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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IDY Nov 23. 2022

역사는 반복된다, <약한영웅>(Feat. 대상관계이론)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힘겹게 싸운다"

(※주의!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될 만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웨이브 오리지널 드라마 <약한 영웅>을 보았습니다. 드라마 원작은 동명의 웹툰으로, 주요한 캐릭터 설정 외에는 웹툰의 내용과 같지 않아서 같은 듯 다른 매력으로 재미있게 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폭력이 등장하는 학원물을 그렇게 즐겨보는 편은 아니었는데, 드라마와 웹툰 모두 한번 시작하니 훅 빠져들게 되는 매력이 있었죠. 아마 주인공의 설정이 매우 매력적이기 때문 아닐까 싶었습니다.


 주인공 '연시은'은 키도 작고 여리여리해서 여자로 착각할 만큼 가늘고 고운 외모를 가지고 있다고 묘사됩니다. 그리고 머리도 매우 좋고 항상 열심히 공부하는 모범생이라서, 학교폭력에 휘말리거나 학생 신분에 반하는 일탈 행위는 연시은과 거리가 먼 이야기였죠. 그러나 약육강식의 남학교에서는 조용히 공부만 하려던 연시은을 괴롭히려는 무리들이 생겨납니다. 연시은도 처음에는 본인에게만 피해가 오지 않으면 다른 주변의 일들에는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었는데요, 끈질기게 자신을 괴롭히며 놀림거리로 삼으려는 행동에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맞대응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연시은의 연약해 보이는 외모를 얕본 사람들은 허를 찌르는 연시은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합니다. "저렇게 마르고 연약하게 생겨서 한 대나 때릴지 모르겠다" 라고 비웃지만, 연시은은 침착하게 본인이 할 수 있는 것과 하지 못하는 것을 바로 분석하고, 주변 사물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일반적인 사람들의 심리를 계산하여 상대방을 굴복시킵니다.


 이러한 연시은을 눈여겨보는 반 친구가 있었습니다. 안수호라는 친구는 연시은과 달리 공부에 관심도 없고,귀찮은 일에는 신경쓰지 않으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연시은에게는 관심을 갖게 됩니다. 수호는 선천적으로 뛰어난 신체조건과 기술을 갖췄지만 싸움을 즐기거나 힘을 과시하지 않죠. 그러나 연시은을 괴롭히던 못된 무리가 되려 연시은에게 처참히 깨지고, 그 과정에서 폭주한 시은이 선을 넘으려 할 때 수호는 그를 말리며 자연스럽게 친해집니다. 그 과정에서 못된 무리에 휘둘려 시은에게 피해를 준 오범석이라는 친구도 시은에게 사과하며 셋은 우연히 친구가 됩니다.


 시은과 수호, 범석은 이 일을 계기로 각종 싸움과 보복에 휘말립니다. 시은은 원래 주변일에 무심한 사람이었고 주위에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없었지만, 자신을 위해 대신 나서주고 도와주는 수호와 범석을 보며 좋은 관계를 만들어갑니다. 목숨이 오가고 위험한 상황에 여러 번 노출되지만, 그 때마다 뛰어난 기지와 서로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나고 셋의 우정은 더욱 돈독해집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가출팸에 소속되어 있던 한 여자아이를 알게 되는데요. 오갈 데 없는 그 여자아이를 도와주기 시작하면서 범석은 왠지 시은과 수호가 자기보다 그 여자아이에게 더 관심을 갖고 잘해준다고 생각하며 질투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을 친구들에게 솔직하게 말하기보다는, 뛰어난 신체조건을 가진 수호에게 평소에 본인이 갖고 있던 열등감을 표출하죠. 처음에는 그저 친구들과 더 친해지고 싶었던 마음이 어느 순간 그 친구가 너무 밉고 이 세상에서 없어져버렸으면, 하는 마음으로까지 발전합니다. 

