넘고 싶다는 욕구를 발작적으로 강렬하게 느끼곤' 한다. 도시인의 탈출 욕망을 성적 욕망으로 치환하여 표현한 소설임을 알고, 현주가 '자신의 욕구는 반드시 사내들이 자기네의 욕구를 과감히 실천할 때 함께 성취될 수 있음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는 점에서 작가가 의도적으로 여성의 수동성을 강조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불편함을 떨칠 수 없다. 작품 곳곳에 나타나는 여성들에 대한 완전한 타자화, 그리고 그들을 순결하지 못한 창녀 또는 구원의 역할을 맡은 성녀로 나누어버리는 이분법은 섬세하게 묘사된 근대 이후 소시민의 방황에 몰입하는 것을 적지 않게 방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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