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 진이에게 고마움을

케냐 니에리 더치커피

by 만델링

커피에 꽂혀 설레발을 치는 모습을 본 친구가 더치커피 만드는 기구를 보내왔다. 그 친구는 일명 신여성이다. 우리가 스물이라는 나이를 달기 시작했던 1990년은 여권을 발급받기만 하면 원하는 시기에 언제나 해외여행을 할 수 있게 된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 조치가 시행된 지 딱 1년이 되던 해였다. 그 말은 해외여행을 자유롭게 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던 때였고, 해외여행이란 걸 꿈으로 꾸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던 때였다는 뜻이다. 그리고 학문의 전당이라는 대학교는 전대협의 8.15 범민족대회와 반민자당 투쟁이 한창이어서 돌가루와 화염병, 최루탄이 수시로 날고 날리던 학생운동의 절정기였다. 거창한 투쟁의식도 없고 대단한 애국심도 없던 우리들은 데모가 있는 날이면 수업을 빠진다는 것과 예비역 선배들이 사주는 300원짜리 중앙식당 국수에 홀려서 마냥 즐거웠던 기억만 있다.


바로 그 시기에 친구는 책에서나 보던 캥거루와 코알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가 있는 나라에 어학연수라는 걸 다녀왔고, 서울의 유명한 대학교에서 어마 무시하게 어렵다는 MBA 석사를 공부했다. 여러 측면에서 수준이 다른 친구였다.

그때는 친구의 자유로운 면학분위기와 타고난 능력이 부러웠고, 지금은 아직도 친구라는 인연으로 마음의 줄을 연결하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소싯적 우리는 학업을 핑계로 하루도 쉬지 않고 만나서 와와 거리며 놀았다. 할 얘기가 없어도 뭉쳐서 즐거워했다. 늘 사람 사이에서 부댖기며 보낸 시절이었다. 그런 친구가 소박한 사치를 부릴 수 있도록 더치 기구를 보낸 것이다. 나의 설레발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것 같아 마음이 몽글몽글 행복해진다.


오늘의 커피 케냐 니에리 더치는 나이 듦의 미학, 무심함의 철학을 품었다. 케냐 니에리는 핸드드립으로 내리면 묵직하고 신맛이 좋은 커피다. 오크통에서 켜켜이 묵은 듯 쌉쌀하며 깊은 맛을 낸다. 하지만 같은 원두를 사용하여 2초에 한 방울씩, 정수기 찬물로 7시간을 추출하면 맛이 완연히 다르다. 어른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한다. 어린이에서 육체적 성숙을 한 어른이 아니라, 어른이되 어린이 시각을 가진 맑고 환한 바람을 품은 공기 같은 어른이 되었다. 깊되 깊지 않고, 성숙했으되 무게에 짓눌리지 않는 맛으로 다가온다.

가는 여름에 시원하게 마시니 그 맛도 차지다. 고마움을 그득 담아서 친구에게도 보내야겠다.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일한 후 얼음 동통 띄워 마시라는 편지도 넣어야겠다.


친구는 어떤 존재이기에 젊고 화려한 시간이 끝난 뒤에도 태연히 전화해도 괜찮을까. 내 코가 석 자라며 사는데 급해 안부를 묻지 않고 한참을 모른 척 지내다가도 눈치를 보지 않고 연락해도 될까. 건방지거나 예의가 없다는 소리 대신 반갑다, 오랜만이야, 아픈 데는 없고, 애들도 별일 없지,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새삼 궁금하다. 오늘은 유독 무슨 말이든 들어주고 허물도 가려주던 친구가 그리운 날이다. 여름이 뜨겁지 않게 지나가고 있는 까닭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