 범석은 시은을 괴롭히던 무리들과 어울리며 수호에게 복수할 계획을 세웁니다. 시은은 갑자기 변한 범석이 이상했지만 잠깐의 방황이라고 생각하며 범석을 믿고 기다리죠. 그러나 그런 시은의 마음을 배반하듯, 범석은 못된 무리들과 나쁜 계획을 세워 수호에게 린치를 가하고, 수호는 다행이 목숨은 건졌지만 혼수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시은은, 자신이 처음으로 마음을 열고 친해진 수호가 그렇게 된 것에 대해 복수를 결심합니다. 수호를 그렇게 만들었던 무리들을 한 명씩,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처단하고 마지막으로는 끝까지 믿었던 범석과의 관계를 끊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수호가 원래대로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지만, 시은은 앞뒤 가리지 않고 복수를 완성합니다. 그리고, 큰 문제를 일으킨 시은은 전학을 가게 되는데요. 은장고등학교로 전학 수속을 밟으면서 드라마는 마무리가 됩니다. 웹툰은 아픈 과거를 지닌 연시은이 은장고로 전학간 이후 새롭게 겪게 되는 이야기인데요, 전학 간 학교에서도 다양한 성향의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서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이 드라마의 인물관계를 보면서, 대상관계이론이 떠올랐습니다. 대상관계이론은 정신분석학에서 파생된 것으로, 사람의 인간관계, 즉 대상관계를 맺는 양상을 통해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사람은 주요한 대상(object)과의 관계맺는 과정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인데요. 특히 (주로) 엄마, 또는 양육자와 맺는 관계가 향후 맺게 되는 다른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반복된다는 것이 골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 연시은은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수재에 흔한 말썽도 일으키지 않는 조용하고 얌전한 학생으로 나오지만, 부모님은 시은에게 무관심합니다. 그저 시은이 알아서 잘 할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때때로 필요한 돈을 주는 데에 그치죠. 부모님이 이혼하셔서 아빠와 살지만 아빠는 본인 일에 바빠 시은이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엄마도 엄마 일에 바빠 그나마 시은과 잠깐 식사하는 자리에서도 본인 일로 자리를 금방 파하고 맙니다. 

 이러한 삭막한 관계 속에서 시은은 애정과 관심을 포기합니다. 부모님은 물론이고, 다른 관계도 맺지 않으려 합니다. 시은이 학우들을 괴롭히던 패거리들을 통쾌하게 제압했을 때, 다른 친구들이 신나서 말을 걸자 "나 알아? 나랑 친해?" 하면서 그 관심조차 단절시켜 버립니다. 여기에서도 회피와 무관심이라는 대상관계가 반복되고 있던 것이죠. 


 범석은 국회의원의 아들로 부유한 환경에서 키워졌지만, 알고보니 친아들이 아닌 입양된 아들이었습니다. 아빠는 그저 범석을 입양하면서 대외적으로 긍정적 이미지 메이킹이 필요했던 것이였죠. 범석은 입양되었다는 나름의 콤플렉스가 있었던 것 같고, 시은과 수호가 있는 학교로 전학오기 전까지 계속 친구들에게 맞고 무시당하며 살았습니다. 아빠는 그저 범석이 문제를 일으키면 번거로워지니 그냥 문제를 덮어버리거나, 자신을 귀찮게 한 범석을 폭행하며 분노를 표출합니다. 

 필요가 있으면 뭔가 얻어내기 위해 다가오고, 필요가 없어지면 무시당하거나 두들겨 맞는 관계. 범석이 맺어 온 대상관계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수호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자세한 언급은 없습니다. 그러나 시은과 범석보다는 사랑받는 환경에서 자란 것으로 추정됩니다. 비록 할머니와 둘이 살면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쉴 새 없이 많은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수호는 부조리한 일에는 나설 줄 알며 외로운 시은에게도 친근하게 다가갈 줄 압니다. 나중에 가출팸에서 나와 합류한 영이가 오갈 곳이 없자 할머니와 함께 살 수 있게 배려도 해 줍니다. 비록 부모님이 계시지 않지만 주요한 대상관계인 할머니와의 긍정적 관계가 수호에게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수호의 밝고 건강한 대상관계가, 범석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나 봅니다. 수호가 자신만큼

자기를 좋아해 주지 않자 범석은 필요가 없으면 버려질 것이라는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그래서 본인이 뭔가를 줄 수 있는(대부분 금전적인 것이었죠) 나쁜 패거리들에게 지속적으로 돈을 쓰면서 자신의 필요성을 입증하려 애씁니다. 그러나 수호는 돈으로 관계를 사는 것에 관심이 없기에 범석은 수호에게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둘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 것이죠.


 어릴 때의 관계맺는 방식은 그래서 생각보다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학대를 당했을 경우에는 그러한 상처가 더욱 깊게 남아 나중에 관계맺는 방식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높습니다. 그러나 그 방식을 고집할수록 내 주변에는 사람이 남지 않고 더욱 고독해질 수 있습니다. 드라마의 첫 장면에서,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힘겹게 싸운다"라는 유명한 헤르만 헤세의 말이 인용되죠. 새가 알을 깨고 나오려 안에서 투쟁할 때, 어미새는 알 밖에서 알을 같이 두드려줍니다. 결국 알을 깨는 것은 아기새의 힘이겠지만 저마다의 알을 깨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내면의 결심과 주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힘겹게 내면의 투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지나치지 말고 밖에서 같이 두드려주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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