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피아노. 아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치던 처가에 있던 피아노를 몇 년 전 모셔왔다. 우리집에선 나만 피아노를 못 친다.
아이들이 피아노 학원 다닌 지 1년이 좀 넘게 되면서 제법 모양새가 갖춰졌다. 집에서 아이들이 피아노를 치고 나면 아내 차례다. 아내도 학창시절 피아노가 취미였다. 결국 우리 집에서 피아노 연주가 안되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물론 '학교 종이 땡땡땡'을 칠 수 있긴 하다. '솔솔랄라 솔솔미' 정도는.
오늘 아침, 아내와 아이들이 피아노 연습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대학 시절 한 후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후배는 내 삶의 방식을 놓고 '목적'이 이끄는 삶에 가깝다는 이야기를 했다. 2000년대 초반 교계에서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릭 워렌 목사의 책이 인기를 끌 때였다. 그 후배가 말한 '목적'은 책 내용과는 별 상관없었다. 그저 내 삶의 방식이 '결과물이 이끄는 삶'에 가깝다는 말이었다.
그렇구나. 피아노처럼 꾸준함을 요하는 일, 결과물이 당장 나오지 않는 불분명(?)한 일은 도무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구나. 초등학교 때 잠깐 피아노 학원에 다녔었다. 하지만 재미가 없었다. 결과물이 보이지 않아서다. 언젠가 피아노를 잘 치게 된다 한들 그 결과물이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다. 몇 달 흐지부지 다니는 둥 마는 둥하다가 끝났다.
대학 시절에도 기타를 잠깐 쳤었다. 역시 한 달을 넘기지 못했다. 룸메이트가 기타를 곧잘 치는 후배라서 좀 배웠지만, 결과물은 동력이 되지 못했다. 언젠가 짠하고 기타 솜씨를 뽐낼 기회가 있겠지만 그것도 한때, 한번이지. 그걸 위해 매일매일 기타를 연습하는 수고를 하고 싶진 않았다.
내가 의미를 두는 결과물은 따로 있다. 일단 눈에 보이는 것, 빠르게 또 한시적으로 손에 쥘 수 있는 거다. 대표적인 건 자격증. 운전면허증 같은 것. 장교로 군 복무를 하면서도 석사학위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한국방송통신대 대학원에 등록했던 건 결과물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몇 학기를 수강하면 석사학위가 나오는 것이니. 엄격히 말하면 악기를 잘 다루는 것도 중요한 결과물이긴 하지만,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고 너무나 오랜 지속성을 요하는 것이어서 차이가 있다.
학창시절 독서에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것도 가시적인 결과물이 보이지 않아서다. 대입에, 언어영역에 도움이 된다는 막연한 압박에 그저 기본적인 의무적 독서를 했을 뿐이다. 성인이 돼서도 책을 붙들고 있으면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책을 얼마 읽는 게 객관적 지표로 나타나거나 학위라도 나왔다면 내가 책을 접하는 태도는 달랐을지 모른다.
그런데 책을 '읽는 게' 아닌 '쓰는 건' 달랐다. 원고를 작성하고 투고하는 일련의 과정은 결과적으로 책 한 권이라는 분명한 결과물이 생기는 행위다. 그래서 2018년 '나의 주거 투쟁', 2020년 '질문은 그를 귀찮게 해'를 출판했다. 책을 쓰면서는 누구보다 희열을 느꼈다. 서점에 책이 놓일 생각을 하니 흥분됐다. 오히려 책을 쓰면서 부족한 지식을 보충하기 위해 책을 더 열심히 읽었던 것 같다. 결과물이 분명한 일이었으니.
일간지 기자라는 내 직업도 무엇보다 결과물이 확실한 일이다. 그래서 잘 맞는다.
질문은 그를 귀찮게 해(이담북스)를 내고 나서 인스타에도 많은 리뷰가 달렸다.
다시 오늘 아침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아이들과 아내가 순번대로 피아노를 치고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가족이지만 참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피아노를 치는 자체가 위로를 준다고 한다. 재미있다고 한다. 내가 대외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결과물을 중시한다면, 아내에겐 자기만족이라는 결과물도 소중하다.
'그래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하자'. 40대가 된 지금에 와서 나와 맞지 않는 일에 공들이기보다는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좀더 많은 결과물을 내야겠다는 욕심이 생긴다.
최근 무라카미 하루키의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를 읽으면서 1주에 글 1편씩 쓰면 1년 뒤에는 책으로 낼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됐다. 하루키는 잡지에 연재한 글 50여개를 모아서 이 책을 냈다.
1주일 1편, 물론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넘사벽'은 또 아니다. 그래서 시작해보려고 한다. 이렇게 자꾸만 시작도 전에 설레발부터 치는 이유는 '결과물'을 스스로 강제하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