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 백 소장, 그게 바람입니다

과테말라 산 파트리시오

by 만델링

소설을 쓴다면 내 소설의 주인공은 삽 십 대 후반의 여자일 것이다. 오십 중반의 남자는 지나가는 행인 1이나 조연으로 등장할 것이다.


여자는 부산 또는 서울 가까운 수도권에 사는 전문직 워킹맘이다. 조연 남자는 오일장이 열리고 상설 시장이 있는 소도시 근처 아파트에 사는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이다. 심은 사무실에서 때우고 저녁은 정시에 퇴근하여 집에서 먹는 사람이다. 피아노를 연주할 줄 아는 여자는 남편이 있고. 이메일로 연락하는 내연남이 있고, 아이는 막내가 유치원 졸업반이며 위로 형이 둘 있다. 성격은 대체로 밝고 긍정적이며 사회에 대한 분명한 개인적 잣대를 지녔다. 이웃에 대한 정도 얼마간 있다. 자기애가 강한 여성이며 아이들 교육에 열정을 보이는 엄마이다. 혼자 시간을 보내는 일에 일가견이 있고 잘하는 운동이 있다. 책을 좋아하며 부지런히 노력하는 사람이다.


조연 남자는 취미가 없다. 꼭 취미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자면 소파를 등에 대고 티브이 리모컨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재주가 있다는 것 정도이다. 그리고 갈 만한 곳도 없는 사람이다. 만만히 불러낼 친구도 별로 없고, 정기적인 계모임도 없다. 명퇴를 한 후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이어온 친구 하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들이 어떤 이야기를 할지 모르지만 등장인물들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과 비슷한 일을 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할 것이다. 엄청 웃기고 덜 슬픈 이야기의 주인공을 만들고 싶다.


소설 속 이야기가 옆에서 일어났다. 백 소장과 정 소장. 등장인물과 나이도 비슷하다. 쉰일곱, 65년 뱀 띠와 서른일곱, 85년 소 띠다.


인생이 허무하다. 몇십 년 집 안에서만 갇혀 살았다. 밖으로 훨훨 나가고 싶다. 허무하기로 따지면 남자라고 덜 할 수 없지만 은아는 백 소장을 버리기로 했다. 살림을 차린 건 아니지만 행복해하는 모습은 배신감을 떨칠 수 없게 한다. 같이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부엌에 들어간 적 없고, 그 뻔한 라면 한번 직접 끓인 적이 없으며 식후 물 한 잔까지 자기 손으로 따라 마신 적 없는 위인이다. 집에서는 아무 불편 없이 입 만 갖고 편히 산 사람이다. 은아는 백 소장의 엄마 같은 아내였다.


소장은 발목 위로 살짝 보이는 악어 표를 알아챘다. 눈치 없기로 유명한 사람이 58000원짜리 초록 악어가 그려진 양말을 그것도 고속도로 통행료를 내고 장 아웃렛까지 가서 샀다. 빕스에서는 네스 치즈 폼 폭립과 기네스 블랙페퍼 크럼블 쉬림프를 시켰던 모양이다. 영수증에 찍힌 금액도 경악스럽지만 포인트를 정 소장이 올린 걸 감안하면 그들의 만남은 백 소장의 자백과 달리 처음이 아닌 것이다. 은아는 자기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남자이기 때문에 자기가 늙도록 곁에서 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그럴 필요가 없음을 빠르게 알았다. 소용없구나 싶었다. 낯선 스킨 냄새를 풍기며 새벽에 오는 남자를 기다리기보다 유혹에 빠진 남자가 늪에서 서서히 말라가길 기다리는 게 쉽겠다 싶었다. 백 소장의 변명을 듣는 내내 목을 타고 내리는 눈물이 아깝다 싶었다. 일하느라 지쳤고, 삶이 지겹고, 오래된 사랑은 하찮고, 그래서 우발적인 사고 같이 교통사고 같이 일어나버린 일이야. 방심한 사이에 생긴 일, 좀 봐주라.


우리 나이에 할 소린 아닌데 백 소장 참 웃긴다. 어찌 그런 열정이 아직도 있을까. 스무 살이나 어린 정 소장과 차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숙박할 수 있도록 주차 시설을 갖춘 숙박업소에서 때때로 레슬링을 하고 마트에서 산 간식을 나눠 먹으며 휴식을 했단다. 만날 때마다 과일 선물 받고, 사무실에는 철마다 화분 배달되고, 폰에는 수시로 안부 메일이 날아오고... 아, 그녀가 부럽다.


은아야, 우리도 부정을 저지를까? 나이가 너무 많지? 직업도 없고 돈도 없으니 눈길을 붙잡긴 어려울 거야. 좋거나 싫거나 즐겁거나 슬프거나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살아서 마음이 밖으로 나가버렸을까? 딱히 잘못하거나 불성실하게 대한 적도 없는데 백 소장은 왜 마음을 그녀에게 보냈을까?

이제 우리도 엄살을 부리며 호들갑을 떨며 살아야 할 것 같아. 참아주고, 배려하고, 양보하지 말고 자신의 몫을 단단히 거머쥐고 상처 받지 말고 살아야 해. 어쩌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백 소장을 다시 사랑할 수 없을 거야. 마음을 극진히 누르던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지. 그래도 너 자신을 놓는 바보 같은 일은 하지 말자. 자꾸 우는 네가 녹아버릴까 걱정된다고.

오늘 커피는 스페셜티 원두다. 훅~ 들이키면 그윽이 퍼지는 복잡다단한 향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꽃향기에 가까운 바닐라향이 화르륵 피는 깔끔한 커피다. 초콜릿향이 쌉쌀한 쓴 맛을 덮는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커피다.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고 잠시 쉬어가게 하는 커피다. 이해 불가의 마음을 쓰디쓴 맛과 부드러움으로 다독인다. 진부하고 평이한 나날이 제럴드 졸링의 Spanish Heart의 음률을 따라 흘러간다. 갈색 빛 찰랑거리는 액체에 눈길이 머문다. 풍부한 향이 쌉싸름함을 감싸는 커피다. 온화한 갈색에 도취되어 암청색 너울 같은 마음이 라앉는다. 커피 향에 힘 빠진 여름이 속절없이 간다. 은아는 혼자 맞을 미래가 포장되지 않은 길처럼 보인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