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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anne May 29. 2022

05. 첫 퇴사

작년 1월 새로운 팀으로 이동해서 낯선 줌 미팅을 경험했다고 썼었고, 정확히 1년 후 퇴사를 했다.


몇 개월 간 새벽 2-3시까지 야근이 이어져도 새로운 일을 배우는 즐거움이 힘듦보다 더 컸었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나쁘지 않았다.

그 모든 걸 상쇄하는 건 대왕 빌런이었던 상사 한 명이었다. 언제나 상상을 뛰어넘는 비합리적인 의사결정과 기분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태도가 되는 모습, 잘되면 본인 덕 잘못되면 아랫사람 탓, 마이크로 매니지먼트 등 상사로서 최악의 면모만 보이던 그에게서 간절히 벗어나고 싶었다. 1년만 더 버티면 전문성도 어느 정도 쌓여서 시장에 나갈 수 있을 듯했지만, 버티는 동안 나의 몸과 마음이 병들어 갈 것임을 알았다. 회사 사람을 만나도, 친구를 만나도, 애인을 만나도 그의 썰만 주야장천 늘어놓는 내 모습이 싫었다.


버티고 버티던 연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종종 연락하고 지내던 선배로부터 온 전화였다.

“혹시 이직 생각 있어?”


나의 상황을 고려해보았을 때, 선배의 제안은 고민도 없이 수락해야만 하는 좋은 제안이었다. 아니, 상황을 고려에 넣지 않더라도 충분히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고민 상담을 했던 주변 사람들이 백이면 백, 고민할 거리도 아니라며 당장 이직하라고 할 정도였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오랜 시간 고민했던 건, 물론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애정도 애정이었지만, 10년 간 다닌 회사가 줄 수 있는 익숙함, 안온함 때문이기도 했다.

인생 첫 회사였다. 인턴 경험도 없이 정말 난생처음 사회로 발을 내디딘 곳이었다. 많이 좌충우돌했고, 그만큼 많이 성장할 수 있었다. 성장을 지켜본 사람들이 그대로 내 주위에 있었다. 이런 편안함을 버려도 되는 걸까?


이틀 정도 고민 후, 선배에게 이직 의사를 밝혔다.

몇 차례의 면접을 거친 후 입사가 확정되었을 때, 전 회사에 퇴사 의사를 전달하였다.

다시 돌아오면 받아주지 않을 거라는 협박 아닌 협박, 이동하는 회사의 (근거 없는) 단점 나열, 회유 등을 거쳐 결국 나의 퇴사는 확정되었다.


약 3주 간의 지루했던 인수인계 기간이 지나고 퇴사일이 다가왔다.

그 사이에 사직원 제출, 남은 사내 대출 금액 정리, 퇴사 소식 간간히 알리기 등의 소소한 일들이 있었다. 사직원 제출 전 필수로 거쳐야 하는 상사 면담에 조금 긴장하기도 했지만, 문제의 그분은 내 걱정과는 달리 내 눈을 보지도 않은 채 서명만 간단히 하고 마무리하였다. 오히려 좋아!


퇴사일을 앞둔 주말, 짐 정리를 위해 회사를 방문했다. 짧지 않은 시간을 자율 좌석제로 생활해왔던 지라 짐이 많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사물함 속에 잠들어 있던 물건들이 꽤 되었다.

신입 사원 때부터 써 온 업무 수첩 (일단 보관), 각종 교육, 세미나에서 받아온 수료증과 상패(주저 없이 버림), 탁상용/핸디형 선풍기 각 2대(사무실 기증), 회사에서 나눠준 꽤 많은 권수의 책들 (바코드 스캔 후 알라딘 중고 서적행), 평생 찾을 일이 없을 것 같지만 혹시 몰라 보관해 온 서류들(시원하게 파쇄)까지 정리하고 나니 10년이 작은 사이즈의 상자 하나에 단출하게 담겼다.


그리고 퇴사 당일, 마지막 출근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그런 이상한 마음으로 출근을 했고, 자리에 앉아 미루고 미루던 메일 사서함 정리와 파일 정리를 시작했다. 파일들은 대부분 공용 드라이브에 저장해 두어 따로 옮기거나 보관할 필요가 없었지만 메일들은 인수인계용 pst 파일 전달 후 모두 삭제해야 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신입 시절 유관 부서에 자료 요청을 어설프게 보냈던 메일부터 회사의 친한 사람들이 보내온 각종 정보성 메일(영화 무료 다운, 종로 근처 맛집 리스트…)까지 모든 걸 한 번에 지우자니 마음이 괜히 또 헛헛해졌다. 외부 메일로 보내는 건 금지되어 있기도 하고, 사실 외부로 보낸다고 해서 내가 그 메일들을 다시 들춰보진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하나하나 지워나갔다. 방 청소하다가 일기장을 발견했을 때처럼 괜히 하나하나 다 읽어나가며.


모든 인사와 서류 정리 등이 마무리되고, 마지막으로 남은 건 사내에 퇴사를 알리는 메일 보내기였다.

여러 번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지만, 결국 남은 멘트는 앞서 퇴사한 이들이 남긴 메일과 대동소이한 내용이었다. 다들 비슷비슷하게 쓴 이유가 다 있었던 것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고마웠고, 나에게 아쉬웠던 점이 있었다면 너그러운 용서를 구하며, 앞으로도 계속 인연을 이어가자는 그런 뻔한 말들에 사실이 알고 보니 진심이었어! 역시 사람은 그 상황에 처해보지 않으면 타인의 마음을 100% 이해하지 못함을 새삼 돌이키며, 사내 주소록에서 메일 수신처를 신중히 선택해 넣었다.

수신처 고르기는 (아직 경험은 없지만) 마치 청첩장 돌리기와 같았다. 과연 누구에게까지 이 메일을 보내야 하는지가 의외로 고민이 되었다. 멀리멀리 알고 있는 저분께도 내 퇴사 소식을 메일로 전해야 하는 것인가, 저분이 내가 누군지나 알까,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내가 이름을 안다 싶은 분들은 모두 수신처에 넣었다.

메일 본문을 거듭 읽어 보고, 보내기를 눌렀다.


이렇게 내 첫 회사 생활이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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