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3 날 보러 온다면
에티오피아 Lomi Tasha
태풍 '찬투'가 북상 중이다. 현재 서귀포 남남 쪽에서 전남 동부, 경남 남해안쪽으로 움직인다. 태풍은 북태평양 서부에서 발생한 열대 저기압이다. 중심 부근의 최대 풍속이 17m/s 이상이다. 강한 폭풍우를 동반한다. 발생 지역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고등학교 지리 시간에 여러 번 들었을 것이다. 태풍, 허리케인, 사이클론, 윌리윌리. 이름은 달라도 모두 열대성 저기압이다. 일반적으로 해수면 온도가 27도 이상인 열대 해역에서 발생한다. 극지방보다 열을 많이 받는 적도 부근의 열적 불균형을 없애는 기상 현상 중 하나다. 그래서 오늘 날씨가 어떤지 묻는다면 기꺼이 대답해 드리리라. 맑다! 뉴스 앵커의 걱정은 듣지 못한 걸로 하자. 깃발 나부끼듯 부는 바람이 시원하다. 원활한 대기 확산으로 답답했던 공기가 상쾌해졌다. 금목서 향기가 바람을 따라 흐른다. 왠지 마음이 달달해진다. 반가운 사람이 찾아올 것 같은 예감이다. 내 가장 친한 친구가 오면 좋겠다. 눈도 침침해지고, 염증이나 상처가 어지간해서 잘 낫지 않고, 금세 피로하다는 말을 주저리주저리 할 것이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경쾌하게 말해야지. 친구란 오래 고민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도 된다, 전혀 어색하지 않다. 내가 생각하는 친구는 그렇다.
오늘은 커피전문점 알바생처럼 조심조심 내린다. 원두 18g, 물 온도 88도, 추출 시간 2분 40초, 용량 200ml. 하리오 드립으로 물줄기를 가늘고 고르게 한다. 음, 향기로운 로미타샤다. 입맛이 쓰고 기운이 없을 때 스치는 향기만 맡아도 입맛이 돌아온다. 달콤하게 스며들어 웃음꽃을 피운다. 경쾌하고 단순하다. 그럼에도 향기롭고 산뜻하다. 달콤한 뒷맛과 향, 씁쓸하고 이국적인 쓴 맛이다. 압축된 맛이 기세 등등하게 퍼진다. 레몬의 산미가 두드러진 커피다. 비린 듯 알싸한 아카시아 향도 난다. 아주 나긋하고 세련된 여성이 그려진다. 조용하고 드라이하다. 가족들이 깨기 전 단아한 모습으로 이젤을 펼치는 친구가 생각나는 커피다. 참 황홀한 커피다. 눈을 감고 마시면 더욱 맛깔나다. 후각이 예민해져 향이 또렷하게 스민다. 커피 향이 동글동글 예쁘게 핀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주문을 외운다. 무기력함을 드러내며 자학하지 말자, 명쾌한 결론을 요구하는 강박증에 시달리지 말자. 이것은 옳은가, 저것은 그른가, 복잡할 때는 생각을 미루자. 어색해지는 걸 꾹 참아가면서 인간관계를 붙잡고 있지 말자. 혼자 중얼중얼 말한다. 오늘도 이룬 것 없이 5G급으로 지나간다. 어찌 된 까닭인지 나이가 듦에 진득하니 앉아 있을 시간은 더 없다. 쪽 글도 간신히 쓴다. 나이를 더해서 좋은 것은 그간 보이지 않았던 작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사소하다고 지나쳤던 것이다. 삶에서 무관하다 여겼던 것들이다. 작은 그것들이 변화 없는 삶을 견딜 수 있게 한다. 힘들어도 생활이 유지된다. 즐거움과 기쁨을 느끼며 알뜰하게 살아가게 한다.
오늘의 커피는 스쳐간 과거를 다시 만나게 한다. 한때 마음을 흔들고 흥분하게 했지만 사라져 버린 것들을 추억한다. 가사가 좋았던 노래, 길을 잃고 돌고 돌았던 골목길, 바람에 흔들리며 말라가는 깻단, 어스름이 내리는 운동장, 우르르 몰려다녔던 분식집, 도서관 계단 옆에 있던 자판기. 부족하고 빛났던 청춘의 시간이 생각난다.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들떠서 두근거리던 시간이 불쑥 떠오른다. 활짝 개인 하늘이 파래서 기쁜 날, 과거를 회상한다. 아, 그리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