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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IDY Nov 03. 2022

첫사랑을 잊을 수 없는 이유, <20세기 소녀>

게슈탈트 심리치료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첫사랑의 기억

(※주의!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될 만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20세기 소녀>의 인기가 상당하네요. 사실, 내용적으로는 엄청나게 특별한 영화라고는 할 수 없지만 첫사랑이 시작되었던 설렘, 20세기 세기말의 감성, 우정과 사랑 사이의 갈등 등 여러 공감요소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인기에는 여러 포인트들이 있지만, 이 중에서 특히 "첫사랑" 이라는 키워드가 인기의 1등 공신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왜 많은 사람들에게 대부분 첫사랑은 여전히 설레고 잊혀지지 않는 것일까요? 이를 게슈탈트 심리치료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게슈탈트 심리치료는 무엇일까요? 간단히 말하자면, 본인이 원하는 것(욕구나 감정)을 정확히 알아차리고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 욕구를 건강하게 해소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심리치료를 말합니다. 게슈탈트 심리치료는 게슈탈트 심리학의 이론을 바탕으로 하지만, 이를 좀 더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할 수 있도록 추가적인 개념들을 설정했는데요, '게슈탈트', '전경과 배경', '미해결 과제' 가 그것입니다. 


 전경과 배경은 그림에서의 배치를 떠올리시면 쉬운데요, 지금 현재 의식의 중심이 되는 생각, 욕구, 감정 등이 전경에 해당하는 것이고 그 외의 의식에 떠오르지 않는 다른 것들은 배경으로 물러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전경과 배경은 항상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에 따라 전경과 배경이 계속 바뀌고 교차됩니다. '게슈탈트'를 형성한다는 것은 그 순간 가장 중요한 욕구나 감정을 전경으로 떠올리는 것을 의미하고요. '미해결 과제'라고 하는 것은 현재 전경에 떠오른 욕구, 감정 등에 대해 원래대로라면 환경과의 접촉을 통해 해결하고 해소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을 뜻합니다. 


 즉, 게슈탈트 심리치료에서는 "현재"의 욕구와 감정을 전경으로 잘 떠올리고(게슈탈트를 잘 형성하고), 이를 미해결 과제가 되지 않게 잘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그렇기에 건강한 심리적 상태가 되려면 "내가 현재 지금 뭘 원하는지를 잘 알고" "환경과의 적절한 상호작용을 통해 원하는 것을 해결하고" "선명하게 전경과 배경을 구분하여 미해결 과제를 남기지 않는 것" 이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첫사랑' 키워드를 다시 가져와 봅니다. 첫사랑과 결혼까지 해서 행복하게 사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첫사랑은 '이루지 못한' 그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이를 게슈탈트 심리치료에 적용해 보면, 첫사랑을 하는 당시의 '게슈탈트'는 그 사람과의 행복한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이겠죠.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첫사랑은 이미 성숙한 상태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 정서적으로 미숙한 상태에서 시작하게 됩니다. 즉, 내가 현재 원하는 욕구나 감정을 전경으로 선명하게 잘 떠올려야 하는데 미성숙한 상태에서는 '나는 이 아이를 정말 좋아하는 걸까?' 하며 내가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헤깔리고 잘 모릅니다.

 특히 사춘기 시절에는 또래관계와의 우정 또한 매우 중요한 과제이기에 <20세기 소녀>에서는 주인공 나보라가 풍운호에게 끌리면서도, 가장 절친한 친구 연두가 운호를 좋아하기에 그 마음을 숨기려 합니다. 일부러 밀어내고 멀리하려 하죠. 그러나 본인이 실제 원하는 것, 즉 운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거나 더 나아가 더욱 친밀한 사이가 되는 것과 반대되는 행동이기에 게슈탈트를 제대로 형성하지 못했고 따라서 이는 환경과의 접촉을 통해 해소되지 못했죠. 이러한 미해결 과제는 보라의 마음속에 남아 보라를 괴롭힙니다.


