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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자까 Feb 23. 2021

집현면 홍삼내

 학과에서 열리는 시화전에 외증조할머니(이하 왕할머니)에 대해 쓴 시를 출품하며 왕할머니의 이야기를 글로 정리하고 싶어졌다. 나의 왕할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10개월 전 즈음 마당 수돗가에서 갑자기 쓰러지신 후 병상에 누워만 계시다가 갑자기 떠나셨다. 아파서 오랫동안 누워계셨던 분께 갑자기 떠나셨다는 말이 어울리는지 모르겠지만 어린 마음에 그렇게 누워서라도 100살까지 사실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참 쉬운 게 아닌가 보다는 생각을 했다.     


 나랑 오빠랑 엄마는 그 즈음 매주 토요일 할머니를 뵈러 진주로 갔는데 그 날은 엄마 지인의 결혼식이 있어 결혼식장에 들렀다 가는 길이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나자 느닷없이 엄마의 자동차가 방전이 됐다. 예정시간보다 늦게 외갓집에 도착했는데 외할아버지의 안경이 신문 위에 나동그라져 있는 채 집이 비워져 있었다. 직감적으로 심상치 않음을 느낀 우리는 전화를 했고 지금 막 왕할머니가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렇게 모인 친척들은 할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제각각의 이유와 바로 그 날이었기 때문에 장례식에서 마지막 인사를 올릴 수 있었던 사연들을 풀어놓았다. 왕할머니의 딸들은 김장을 하다가 나의 외할머니만 두고 다들 뭔가를 가지러 나간 사이에 돌아가셔서 외할머니만 임종을 지킬 수 있었다. 오촌 아재는 배를 타는데 며칠 후면 출항이라 할머니께 바다에 나가 있을 때 돌아가시면 못 온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미국에 살던 나의 작은이모에게는 편찮으신 할머니를 뵈러 잠시 귀국하기로 한 바로 그 날이었다. 죽는다는 것은 죽은 사람에게만 사연인 것이 아니라 남겨진 사람 모두에게 하나씩의 사연이구나.    


 왕할머니는 신기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왕할머니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할머니가 자기를 유난히 예뻐했다고 말한다. 나도 적어도 증손주들 중에선 날 제일 예뻐하신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다녔다. 장례식에 모인 가족들은 그렇게 하나같이 주체와 내용은 같고 객체만 다른 주장을 펼치며 귀여운 경쟁을 하고 있었다. 그때는 울다가 자다가 일하다가 울다가를 반복하며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갔지만 지금 생각하면 호상이란 그런 걸까. 개인적으로 호상이라는 말을 싫어하지만 온 식구들이 장례식장에 모여 돌아가신 분이 얼마나 사랑이 넘치는 분이셨는지를 너나할 것 없이 주장하고 있다면 그건 감히 호상이래도 될 것 같았다.

 나는 할머니가 날 유난히 예뻐하셨다는 걸 여전히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금 내 키는 열두 살 때 키와 같은데 그 덩치에도 왕할머니 무릎에 앉아 목주름을 손으로 잡으며 할머니 목이 달랑달랑하다느니, 나는 다영이가 아니라 다현이라느니 이런 소리를 하면 할머니는 껄껄 웃으며 기꺼이 목주름을 내주셨고 “다영아~”라고 나를 부르셨다.


 80대 중반 즈음엔 치매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셨는데 작년 명절에 손주들에게 용돈을 얼마씩 줬는지는 기가 막히게 기억하고 계셨다. 그리고 누가 그해 졸업을 하고 입학을 하는지 적어두셨다가 따블로 용돈을 주시곤 하셨다. 하루에 두 번씩은 마당에 나가 10분 동안 자동차가 몇 대나 지나가는지 세는 것은 할머니만의 치매 예방 캠페인이었다. 기억이 온전하실 때는 생각나는 사람들의 이름을 붙여가며 홍삼 사탕 두 알씩을 챙겨두셨다가 명절에 나눠주셨는데 나는 그 홍삼사탕 두 알을 받은 유일한 외증손주이기 때문에 할머니의 애정에 대한 나의 당당한 주장에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 나는 이런 것들을 떠올리며 할머니로부터 당신이 그려진 주마등 하나를 선물 받았다는 생각을 한다.     

 왕할머니의 장례식날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아주 큰 방 두 개를 붙였는데도 자리가 모자랐다. 집에 돌아와서 엄마는 대체 할머니 자손이 얼마나 많길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지 가계도를 그리다가 100명이 넘어갈 때부터 더 그리기를 포기했다. 100명이 넘는 가족들에게 모두 넘치게 사랑을 주신 할머니는 이따금 식구들 꿈에 하얗고 고운 옷을 정갈하게 입으시고 환한 얼굴로 나오신다고 한다. 나도 종종 할머니를 떠올리며 꿈에 한 번쯤 나와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아마도 나는 서열상 백몇 번째 번호표를 뽑았을 테니 하염없이 기다리는 중이다.         


<집현면 홍삼내>    

가던 길에 느닷없이 방전된 엄마의 자동차

수년 만에 한국으로 오는 이모의 비행기

며칠 뒤 출항하려던 오촌 아재의 배    

죽음 앞에 사연 없는 자가 있던가

죽은 자와 산 자 모두에게 사연이지

주마등은 당신에게만 스쳐 지나갔던 게 아니었나 봐요    

그대 기억을 갉아먹는 벌레는 에프킬라로도 죽지 않고

에프킬라 대신은 매일 마당에서 뒷짐을 지고 하나 두울

오늘은 포터트럭이 몇 대나 지나가나 세던 당신이었음을

마룻바닥에 모포를 깔아놓고 태액-태액-

화투조각을 차지게 내려치던 당신이었음을

감박거리던 당신 생의 기억을 불 밝히려고    

지난 설날 즈음

두 알의 홍삼 사탕

이 할매가 젤로 좋아하는 캔디인께

하나씩 까 묵어    

배탈이 날까 봐 먹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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