몹시 슬픈 이야기다. 아니지, 기분 나쁜 이야긴가. 버티던 시간이 툭 터져버린 이야기다. 꽃무늬 커피잔 세트와 고운 도자기 접시들, 파스텔 톤의 무쇠 냄비와 실바트 우든 프라이팬 세트 등 마음을 담아 모은 살림살이가 윤기를 잃고 서성거리는 이야기다. 장난스러운 웃음이 가득 찬 표정으로 치면 기쁜 이야기여야 맞는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입꼬리를 올리고 눈을 두 번 깜박이고 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송두리째 던진 서른한 해였다. 지금은 그저 자신이 참 쓸모없는 사람으로 느껴질 뿐이다.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역삼동이었다. 을지 순환선이 개통되고 역삼 성당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삼 년을 채 살지 못하고 진주로 이사했다. 무탈히 평탄한 길을 걷는가 했는데 그것도 잠시였다. 아가씨를 사궜다. 둘째를 낳은 지 이레 되었고 시어머니께서 산바라지를 하셨다. 아가씨가 집 근처 찻집으로 찾아와 돈을 주며 애원했다. 같이 살게 해 달라고 말했다. 어렵다면 셋이서 살아도 좋다고 했다. 아들을 원했지만 줄줄이 딸을 낳았고 대를 잇기 위해 여자를 얻었다, 는 조선시대 이야기도 아니고 무슨 이런 비합리적인 사랑 타령인가 싶었다. 내밀히 숨겨도 구역질 나는 일이 건만 버젓이 얼굴을 들이댔더란다. 내연녀의 역성을 드는 남편이란 사람의 태도에 속에서 가늘고 긴 끈이 툭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구나 싶었단다.
나지막한 목소리와 가을볕에 그을린 얼굴이 좋았다. 거제 뱃사람의 아들이라 건장한 모습이 든든해 보였다. 첫 입맞춤은 거의 강압적이었지만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대학 내내 붙어 다녔다. 혼자 열심히 다니는 모습이 근사해 보였고 우울해 보이는 눈빛도 그때는 좋았다. 일주일이 넘도록 먼저 전화하지 않는 남자였다. 모든 상황을 주도하길 좋아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불뚝 화를 내곤 했다. 마음속에 상처 입은 아이가 있어 불안한 사람이었다. 무겁고 건조한 사람이었다.
사교적이고 부드러운 여대생이었다. 원래 서울 태생이라 나긋한 말씨며 고운 손짓과 가벼운 걸음이 마치 발레리나 같다는 칭찬을 들었다. 길고 곧은 다리, 큰 키가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후배들을 살뜰히 챙기는 선배로 소문나서 학과에서는 늘 인기가 많았다. 따뜻하고 순한 사람이라 이런저런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세련된 외모와 달리 사람 보는 눈이 그다지 없었던 때였다.
오늘의 커피는 성숙한 여성이다. 어이없는 일에도 눈썹 하나 까닥 않는 뚝심도 있다. 교양 있는 어른답게 일처리 잘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두통이 있고 심장이 너무 빨리 뛸 때 마시면 심장을 더 빨리 뛰게 하는 효과도 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때 마시면 밤을 온전히 지킬 수 있다. 잠도 못 자고 막 불안할 때는 더 불안해진다. 같이 사는 남자나 여자가 자꾸 자기 생각만 난다며 울먹거릴 때 한 대 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당신 없으면 못 살겠어하며 진상 부릴 때는 머리가 맑아져 상대의 본모습이 더 또렷하게 보인다. 옷장 속 낡은 코트가 보기 싫을 때, 자신을 하찮게 생각할 때, 엄청난 속도로 자존감이 작아질 때, 희망이 수그러들 때, 스스로 우습게 여겨질 때 마시면 확고한 신념으로 무장한 언니가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강하게 해야 한다며 충고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디도는 향기롭고 꽃에서 얻은 꿀의 단맛이 난다. 맛깔나면서 깊은 초콜릿 맛이 맑게 살랑거린다. 오래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이 든다. 콧노래가 흥얼거려진다. 쌉쌀한 그 맛에 눈을 얄따랗게 뜨고 조금 비겁한 남자를 건들거리듯 충고하는 씩씩한 언니의 웃음이 보인다. 비강을 통하는 붉은 장미 향에 아기처럼 울던 그녀가 울음을 그친다.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했던 표정이 풀어진다. '나와 상관없어', 이제 내 삶을 살아야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