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 같이 또 따로

브라질 씨에라 옐로 버번

by 만델링

엄마, 생모이며 친정 엄마의 표현으로 치면 나는 힘들게 하는 일이 없다. 순한 박서방이 따박따박 벌어다 주는 돈으로 편히 사는 사람이다. 순한 박서방은 평생(벌써 적용하기에 난해한 단어이지만 엄마는 단호히 평생이라 하신다) 가족을 위해 밥벌이를 한 고단한 사람이고 이제 좀 놓여 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내 엄마의 사위다. 쉰이 지나 지친 몸이 여기저기 아픈 딸이 사는 게 참 마음 같지 않고 고단하다는 말을 할 때는 그 정도 고생은 누구나 하지, 그만큼도 안 하고 어찌 사누, 하신 분이다. 엄마는 남의 돈 안 빌리고 먹고사는 문제는 어찌어찌 해결하고 아이들 대학 공부시키고 부부가 오순도순 정겹게 큰 싸움 없이 살면 참 잘 사는 삶이라 여긴다.


아이들을 다 키워놓은 다음에는 각자의 기호대로 사는 건 어떨까? 순한 박서방은 취미가 다양하다. 다루지 못하는 악기가 없고 내기로 하는 운동에 지는 법이 없다. 목공에도 소질이 남 다르며 난을 채집하고 키우는 일에도 안목이 있다.

순한 박서방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힘들지 않게 사는 나는 세상 돌아가는 뉴스를 신문으로 읽기보다 소리로 듣는 걸 좋아한다. 정신 건강에 좋을 건 없어도 꼬박꼬박 꼴 보기 싫다 욕하면서 듣는다. 취미가 없고 애써서 뭔가를 배우는 것에도 시들하다. 밀린 집안일과 반복된 일상에 마음이 건조하다. 딱 그 나이만큼 나이 들어 보이고 화장을 하지도 않고 옷을 갖춰 입는 취향도 없다.

절없이 늙어만 가고 일생 동안 거칠고 험한 세상을 살아온 양가 부모님을 가까이서 보는 탓인지도 모른다. 그분들은 대체로 무뚝뚝하며 미소와 감사, 부드러운 배려에 인색하다. 그들 속에서 살지만 나는 늘 뭔가 무안하고 불편하다. 그들의 삶이 서럽고 힘에 벅찬 나날이었지만 지금은 체로 잔잔하니 조금 자연스레 웃으며 사는 건 좋을 것 같다.


요즘 나는 큰 일은 넘어가는데 사소한 일에 점점 참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순한 박서방과 다투는 일이 잦다. 그래서 생각했다. 이제 꼴리는 대로 살아도 될 나이가 아닌가!

고요하고 지루함까지 얹어진 노년기에 닿았을 때 나는 저녁 외출을 하고 싶다.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을 재지 않고 밖에서 의례 점심에 모이고들 한 친구들과 저녁에 만나서 눈치 보지 않고 떠들고 싶다. 고교 동기회도 가고 이웃 아낙들과 가볍게 맥주잔도 부딪히고 싶다. 운동 모임에 가입해서 세상 저울에 나잇값을 매김 당하지 않고 당당히 바깥일을 하는 여성들을 만나고 싶다. 단순하고 명쾌하게 늙고 싶다. 진중하고 차분하게 늙음의 생활을 받아들이고 싶다.


오늘의 커피는 그저 시시하다. 모나거나 도드라진 구석 하나 없다. 숨 쉬고 움직이고 웃고 우는 일상의 연속 같은 무난함이다. 불현듯 이 순간이 얼마나 경이롭고 행복한 순간인지 깨달았다, 는 메시지는 없다. 슴하고 고소하고 볶은 견과류의 풍미가 있다. 조각 난 얼음이 둥둥 떠 있는 차가운 커피로 마시면 더 맛나다. 생크림이 든 녹차 롤과 곁들이고자 하면 가늘고 빠른 물줄기로 내려 뜨겁게 마시면 한층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택은 자유다, 아아든 따아든. 심심함도 한가함도 과로하며 치열하게 산 생활도 그저 감사함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커피다. 반드시 특별할 필요는 없으며 모두가 각자의 쓸모는 있다고 말한다. 같이 하거나 따로 해도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하는 커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