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 집중력이 샘솟는 공간에서
우리 동네 아메리카노
커피 머신이 돌아간다. 스팀기에서 김이 치익~ 뿜어져 나온다, 접시는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낸다.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두런두런 이야기한다. 무슨 재미난 얘기일까, 잠시 귀 기울인다. 기계 소리와 달달한 음악,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카페다. 마음이 편하고 집중력이 좋아진다. 집에서 책을 읽을 때는 몰입이 덜하다. 혼자 있어도 그렇다. 내 책상이 없어서 그렇다. 책상이 있으면 더 잘 읽고 쓸 수 있을 것 같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단정한 자세로 앉아서 쓸 것이다. 톡톡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200자 원고지 10장은 쉽게 쓰지 않을까. 희망사항이다. 글이 늘지 않으니 핑계와 구실을 붙이는 것이다. 동네 카페에 나온 이유다. 약간의 소란스러움과 부산스러움이 있는 카페는 의외로 집중이 잘 된다. 몰입이 쉬운 이유를 생각한다. 궁금증은 구글링으로 해결한다. 백색소음이다. 주파수 스펙트럼이 일정한 소음으로 다양한 음높이를 가진 소리가 합쳐진 것이다. 주변 환경에서 흔히 들을 수 있다. 일상생활에 방해되지 않는다. 넓은 음폭을 가지고 있어서 주변 소음을 덮는 역할도 한다. 그래서 집중력을 높이는데 도움이 된다. 그래, 오늘은 백색소음 속에서 쓰자. 음악은 잔잔하고 커피 향은 캐러멜 내음이다. 글 한 편은 꼭 채우고 가자. 커피 맛이 좋아야 할 텐데 짐짓 걱정이다.
집에 있으니 자꾸 소파에 눕는다. 갱년기가 깊어진다. 약간 우울해지고 손끝이 무뎌지며 손과 발이 저린다. 무엇보다 사물의 이름, 명사를 떠올리는 기억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표현도 어눌해진다. 적확한 단어를 찾지 못해 이거, 그거, 저거, 하는 표현을 쓴다. 또 곧잘 잊어버린다. 담담히 받아들여야 하는 일인지 고민이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다. 같이 사는 사람이 유연해졌다. 그냥 좀 착해진 느낌이다. 자주 도와주려 한다. 잘해줘야지, 그런 다짐도 하는 것도 같다. 같이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연민이 생기는 모양이다. 나쁘지 않은 느낌이다. 나와 달리 남편은 전성기다. 박사과정 마친 후 강의를 한다. 회사 일하며 대학원 석박사 과정 강의를 한다. 수업 준비는 꽤나 힘들 것이다. 내색하지 않는다. 자신의 목표한 바를 끝까지 이루는 사람이다. 맡은 일에 열정적으로 임한다. 꾸준히 노력한다. 성실한 태도가 습관처럼 익었다. 나는 그런 모습에 감동한다. 인생은 새로운 경험에 도전하는 것이라 했던가. 마흔다섯의 나이에 시작한 늦공부에 마침표를 찍고 강의를 하는 모습은 감동보다 존경이다. 남편을 보며 인생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사람에게 미소 짓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간절히 원하면 이룰 수 있음을 가르친다. 열심히 끝까지 하면 절실히 필요할 때 반드시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준다는 것도 배운다.
오늘의 커피는 강배전으로 볶은 원두로 거칠게 내렸다. 풍미와 향미를 깡그리 사라지게 했다. 일단 참으로 맛이 없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맛이 없다. 뜨거운 물을 얻어다 섞었다. 연해진 커피가 마시기 한결 낫다. 한 모금 들이키니 숭늉처럼 꿀꺽 넘어간다. 무언가를 잘하고 싶은 날에는 맑고 깊게 쓴 커피가 제격이다. 자신의 재능이 부족해서 답답한 날에는 섬세한 커피가 필요하다. 자신을 동정하고 연민할 때는 산미가 가득한 커피가 좋다.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내가 편히 사는 건 밥을 벌어다 주는 누군가의 도움이었구나, 그런 신세 한탄이 들 때는 스모키 향과 묵직한 바디감 있는 커피가 어울린다. 우리 동네에는 쓸쓸하고 고요한 커피가 없다. 건조한 신맛이 혀를 자극하고 잘 익은 과일의 완숙한 단맛이 어우러진 커피, 없다. 우아하고 정열적인 커피 또한 없다. 그저 쓰고 쓴 커피가 있다. 넓고 환한 공간을 채우는 맛있는 커피가 있으면 좋겠다. 오색 마삭 화분이 찰랑거리는 녹색 공간에 한결 가벼운 커피가 없는 게 아쉽다. 오늘의 커피는 맛이라고는 없다. 투박하지만 섬세하고 새콤하고 부드러운 산미가 있는 개성 있는 커피를 그리워하게 한다. 다소곳한 자세에 말투마저 부드러운 저 여성이 마시는 커피도 맛은 없을 것이다. 아메리카노를 시키는 걸 봤다. 오늘은 물을 넉넉히 섞은 커피를 마신다. 덕분에 찬찬히 썼다. 집에 가도 되겠다. 주차된 봉고차가 있다. 스님이 사주를 봐준단다. '사주 봐 드립니다'라고 쓴 노란 깃발이 바람에 흔들린다. 잠시 떠남의 욕망이 일렁인다. 먼 곳에 대한 그리움이 인다. 스님에게 사주나 봐달라 할까 보다. 바람 부는 날에 커피나 마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