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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 테크니션 Jun 20. 2020

여행(旅行), 여행(女行)

오랜만에 모임에서 만난 대학 동창에게 근황을 물었습니다. 친구의 답변은 역시나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일반적인 것이었습니다. 사실 중년의 남자들끼리 모여하는 대화는 거의 비슷할 것입니다. 은퇴 후 생활 걱정, 자식들 미래 걱정, 주변 사람들 건강 걱정…..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의례적인 인사말로 친구 부인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해외여행 중이랍니다. 나는 당연히 친구들과 같이 떠난 여행이라고 생각하고 요즘 자유를 만끽해서 좋겠다고 말했더니 친구의 대답이 의외였습니다. 와이프가 친구들과 같이 간 것이 아니라 혼자 만의 장기 여행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것도 패키지여행도 아니고 배낭여행을 갔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남자도 치안과 거리 때문에 쉽게 도전하지 못하는 남미 일주 여행을 말입니다. 물론 브라질의 거대 예수상, 아르헨티나의 이과수 폭포, 페루의 마추픽추, 우유니 소금 사막, 파타고니아의 빙하, 칠레의 산티아고 등 너무나도 유명한 관광지가 즐비한 남미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치안이 불안하고 위험한 남미지역을 한 달 이상 그것도 여성 혼자서 여행을 한다는 것은 웬만한 배짱과 용기가 아니면 쉽지 않은 도전입니다. 내 안사람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부녀자의 여행을 엄금하는 규정이 있었다 합니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기록된 부녀자 외출 금지 규정은 중국의 예법서인 <예기>의 가르침을 따라 만들었는데 만일 부녀자가 여행하다 들키면 곤장 100대에 해당하는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 합니다.  그러나 이런 형벌 조차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의 본능, 여성의 욕망을 강제하지는 못 했던 것 같습니다. 

조선 정조 때 제주에 사는 김만덕이라는 여인은 양가집 규수로 태어났으나 어릴 적에 부모를 여의고 생계를 위한 방편으로 기생에 적을 두었으나 몸 가짐을 바로 하여 20세가 되자 관가로 찾아가 울며 호소하여 다시 양인으로 신분을 회복하였습니다. 그 후 그녀는 혼인을 거부하고 독신으로 살면서 장사를 하여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정조 19년에 제주에 큰 기근이 들어 굶어 죽는 사람이 늘자 김만덕은 큰돈을 들여 육지에서 쌀을 사 와 백성들을 구휼하였습니다. 이런 그의 선행이 제주에 알려지자 1년 후 제주목사는 정조에게 장계를 올려 그의 선행을 알리자 정조는 그녀의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겠다 하자 그녀는 “ 저는 늙고 자식도 없습니다. 신분을 상승할 생각도 없습니다. 그저 육지로 나가 한양 구경을 하고 싶습니다. 가는 길에 금강산도 구경하고 싶습니다.”라고 하자 정조는 흔쾌히 허락을 하고 친히 역마까지 내려 그녀의 한양행을 지시했다고 합니다. 이런 소문이 장안에 온통 퍼져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보고 싶어 했다고 합니다. 당시 그녀는 조선 최고의 인기 스타가 된 것입니다. 

 1817년 조선 순조 때 태어난 김금원이란 여인은 어려서부터 병을 자주 앓아 부모님이 가사나 바느질과 같은 여인의 일을 시키지 않고 문자를 가르쳤습니다. 어린 금원은 보통의 어린 여자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조선의 여성이라면 가져야 할 부녀자의 당연한 도리를 단호히 거부하면서 세상 밖으로의 삶을 추구하였습니다.  14세가 되던 1830년 “남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 부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은 불행이지만 하늘은 나에게 산수를 즐기는 어진 성품과 눈과 귀로 듣고 볼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또 이를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으니 얼마나 좋은가? 여자로 태어났다고 규방 깊숙이 들어앉아 여자의 길을 지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라고 외치며 부모님에게 여행을 결행한다는 출사표를 던졌습니다. 당연히 14살의 어린 여자아이의 가출과 여행을 허락할 부모는 없습니다, 그것도 하물며 현대도 아니고 조선시대에 말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금원의 뜻을 부모도 꺽지 못하였습니다. 금원은 14살의 어린 나이로 남장을 하고 관동 팔경과 금강산을 유람하고 한양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 후 1845년 김덕희의 소실이 된 금원은 의주 부윤이 된 남편을 따라 황해도 평안도를 여행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고 다시 한양으로 돌아와 호동서락기 (湖東西洛記) 라는 산문집을 지었습니다. 참으로 당시 대단한 신여성이었습니다. 역시 고래부터 우리 민족은 남자보다 여자가 더 강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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