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 그 섬에서 놀 사람, 여기 붙어라

콜롬비아 엘 나란조 게이샤

by 만델링

스테인리스 들통이 들썩거리며 뜨거운 김을 치이칙 뿜어낸다. 오는 가을을 맞이하는 축하 행사라기엔 품이 많이 드는 노동이다. 보랏빛 도라지 꽃과 주홍빛 벚나무 이파리가 하늘거리는 날이다. 이리도 감성 충만한 날 만들기엔 벅찬 음식이다. 반쯤 물든 벚나무 이파리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초록 이파리는 다음 봄을 기다리는 모양이다. 가까이 붙은 이파리의 소곤거림을 듣지 않고 여전히 푸르다.

느릿느릿 물드는 시간에 곰국을 끓이는 일은 쓸쓸하다. 곰국은 생생한 일상이다. 어찌하리오, 수굿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에게 곰국은 든든한 요기다. 따뜻하고 편안한 엄마 품이다. 나에게 곰국은 떠나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다. 그득한 국물이 이삼일의 식사를 책임질 것이다. 누릿한 냄새가 고소한 냄새로 바뀐다. 기름기 동동 뜨는 뽀얗지 않은 뜨거운 국이 순한 우윳빛을 보인다. 수고로움 끝에 식욕을 자극하는 든든한 국물이 됐다. 이제 가족의 끼니 걱정은 곰국 옆에 두고 떠나도 된다. 엄마, 아내, 며느리의 감투를 벗고 가볍게 나서자.


BX 8170 08:30~09:30 BX 8118 20:00~21:05 나들이 갈 곳은 이미 정했다. 그 섬이다. 바람이 보인다. 보이지 않는 바람이 정말로 보인다. 바람이 아름다울 수 있음을 느끼는 곳이다. 때로 바람이 말도 한다. 사는 일이 서툴러 울던 내게 흔들려도 끝까지 살아보라고 말했다. 종달리 소금밭과 아담한 시골 학교를 지나온 바람이 말했다. 물빛이 고운 광치기 해변을 지나 섭지코지 앞에서 만난 바람도 그리 말했다. 성산 일출봉은 삼면이 깎아지른 듯한 해식애다. 거기서 해돋이를 마친 바람은 괜찮다고 했다. 못난이 그만 울어도 된다고 했다. 성산포 들판과 우도를 거친 바람은 나를 예쁘다고 했다. 지극히 무력했던 한때 제주의 바람에게 반했다. 그 바람 앞에서 섧게 울던 날 내 인생에도 바람이 자주 불 수 있음을 알았다. 바람 불지 않는 삶이 있겠냐고 생각했다.



반복해야 하는 가사 노동이 꽤나 지겹다. 피곤하고 힘든 건 아니다. 나른하고 게으르다. 완전 숙달된 장인의 경지에 올라서 그런가 보다. 애쓰고 안간힘을 다하던 시간은 지났고 슬렁슬렁해도 지적받지 않을 정도가 됐다. 재미없다. 시시하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설명할 데가 없다. 번호 붙여 깔끔하게 그래프 이용해서 설명할 수 있다. 그래, 갱년기다.

하얀 꽃눈 날릴 때, 봄바람 불 때, 노란 유채꽃이 한없이 출렁일 때, 목련이 갈색으로 짓이겨져 툭툭 떨어질 때, 진달래가 불타듯 산 정상을 향해 번져갈 때, 세로토닌 분비가 부족하다 여겨질 때, 흠흠 금목서 향기가 그리울 때, 가지가 휘어지게 달린 감이 저절로 떨어질 때, 목덜미를 간질이는 저녁 해가 짧아질 때, 서귀포 남원읍 수망리 귤밭에 귤이 올망졸망 달릴 때, 그럴 때 배낭을 꾸리고 싶다. 수고로움과 걱정은 내려놓고 유쾌하게 집을 나서고 싶다.


오늘의 커피는 꽃향기와 레몬향, 밀크캐러멜의 단맛이 좋다. 속에 밀어둔 외로움을 녹이기에 적당하다. 부드러운 향기와 저당도 설탕 맛, 금빛 귤의 시고 쌉쌀한 맛이 난다. 가볍고 우아한 커피다. 달콤하고 아른한 꽃향기에 성마른 분노가 가라앉는다. 딱히 이유 없는 성냄이 반복되는 일상이 감사하게 다가온다. 스스로를 미워하던 마음이 누그러진다. 너그러이 용서가 된다. 입꼬리에 따뜻함이 저녁노을처럼 남는다. 토닥토닥해준다. 안쓰러움, 안타까움이 엉긴 마음에 시원한 해풍이 분다. 달콤쌉싸레한 쓴 맛이 우울함을 날린다. 떠나고 싶은 마음을 잡아준다. 까끌까끌해진 마음을 세심하게 달랜다. 그 섬의 바람처럼 섬세하다. 일상에 도사린 모든 난관에도 굴하지 말자. 마음의 준비가 됐으면 이제 가자. 지치도록 같이 걷자.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해넘이와 고독한 바람이 있는 그 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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