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 생물학적 세상, 맑음

과테말라 COE #12

by 만델링

저자 리처드 도킨스, 케냐 나이로비 태생. 제 「이기적 유전자」. 다 읽기까지 한 달 걸렸다. 방 청소를 할 때마다 책상 위에 고이 앉은 모습이 눈길을 끌긴 했다. 그럼에도 선뜻 손에 잡히지 않았다. 번역서라 그렇다. 나는 우리말이 한글로 인쇄된 소설들을 좋아한다. 매끄러한 종이에 인쇄된 글자를 읽노라면 이야기 흐름에 따라 과거 세상과 그때 사람들의 삶이 보여서 가슴이 설렌다. 특히 해방 전후의 한국 근대소설, 고3 수능 1교시 언어영역 지문에 나오는 그런 이야기에 몰두한다. 내 엄마, 엄마의 엄마가 주인공인 이야기가 좋다. 피폐한 일상의 고통을 딛고 상처를 극복했다는 결말이 좋다. 어려워도 삶에 관대하고 솔직한 사람들 이야기에 홀딱 빠진다. 망설이는 마음은 있었으나 서둘러 읽히지 않았던 책을 후루룩 읽어버리게 된 건 추천사 때문이다. 눈으로 연애하던 시간을 끝내고 사흘 만에 마음을 파악했다. 두고 읽어도 길이 남을 책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는 말에 동의한다. 최재천 교수의 지극히 주관적인 추천사가 맘에 들었다. "삶에 대한 회의로 밤을 지새우는 젊음에게, 그리고 평생 삶에 대한 회의를 품고 살면서도 이렇다 할 답을 얻지 못한 지성에게 「이기적 유전자」를 권한다. 일단 붙들면 밤을 지새울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책 한 권 때문에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이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뒤바뀔 수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노안이 시작되어 눈이 침침하다. 팔을 쭉 뻗어야 겨우 글자가 보인다. 천천히 따박따박 읽었다. 가끔 읽어 주는 낭독자 마냥 고운 목소리로 읽기도 했다. 차츰 새로운 내용이 머릿속에 저장되었다. 해박한 식을 가진 이과생이 된 기분이다.



1976년 출판되었다. 간 이후 45년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 행동에 대한 난해했던 문제들을 유전자의 관점에서 서술한다. 간결하고 적절한 생물학적 비유로 풀어가는 것이 대단하다. 과학 서적이. 그럼에도 문학서처럼 마음을 휘어잡는. 대담하고 섬세한 이론을 펼쳐 보이는 문장력이 탁월하다. 진화 생물학 개론서 같지만 핵심을 꿰뚫는 설명들은 풍요롭고 매혹적이다. 창조성으로 가득 찬 매력적인 진화론에 대해 섬세하게 기술한다. 전문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경쾌하고 거침없는 스타일로 누구든지 읽을 수 있게 기술했다. 려운 내용을 쉽게 쓰는 것이 최상의 글이라는 논의가 맞는다면 이 책의 저자는 최고의 작가다.

40억 년 전 태초의 바다에 스스로 복제 사본을 만드는 힘을 가진 분자가 나타났다. 자기 복사체를 만들며 살다가 지금에 이르렀다. 절멸하지 않고 생존 기술의 명수가 됐다는 뜻이다. 더 단순히 말하면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하는 문제는 알이 닭을 낳는다는 유전적 관점으로 마무리된다. 알의 한판승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된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삶은 한없이 허무하고 약하디 약할 뿐이다. 자신의 복사체를 만들며 사는 일, 결국 로봇 같지 않은가 말이다. 허나 조금 겸허하게 삶의 허무감을 받아들이고 극복한다면 자신이 생명의 주인이 된다. 세상의 모든 생명이 더없이 소중하다고 느낀다. 이 책은 일단 손에 잡으면 내려놓지 못하고 끝까지 읽게 된다. 공상 과학 소설처럼 읽으면 된다. 과학, 생명, 유전자, 다윈 이후 진화론 등에 전혀 문외한 일지라도 차분히 읽을 수 있다. 읽다 보면 생에 대한 약간의 통찰이 생긴다. 양보하며 나누며 사는 넓은 생물학적 세상을 배운다.


오늘의 커피는 유전자의 진화론에 대해 생각하며 마시는 커피다. 대단히 거창하게 말해버렸다. 마땅한 표현이 없어서 그리 쓴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하지 않음은 사실이다. 그 옛날 염소를 치는 목동('칼디'였다고 전한다)이 숲에서 어떤 붉은 열매를 먹은 염소들만이 유난히 날래고 힘이 센 것을 보았다. 염소가 먹었던 열매를 발견한 것이 커피의 시초라면 지금 우리가 마시는 커피는 유전자의 변화에 따른 산물이 아니겠는가. 과테말라 시오이는 톡 하는 새콤함이 좋다. 껍질에 주홍빛이 살짝 도는 큰 자몽을 먹는 느낌이다. 여윤이 남는 뒷맛은 여간 씁쓸한 게 아니다. 깊고 부드럽게 윽 쓰다. 좋은 쓴 맛이다. 가을 기운이 느껴지고 추석을 앞에 두고 분주한 지금 마시기 좋다. 들뜬 분위기에 신산스러운 마음이 가벼워다. 특별할 게 없고 특별해 보자는 욕망도 없어진다. 삶은 보잘것없고 시시하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허무주의적 염세관에 물들었다. 「이기적 유전자」를 읽으며 과테말라를 마실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인간의 지위와 생명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낯선 생물학적 세상을 선입견 없이 오롯이 느끼게 한다. 추상에서 구체로 진화에 대한 사고의 전환이 생긴다. 석의 힘이 길러진다. 실존의 절실함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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