 물론, 영화에서는 연두가 보라의 마음을 알아채고 양보하고요. 보라도 비로소 자신의 마음을 내비치며 운호와 서로 쌍방향의 감정임을 확인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이가 진척되는가 싶더니 운호는 뉴질랜드로 떠나야 한다네요. 이 둘은 마음을 확인하자마자 가슴아픈 이별을 하고, 어른이 되어 같은 대학교에 가서 다시 만나자며 연락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자마자 운호의 연락이 끊겨버렸습니다. 


 보라는 혹시 몰라 그를 계속 기다리지만 연락은 끝까지 오지 않고 심지어 전화번호도 없는 번호로 바뀌어버립니다. 보라는 운호를 원망하며 앞으로 그를 잊고 살 것임을 다짐합니다. 그러나 그를 잊고 좋은 사람을 만나겠다며 나간 소개팅에서 그 사람 이름이 '운호'임을 알게 된 순간 보라는 목놓아 그 자리에서 울어버립니다. 보라에게는 운호와의 관계가 정말 큰 미해결 과제였습니다. 마음 속에 깊숙히 묻어두고 다시는 생각하지 않으려 다짐했지만, 그 뇌관이 건드려진 순간 감정이 폭발하게 되죠.


 영화의 말미에서, 이제는 제법 성숙한 어른이 된 보라 앞에 한 소포가 도착하는데요. 그 소포에 동봉된 비디오 테이프와 어떤 전시회 소식을 접한 보라는 호기심에 전시회를 찾아갑니다. 전시회에서 보라는 왜 운호가 그동안 연락이 되지 않았는지를 비로소 알게 됩니다. 운호의 사정을 알게 된 보라는, 이제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낡은 비디오 플레이어를 꺼내어 소포에 동봉되어 있던 비디오 테이프를 봅니다. 보라는 그 시절의 운호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 친구들과의 추억, 운호와의 추억을 곱씹으며 눈물을 흘립니다. 이제는, 보라의 마음 속에서 운호를 보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첫사랑이 잊히지 않고 나를 계속 괴롭히는 것인지 이제 눈치채셨나요?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런 말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어요. 첫사랑과 사귀면 금방 깨지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요.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게 언제나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간절히 원했던 것을 성취하고 나서 오히려 허무할 때도 있고, 예상과는 달라서 실망할 때도 많습니다. 때로는 오히려 첫사랑과 사귀기 전에 설렜던 그 순간이 그리워질 때도 있을 겁니다. 알고보면 나는 그 사람을 사랑했다기보다는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내 모습이 아름답고 좋았던 것일 수도 있어요. 

 여러모로 첫사랑은 설익고 미숙한 상태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그 순간의 감정과 원하는 바를 잘 깨닫기 어려우며(전경과 배경 구분, 게슈탈트 형성)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항상 마음에 걸린 듯이 남아있고 계속 생각이 나죠.(미해결 과제) 만약 첫사랑과 이루어졌다면 이렇게까지 생각나지는 않았을 겁니다. 어설프게나마 해결했던 과제니까요. 그러나 엄청 찜찜하게 헤어졌더라면 여타의 첫사랑 추억처럼 마음 속 미해결 과제처럼 남아 있을 가능성도 크고요.


 앞서 말씀드린 게슈탈트 심리치료에서 중요한 것은 "현재" 원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건강하게" 해결하는 것을 중시합니다. 첫사랑 운호의 사정을 알게 된 보라는, 이제 과거 속 미해결 과제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현재" 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마음의 건강은, 내가 지금 이 순간에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욕구를 가지는지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욕구가 꼭 이성간의 사랑일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준 운호의 조언을 참고해서 만족스러운 직업을 가졌고, 아직도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는 부모님과 현재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그게 진정 보라가 원하는 현재의 모습이라면 건강하게 게슈탈트를 형성하고 해결해 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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